150화. 반격 (2)
삼승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자신의 방에서 대답하겠다고 어렵게 입을 뗐다. 쇼가 끝났으니 굳이 밖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낙조는 순순히 무흠과 함께 삼승의 뒤를 따랐다. 삼승의 걸음걸이엔 힘이 빠져 있었다. 하늘마루로 다시 들어서며, 문지기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삼승을 힐끗 바라보았다. 낙조는 뒤쪽에 서서 그의 표정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삼승이 생각보다 꽤 무방비한 상태라는 걸 알아챘다.
삼승은 방문을 잠근 후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낙조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낮은 의자에 앉았다.
‘저렇게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나.’
겉으론 사람 좋은 척은 다 해 놓고서 정작 책임을 지라는 말에는 질겁하는 삼승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낙조는 조용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큰 단체를 이끄는 사람이니 자신이 내민 패가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삼승은 옅은 한숨을 아주 길게 내쉬고서 고개를 들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결론부터 먼저 얘기해 주세요.”
낙조가 칼같이 말을 잘랐다. 당시의 상황과 사정을 모두 봐주면서 자신의 시간을 쓰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해화를 찾아야 한다는 다짐에 그 어느 때보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건…….”
“더 이상 숨지 말고, 나와서 같이 싸우자고요. 여기서 눈치 보며 물러설 이유가 있어요?”
낙조의 날카로운 말에 삼승이 잠시 주춤거렸다. 당장 합의점을 찾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나 삼승이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끄니 낙조도 더 물러나기가 어려워졌다. 그 사실에 더해 자신의 힘을 알고 나니 의견에 반박하지 못한다는 상황을 덧대니 더욱 이 침묵을 길게 늘이는 게 달갑지 않았다.
“켈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까?”
“…….”
“아니면 진심으로, 서천을 지키고 싶은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일까요?”
삼승의 눈이 처음으로 서늘하게 빛났다. 낙조는 그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면서도 꿋꿋하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제가 알기론 서천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는데요.”
“……장승이 그렇게 말했나요.”
“여기서 남 탓하지 마시죠. 그만큼 추한 일이 없습니다, 삼승님.”
“……환인.”
“내가 환인이란 것도 이곳 사람들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함이란 걸 압니다. 그냥 제 이름 부르셔도 됩니다. 그게 뭐 어렵다고. 삼승님, 그래서 서천은 생명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항상 낯선 상황과 마주하면서도 비슷한 의견 대립을 내세워야 했다. 그곳에서 자신은 항상 나쁜 사람이었고, 우유부단하며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와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정의롭거나 사악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의견이 극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서 있다. 낙조는 삼승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앉아 있던 무흠이 삼승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무흠을 잠깐 응시했다가 고개를 돌려 삼승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장승은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삼승님의 의견이 필요하니까요.”
낙조의 말에 삼승의 한쪽 눈썹이 퍼뜩 움직였다. 낙조는 여전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삼승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낱낱이 까진 사람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다급하고 모든 게 거슬리는 듯했다. 낙조는 이미 예상한 것처럼 삼승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한 번 더 무흠을 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금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 침묵이 질기게 달라붙는다는 생각이 생길 즈음 낙조가 입을 뗐다.
“설마 삼승님 혼자서 결단을 내리시지 못할 정도로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겠죠.”
“말이 심하십니다.”
“그럼 지금 장승을 내보내세요. 저는 삼승님과 얘기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삼승이 무슨 말을 하든 그건 낙조가 예상하는 범위 안에 있었다. 세성이 말한 것과는 달리, 삼승의 말을 듣기만 해도 그녀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구별하기 쉬웠다. 하루가 지날수록 뒤바뀌어 가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이 짧은 시간에도 서천 바깥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작 해화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쓸 곳 없는 논란을 일으키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장승, 잠깐 나가세요.”
“예.”
삼승의 말에 무흠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방에서 나갔다. 낙조는 그제야 자세를 편히 고쳐 앉고서 삼승을 선명히 바라보았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삼승은 낙조를 응시하며 아랫입술을 바득 씹었다.
“숨지 말라고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요, 삼승님한텐?”
“애초에 숨살이풀, 피살이풀, 살살이풀이 왜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진 않았나요? 많이 사용되는 만큼 벌어질 수 있는 범죄와 악용하는 이들의 수를 줄이기 위함입니다. 쉽게 재배되고 치료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생명은 그렇게 귀중해지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걸 모른 채 한 식물에게 생을 모두 맡기는 삶이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봅니까? 그만큼 가볍고 의미 없는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니까 삼승님 말씀은 ‘희소성’에 따른 가치네요.”
무흠이 나가자마자 말을 쏟아내는 삼승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낙조가 오른손으로 턱을 쥔 채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지금도 쉽게 치료되어 구하는 목숨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가볍고 의미 없는 생이라고 믿으시냐구요.”
낙조는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왼쪽 손을 꽉 쥐었다. 발끝에서부터 뻗쳐 올라오는 분노가 당최 어디서 발산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낙조의 눈앞엔 이곳에 오기까지 볼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 죽음과 자신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장면만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낙조가 신경 쓰고 있는 과거의 시간도 개인적이고 굉장히 사적인 감정이자 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낙조에겐 여러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모두가 힘없이 죽어 가는 와중에 낙조가 가진 힘은 권력일 수도 있고 자신이 내세우고자 하는 표현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삼승님과 제 뜻이 맞지 않는다면, 저는 일행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갈 겁니다.”
“…….”
“이 뒤로 어떤 일이 있든 저는 이곳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개의치도 않을 거고요.”
삼승이 자신에게 내세울 패는 없다는 걸 확신한 후 낙조가 직격타를 날렸다. 서천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팔을 새로 돋게 해 주었으나 다시 얻은 삶을 한정된 사람들만 살리기 위해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떠들어 대도 좋았다. 자신의 힘을 다시 삼승이 빼앗아 갈 수도 없으니. 고집을 부리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제안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테다.
*
“어, 누나도 여기 있었네요.”
“홍지운 밥 안 먹을까 봐.”
식판을 정리하며 밤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운의 손목엔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낙조와 눈이 마주치자 지운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낙조는 천천히 밤이의 반대편으로 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괜히 말없이 이불만 꽉 쥐고 있는 지운의 손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피해.”
“…….”
“밥 맛있었냐? 뭐 먹었어.”
“아저씨.”
“왜.”
“누나 찾으러 갈 때 나도 가면 안 돼?”
지운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었다. 동시에 낙조와 밤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밤이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참은 듯 입을 다물었다. 식판을 마저 정리한 후 밤이가 방을 나가자, 낙조는 볼을 긁적거리다가 나지막하게 지운에게 물었다.
“호기롭던 홍지운의 모습이 보이면 좀 생각해 볼게.”
“나 진짜 민폐도 안 끼치고,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무슨 민폐. 그런 걸 왜 따지냐? 나간다고 해서 바로 찾을 수 있는 거 아니잖아. 못 찾아서 실망하면 어떡하려고.”
낙조는 짐짓 낮은 목소리로 지운을 가볍게 타박했다. 완전히 꺾인 자존감과 순간의 용기마저 바닥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저것뿐이란 걸 낙조도 알았다. 제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에게 매번 미안하여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다거나 영영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들. 그게 어떤 마음에서부터 올라오는지 알기에 낙조는 최대한 지운을 다독였다.
“누나 찾았을 때, 나만 없으면 좀 그렇잖아.”
“그런가 보다 하겠지. 홍해화가 혼낼 것 같아?”
애써 분위기를 풀기 위해 지운을 팔꿈치로 툭 치며 물었으나 지운은 몸을 흠칫 떨면서 고개를 젓기만 할 뿐이었다. 낙조는 자신의 두 손을 모아 손끝을 매만지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홍해화 그럴 사람 아닌 거 니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니었냐?”
“누나도 많이 변했어.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진짜 이상했어.”
“……너한테 정말로 홍해화가 아무 말도 안 했어?”
지운이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낙조는 지운의 말에 자신을 깨워 이름을 물었던 해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그 말을 붙잡고 늘어지자, 지운이 한참 생각하다가 살며시 운을 띄웠다.
“음……, 그…….”
“……괜찮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꽃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어. 씨앗이 잘 태어날 수 있는지 봐야 한다고…….”
“어디로 가겠다고는 말 한 적 없어?”
“그건……, 모르겠어. 미안.”
“뭘 미안해 아까부터.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
낙조는 일부러 지운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겨우 웃음이 트였다. 마침 다시 방으로 돌아온 밤이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둘을 번갈아보았다.
“홍지운 나랑 있을 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고낙조가 그렇게 좋냐? 아무래도 고낙조 수상해. 쟤 저번에도 여자 안 좋아한다고 그러더니, 홍지운 꼬신 거 아냐? 어떻게 어린 애한테 추근덕대냐 진짜…….”
“들어오자마자 나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드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누나도 마찬가지거든요. 트러블 메이커는 누나면서. 화 좀 참아요.”
“새끼가 뭐래.”
낙조의 반박에 밤이가 곁에 있던 곽티슈를 낙조에게 던졌다. 가볍게 그걸 손으로 잡은 낙조가 입꼬리만 올려 비웃자, 밤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밤이를 막은 건 지운이었다. 얼핏 피어난 미소는 잔잔하게 얼굴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
무흠이 내어 준 두터운 코트를 걸쳤다. 낙조는 밤색 목도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지운의 목에 손수 둘러 주었다. 눈만 깜박거리던 지운이 자신의 목에 감긴 목도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목도리 리본 진짜 못 묶는다.”
“출발하기도 전에 짜증나게 하네.”
말은 항상 버석거리게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지운은 알고 있었다.
낙조는 하루 중 가장 해가 오래 떠 있는 시간에 해화를 찾는 게 좋겠다고 했다. 변종의 움직임이 가장 느려질 때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면서. 그 시간 동안은 해화도 마찬가지로 모든 힘을 쓸 수는 없을 테니 기습하기에도 적당한 시간이었다.
무흠이 준비한 차는 조금 낡은 승합차였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오르는 무흠을 보다가 낙조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밤이와 지운이 마저 뒷좌석에 오르자 잠시 정적이 먹먹하게 감돌았다. 낙조는 백미러로 지운의 안색을 확인한 후 안전벨트를 맸다. 곧 무흠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 후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낙조는 웬만해선 담아 두려 했던 말을 내뱉었다.
“삼승님이 나한테 짜증이 좀 나긴 났나 봐요. 폐차되기 직전의 차를 주셨네.”
“이거라도 받은 거지.”
“삼승님 은근히 쪼잔한 구석이 있다니까.”
밤이와 낙조가 무흠이 거슬릴 만한 곳을 살짝씩 찔러 가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무흠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건지, 주변만 살피면서 천천히 악셀을 밟을 뿐이었다. 승합차는 털털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곧 좁은 도로에 들어서자 도로 근처에 지어진 낮은 상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 근처여서 그런 건진 몰라도 식당이나 잡화점이 꽤 많았다. 횟집 앞에 늘어진 업소용 수조엔 죽어서 배를 보인 채 둥둥 떠 있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배를 비집고 나온 것이 있나 확인하려 했으나, 순식간에 가게 앞을 지나쳐가는 바람에 자세히 살피진 못했다.
조금 더 도로를 타고 들어가니 갈래길이 나왔다. 무흠이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느껴지는 거 없나?”
“저요?”
“어.”
낙조는 전방을 주시한 채 묻는 무흠의 말에 잠시 창문을 내리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야 어디든 있었다. 방금 지나친 상가에 숨어 들어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변종이 가까이 있으면 꼭 반응하던 몸이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이 근처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낙조는 차에서 내려 낮은 빌라가 모여 있는 조금 먼 곳을 바라보았다.
“…….”
움찔. 오른쪽 검지가 툭, 튀어 올라왔다. 낙조는 손이 앞서 나가려는 대로 온몸의 힘을 빼냈다. 툭, 툭.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손이 허공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어깨와 수평을 이룰 정도로 손이 올라왔을 때 낙조는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삭막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회색의 빌라들이 줄지어 모여 있는 곳. 손은 계속해서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 발버둥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