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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49화 (149/202)

149화. 반격 (1)

삼승의 방으로 다시 돌아가진 않았다. 삼승과 귀도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단숨에 풀리진 않을 것 같았다. 낙조는 무흠에게 다음날 자신이 삼승을 찾아보겠다고 얘기한 후 밤이와 함께 방을 나섰다. 둘은 나란히 걸으면서 잠시 침묵에 잠겼다. 짧은 시간에 많은 말을 나눴지만 당장 그 모든 말을 감당할 수 있을지, 발을 뗄 때마다 책임감이 발끝부터 묵직하게 올라오는 듯했다.

“너 진짜 많이 변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말을 해요?”

“이 새끼는 내가 입만 열면 의심부터 하네.”

“누나는, 그……, 이력이 좀 있잖아요.”

“전과도 아니고 뭔 이력. 칭찬도 못하게 해 진짜.”

“낯간지러워요.”

“근데, 제주 전체를 안전지대로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뭐 생각이 있는 거야?”

방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 밤이가 자신의 방문 문고리를 쥔 채 낙조에게 물었다. 저 질문이 궁금해서 지금까지 말을 끊지 않았구나. 낙조는 밤이를 등진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그녀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걱정이 가득 묻은 밤이의 표정은 왠지 퍽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책임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계획이 있으면 말을 해줘야지. 너 혼자 휙 튀어나가서 무슨 짓 할지 누가 알아.”

“팔이 새로 자라나고 제가 한 번도 안 쓴 능력이 있는데, 뭔지 알아요?”

낙조는 일부러 부드럽게 질문을 되받아쳤다. 밤이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렸다가 입을 열었다.

“뭐……, 다친 적은 없으니까 회복력 같은 건 아닐 테고.”

“변종 유인하는 거요. 걔들이 옛날부터 나한테 나는 냄새에 환장을 하더라고.”

“말을 해도 너는 미친 드럽게 진짜……, 그럼 한꺼번에 모았다가 그때처럼 다 터뜨리겠다는 거지?”

“꼭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시간을 끄는 건 어디서 생각하든 손해예요.”

낙조는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다시 폈다. 밤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속에서 할 말이 가득 차오른 것 같았으나 굳이 내뱉진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방비한지 생각하고 있을 게 빤하다. 낙조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서 밤이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눈앞을 오른손으로 휘휘 저었다. 밤이의 시선이 다시 낙조에게로 돌아오자, 그는 손을 내리곤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리고 홍해화를 더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

“홍지운도 그렇고, 가족은 붙어 있어야죠.”

밤이는 낙조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리곤 ‘얼른 자’라며, 한 마디를 던지고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낙조는 닫힌 방문 앞에 서서 한참 고민하다가 걸음을 돌렸다.

삼승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 주고, 어떤 말에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낙조는 복도의 불빛이 문틈 아래로 스며드는 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삼승을 불러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귀도가 켈리까지 끌어온 마당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을 테니까. 무흠이 삼승의 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삼승이 처음 봤던 그 표정으로 낙조를 맞이했다. 낙조는 방이 아닌, 수풀 밖에서 보여 줄 게 있다며 밖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삼승은 조금 고민하다가 정확히 무엇이 궁금해서 찾아왔는지 물었다. 낙조는 별 얘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서천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제가 서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낙조가 서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삼승은 예상했던 대로 그 말에 반응했다. 웬만해선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라도 꼬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순순히 따라 나가겠다는 삼승의 말에 낙조와 무흠, 삼승 셋이서 문을 열고 위로 올라갔다. 수풀 밖은 잠잠했다.

“말린 대추……, 효능은 얼마나 가죠?”

“적어도 일주일까진 갑니다. 변종의 눈에는 이곳이 보이지 않는 거죠.”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낙조는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에 대해 질문했다. 적어도 일주일. 불을 피우고 겨우 이틀이 지났다. 그러나 해화가 서천을 빠져나간 시간은 나흘 정도였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곳만 막연히 지키고 있는 건 시간낭비였다.

마침내 대추를 태웠던 곳까지 내려오자, 낙조는 삼승을 향해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부터 주변에 있는 변종은 다 이곳으로 모을 거예요.”

“…….”

삼승의 표정이 천천히 구겨졌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낙조에게서 떠나지 않는 시선은 명백한 불쾌가 섞여 있었다. 낙조는 빙그레 웃으면서 한쪽 발을 산 바깥으로 뻗었다. 삼승이 무흠을 돌아보는 게 시야에 붙잡혔다. 무흠은 둘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반대쪽 발마저 완전히 밖으로 뻗어 경계선 바깥에 섰다. 낙조는 삼승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변종들을 이끄는 향을 뿜을 수 있거든요. 제 위치를 정확히 알고 모여들 거예요.”

“……나를 협박하려고 불렀군요. 장승도 이미―”

“―장승님을 뭐라고 하지 마세요. 삼승님의 잘못은 모두가 다 압니다.”

“내 잘못이요?”

삼승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낙조의 말 한 마디에 다정했던 표정을 단번에 사라졌다. 무흠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에겐 지금 이 순간도 아주 길게 느껴질 게 빤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겠지. 낙조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여유를 내보이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돋지 않은 맨손이지만, 향을 퍼뜨리는 동시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삼승이 곧장 입을 열었다.

“뭘 하려는 겁니까.”

“삼승님이 만든 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겁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세상에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방관하셨으니까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죠?”

“켈리가 서천에서 공부할 때도 삼승님이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켈리 그 여자가 서천에서 뭘 훔쳐 도망갔는지도 아셨겠죠. 그런데 지금까지 켈리를 방치했잖아요.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시라고 하는 겁니다.”

삼승이 낙조를 빤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쳤다.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실소에 낙조의 표정에서도 웃음이 점차 사라져 갔다. 삼승은 몇 번 더 실소를 터뜨리다가 흐트러진 머리를 넘기고서 대답했다.

“책임이요? 애초에 서천에서 키우는 꽃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초들입니다.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요.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독초는 서천에서 애초에 키우지도 않습니다.”

“독이 약이 되는 것도 한순간이듯 약도 마찬가지예요. 그걸 삼승이란 분이 모르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이 상황을 자초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무슨 책임을 지라고 말하고 싶은 건데요.”

“삼승님도 물론 모르셨겠죠. 그런데 켈리가 사람들을 죽이려고 그 풀을 들고 갔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니에요? ‘악어와 새’에서 정말 그 여자가 사람들을 멀쩡히 살려주고 아이들을 키워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더 듣고 있을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보고 싶으시잖아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서천을 위해서도 힘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삼승님의 결정도 필요해요.”

낙조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쥐듯 천천히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밑에서부터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것이 살갗을 뚫고 멀리 흩날리는 게 느껴졌다. 자신에게도 느껴지는 달콤한 냄새가 거미줄에 걸려 날아가듯 울렁거렸다.

“애초에 식물 변종이 나타났을 때부터 서천이 나섰어야 했습니다.”

무흠이 몸을 흠칫거렸다. 삼승 또한 낙조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맡았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낙조는 오히려 세 걸음 뒤로 물러난 채 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흐르는 향은 더욱 짙어졌다. 삼승의 떨리는 눈을 보면서, 낙조가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저는 제 힘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

“지키고 싶은 사람이 서천에 있으니 서천도 지키려고 하는 거고요.”

“…….”

“서천을 지키고 싶으시면 삼승님도 힘을 쓰세요. 더 이상 숨으려고 하지 마세요.”

먼 곳에서부터 변종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기어 오는 듯했다. 낙조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허와도 같은 길 위로 변종들이 기어 오고 있었다. 팔로 몸을 끌어오는 이들은 다리가 거의 뿌리에 잠식당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걷는 이들의 얼굴은 완전히 포자 덩어리와 다를 게 없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의 소리도 거세졌다. 오랫동안 굶주리고 있었는지 급하게 낙조를 향해 다가오다 넘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낙조는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정해둔 범위 안으로 발을 딛길 기다리며, 아주 느린 속도로 오른팔을 옆으로 쭉 펼쳤다.

“제가 들을 답은 정해져 있지만, 보면서 생각하세요.”

낙조가 삼승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곤 뒤를 돌았다. 등을 보인 채 낙조는 천천히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낙조의 향기를 맡고 몰려드는 변종들의 수는 쉽게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낙조는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힘을 오른팔로 모두 보내며 탐욕스럽게 턱을 딱딱대며 다가오는 변종을 가만히 응시했다.

변종을 불러들인 건 자신의 힘을 끝까지 폭발시키는 실험이기도 했고, 삼승에게 보이는 일종의 ‘쇼’와도 같았다. 낙조는 손끝에서부터 두툼하게 튀어나온 나뭇가지와 가시를 보고서 먼저 왼쪽을 휘저었다. 변종이 낙조의 위치를 향으로 알아채듯, 낙조의 오른손도 그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하나도 놓침 없이 붙잡았다. 가시 하나하나에 붙잡힌 변종의 물렁거리는 피부가 뜯겨나갔다. 진액이 솟구치는 이들을 피해 뒤로 빠지며, 낙조는 몸을 돌리기도 전에 먼저 오른손을 반 바퀴 돌려 뒤쪽을 찔렀다.

“키에에엑!”

“깍, 아악, 까아악…….”

마치 거미의 다리처럼 우후죽순으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수직을 이루며 변종들의 정수리를 꽂아 눌렀다. 가장 취약한 부분이 뚫린 이들이 먼저 힘없이 쓰러졌다. 낙조의 몸에선 여전히 달콤한 향이 진하게 풍겼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변종들은 처참하게 갈려 나갔다. 너덜너덜해진 피부 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낙조는 가끔 얼굴로 튀는 포자 가루나 진액을 왼손으로 막으며 계속해서 변종들을 베었다.

몸을 벨 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면 포자변종이고, 물컹거리는 느낌이 난다면 진액변종이다. 이젠 셀 수 없는 전투를 하면서 알게 된 부분이었다. 포자변종을 터뜨릴 땐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습관이 밴 듯했다. 빈공간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그쪽으로 움직이는 몸도 전보다 더욱 재빨라졌다.

정수리를 뚫으며 앞에 있는 이들을 몇 줄씩 쓰러뜨릴 때였다. 낙조는 이전에 했던 것처럼 오른손을 바닥에 꾹 누른 채 힘을 주었다. 줄기가 길게 뻗어 나가는 느낌을 받으며,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위로 뛰었다. 자신의 힘을 지지대로 삼아 공중에 잠시 떠오른 낙조는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든 변종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번에 몰린 떼보다 몇 배는 많았다.

자신의 향 하나로 이만큼이나 끌어모았다면, 적어도 이 근처에 있던 변종은 다 긁어모은 셈이다. 대부분 인간 형태의 변종은 겨울잠에 들 때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흙을 파고드니, 주변을 정리할 때 산이나 오름 근처를 수색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허공에 떠 있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 때였다. 그동안 아무 반응도 없던 왼팔이 살짝 뻐근해지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잠시 주춤거렸다가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다시 오른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가 주변에 있는 이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아무리 뽑아낸다 해도 나뭇가지와 가시에 걸려 덜렁거리는 변종의 살가죽과 반 토막 난 머리통이 흔들거렸다.

‘좀 아픈데.’

처음엔 욱신거리던 왼팔이 서서히 굳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오른손에 모든 힘을 집중하느라 무리가 간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해 놓고 반도 처리하지 못한 채 도망간다면 안 되는데. 낙조는 헛웃음이 터질 것 같은 상황에 이를 악물고서 왼손을 흘낏 바라보았다.

‘……뭔데 이거.’

잠깐 왼손을 바라보느라 시선을 떼고 있던 사이, 낙조의 향에 미쳐 달려드는 변종들을 다시 오른손으로 가볍게 치워 버리곤 낙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왼팔 손목 아래로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불거진 게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손끝이 간지러워지는 것까지, 그리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뻣뻣하게 굳은 줄 알았던 근육이 순식간에 완화되면서, 피가 왼손에 빠르게 쏠리는 기분이 낙조의 머릿속을 경쾌하게 울렸다. 누군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종소리가 들린다고 했는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기분이 무엇인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숨이 조금 가빠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잠시 뿌옇게 물들다가 다시 환하게 주변이 트였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자, 낙조는 설핏 웃으면서 왼손을 허공으로 힘차게 치켜올렸다.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손끝에서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변종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몸을 떨었다. 오른손과 조금 다른 것은, 물갈퀴처럼 손가락 사이에 녹색 이파리가 엮여 있다는 점이었다. 낙조는 오른손으로 주변에 몰려드는 것들을 일단 치워내면서 허공에 올렸던 손을 변종을 향해 휘둘렀다.

순간 나뭇가지가 더욱 길게 늘어나더니, 갈퀴 이파리가 부풀며 한꺼번에 변종들에게 달라붙었다. 접착제처럼 끈끈하게 달라붙었던 이파리는 다시 금세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뭇가지에 박힌 이들은 속절없이 쓰러졌고, 이파리에 먹혔던 이들은 자리에 멈춰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용암을 뒤집어쓰고 난 후 굳은 화강암처럼 겉으로 보기만 해도 딱딱해 보였다.

“오…….”

낙조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 모습도 무흠과 삼승이 보고 있을까. 괜히 자랑하고 싶어진 아이처럼 낙조는 그들이 있는 산 쪽을 한 번 바라봤다가 몸을 다시 한번 공중으로 띄웠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높이 뛰어오른 낙조는 동시에 왼손으로 무리를 한 움큼 집어삼켰다. 이전에 주머니 같은 것으로 변종의 머리를 녹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체력과 힘을 모두 갈아서 썼던 터라 아무리 회복력이 좋아도 이 정도의 힘을 사용하면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자신에게 새로운 힘이 주어진 것처럼 아무리 힘을 휘둘러도 힘들지 않았다. 정말 머릿속에 큰 종이 청량하게 올리는 듯했다.

“가아아악.”

“카아아……, 캬아아악!”

오른손의 나뭇가지와 가시에 긁히거나 꿰뚫려 쓰러지는 변종들 사이로 딱딱하게 굳은 변종이 그림자처럼 남았다. 도미노가 줄을 지어 넘어가듯 낙조가 한 번 공중에 뜰 때마다 수많은 변종이 으스러지고 깨졌다. 낙조는 숨을 힘껏 들이마시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변종 무리에게 왼손을 뻗었다. 야구공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간 왼손이 그물망을 펼치듯 넓게 퍼져 변종을 덥석 물었다. 변종의 비명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손을 다시 뒤쪽으로 거두자, 변종들은 그대로 굳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낙조는 주먹을 쥐어 힘을 안쪽으로 다시 불러일으켰다. 나뭇가지와 가시, 그리고 이파리들이 순식간에 접혀 들어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낙조는 기지개를 쭉 피면서 무흠과 삼승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의 도박이긴 했는데, 참 운도 좋다.’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윽고 낙조가 다시 경계선 안으로 멀쩡하게 발을 들이자, 삼승이 낙조의 시선을 피했다. 모두 지켜보긴 했는지 무흠이 낙조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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