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환생 (2)
이런 식의 재회는 상상하지 않았다. 상상조차 꺼림칙했으니까.
선잠에 파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먼 곳에서부터 쿵쿵거리는 소리에 낙조는 금세 눈을 떴다. 몸을 뒤척이기도 전에 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얼마 되지 않아 문지기가 비명을 질렀다. 곧장 방에서 나가니 밤이도 자다 깬 얼굴로 복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고서 둘은 문 쪽으로 함께 뛰었다. 문지기의 비명은 처음 한 번이 끝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끊긴 소음에 좋지 못한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도 기억할 수 있는 얼굴이 있다. 지난 시간을 즈려밟고 간 자의 얼굴은 잊을 수 없다. 낙조가 주춤거리자 밤이 또한 복도 끝에서도 보이는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계단과 이어진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쓰러진 여자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낙조와 밤이가 본 이의 얼굴은 둘을 향해 꺾여 있어 눈을 마주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선명히 보였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녀는 분명히.
켈리였다.
켈리를 데리고 온 여자는 누구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낙조와 밤이를 쳐다봤을 때도, 삼승과 세성이 부리나케 달려왔을 때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이었기에 쉽사리 다가가지도 못했다.
뒤늦게 나타난 무흠도 켈리의 얼굴을 보고서 몸을 굳혔다. 그러나 삼승의 지시에 따라 켈리를 어깨에 얹었다. 낙조와 밤이는 세성의 뒤를 따랐다. 긴 머리카락의 여자는 삼승과 나란히, 맨 앞에 서서 꽤 큰 방으로 들어갔다. 삼승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여자에게 물과 약 같은 것을 건넸다. 서천 사람이구나. 삼승이 경계하지 않고 대하는 모습을 본 낙조는 조용히 무흠의 어깨에 실려 온 켈리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켈리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아주 천천히 심호흡만 할 뿐 신체의 그 어느 곳도 움직이지 못했다.
켈리의 새파란 두 눈동자를 다시 마주했을 때, 속에서 천둥이 내리꽂히는 것처럼 큰 진동이 낙조의 손끝을 감쌌다.
*
켈리는 넓은 방에 정렬하게 놓인 침대 중 하나 위에 묶였다. 무흠이 켈리의 손발을 단단히 고정시킨 후 호흡을 확인했다.
“이상 없습니다. 마비 현상은 꽤 심해서……, 이틀 정도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수고했네, 장승.”
“아닙니다.”
“……귀도. 네게 이렇게 만들어서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를 물어야겠다.”
삼승의 말은 긴 머리카락의 여자에게로 돌아갔다. ‘귀도’라는 이름의 여자는 삼승이 준 물을 한 번에 말끔히 비워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켈리를 내려다보던 삼승이 귀도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귀도!”
“…….”
“데려와서 뭘 할 생각이었어.”
“제가 이렇게까지 안 하면 삼승님께선 절대로, 절대 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죽이지도 못하고요.”
“뭐?”
“저희 할아버지한테 진 죄책감 때문에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삼승님은 왜 그런 미련 하나 버리지를 못하십니까? 이해가 안 돼요. 켈리를 저렇게 만든 건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세요. 도대체 왜 저 여자가 이 짓을 꾸몄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십니까. 그냥 받아들이세요. 서천꽃밭에서 같은 인간을 도륙하는, 인간도 아닌 걸 키웠다고. 사실이니까요. 저 여자는 서천의 오점입니다. 그러니까 삼승님이 직접 거두세요.”
한참 말이 없던 귀도가 고개를 번쩍 들고 삼승에게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낙조가 이해하기엔 조금 복잡한 사연들이 많았다. 당장 대화를 끊고 물을 수 없었기에 침묵할 뿐이었다. 삼승은 귀도의 대답에 잠시 고개를 돌려 낙조와 밤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곧장 이해한 무흠이 잠시 둘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왔다.
문을 다시 완전히 닫자, 안쪽의 이야기는 웅웅거리기만 할 뿐 잘 들리지 않았다. 밤이도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챘는지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고서 무흠에게 물었다.
“뭔데. 저 여자 딸이야?”
“당신은 말 좀 가려서 해.”
“아 뭔데. 할아버지 얘기는 또 뭐고.”
“하……, 일단 다른 방에 가서 좀 얘기하지.”
무흠은 밤이를 골치 아프다는 듯 바라보면서 자리를 이끌었다. 낙조는 그를 뒤따라 가면서도 뒤를 한 번씩 힐끔거리게 됐다. 서천에서 모든 걸 들고 도망갔다는 그녀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뜻일지, 모르는 게 더 좋을 수 있는 위험한 호기심이 몸을 간질였다.
무흠, 밤이와 따로 들어온 방은 조금 작긴 했으나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당했다. 무흠도 켈리를 보고서 적잖이 놀랐는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쏟아 내며 의자 하나를 꺼내 앉았다. 밤이는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한 후 무흠의 맞은편에 앉았다. 낙조도 뒤늦게 무흠의 곁에 앉아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켈리 저 여자가 서천에 머무를 당시에, 이곳에 있던 큰심방이라는 분이 귀도의 친조부였다고 들었다. 켈리를 아주 예뻐했다고도 했어. 그러다 켈리가 서천에서 나가기 직전 갑자기 직위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셨지. 우연처럼 시간이 딱딱 맞아 떨어지니까 서천 안에선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켈리의 범행과 귀도의 친조부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나도 서천에 들어온 이후 들은 소문이었지만, 조금은 의아했지. 그런 나를 따로 불러 삼승님께서 얘기하셨다.”
“뭐라고?”
“……나까지 그걸 믿게 놓아 두면 정말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부탁한다고 하셨지. 믿지 말라고.”
“뭐야. 그래서 그게 진짜라는 거야? 뭔데. 아니 결과를 얘기해 줘야지.”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까 귀도가 얘기한 말은 적어도 진짜라는 거지.”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 저 여자를 못 죽이는 거라고? 뭐, 아님, 진짜 자기 명예 때문에 그래? 미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삼승이란 사람, 그래도 여기를 이끄는 사람이잖아. 하나하나 개인적인 사유 따져가면서 세상을 이렇게까지 박살 낼 수가 있겠어?”
밤이는 코웃음을 치면서 무흠의 말에 반박했다. 무흠은 다른 때와는 달리 묵묵히 밤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깍지를 낀 채 고개를 약간 떨어뜨렸다.
“삼승님이 서천에서 자리를 잡을 때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 귀도의 친조부라고 했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이것 먼저 알아 두는 게 좋겠군. 앞으로 겪을 일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니, 특히 당신, 의심하지 말고 일단 들어.”
무흠이 짐짓 으름장을 놓듯 밤이를 가리키며 선포했다. 밤이는 팔짱을 끼고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흠의 시선이 낙조에게로 옮겨 왔다. 낙조는 밤이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따라서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무흠은 낙조에게서 조금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다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곤 입을 떼어 냈다.
“고낙조. 이전에 나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지. 변종이 죽기 직전까지 사람들 의식이 살아 있던 거면 어떻게 봐야 하냐고.”
“아……, 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간다. 구천이라고도 하는 그곳에서 지옥에 떨어질지 아닌지 선택을 받지. 지옥에 보내 달라고 한 건 구천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게 되니 그런 말을 한 게 태반일 거다. 의식이 살아 있다기보다 갇혀 있던 거야. 고낙조 네가 들었던 사람들 목소리가 진짜 사람들이 말한 게 아니라, 구천에서 떠도는 말을 들은 거라는 거지.”
낙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광 변종에게서 뿌리를 뽑은 다음 날 무흠에게 자포자기한 상태로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때 무흠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방에 가두었다. 자신은 방에 갇힌 채 나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세상의 속도를 원망하고 있었다. 낙조가 묵묵히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밤이가 아랫입술을 뜯고만 있다가 책상을 두드려 무흠의 시선을 가져왔다.
“그래, 일단 당신 말 믿어. 사람들 몸에서 식물이 자라고, 나무한테 사람이 잡혀가는 마당에 못 믿을 게 뭐가 있겠어. 믿으니까 그 기분 나쁜 눈깔 좀 치워. 물어볼 거 있으니까.”
“용건만 말하지?”
“그럼 서천 꽃……, 꽃밭. 상황이 이렇게 된 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서천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야? 켈리 혼자서 계획한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년 혼자서 한 거라고 확신해. 서천에서 훔쳐온 것 같은 풀로 이 짓을 시작했거든. 내가 ‘악어와 새’에서 봤으니까. 그 여자가 거기서 무슨 짓까지 했는지.”
밤이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뱉은 말은 낙조의 시선도 완전히 이끌어 올 만큼 중요했다. 무흠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는 잠시 주저하다가 책상에 작은 원을 그리며 말했다.
“물론 처음부터 혼자서 하진 않았겠지. 전 세계가 뒤집어졌다는 건 그만큼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도왔다는 사실이고. 근데 그 여자가……, ‘도대체 뭘 얻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데?’라는 질문을 내가 해봤거든. 근데 서천에 어느 정도 답이 있는 것 같아. 그 여자가 서천에서 도망친 이유는, 확실하게 알아?”
밤이가 무흠에게 강한 어조를 갖고 물었다. 뒤로 물러날 곳은 없었다. 무흠은 턱을 매만지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서천에 들어온 이들에게 서천에 대해 숨긴다면, 이들과 앞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을 모두 놓칠 수도 있다. 낙조와 밤이를 이해시키는 게 무흠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확실히는 몰라.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켈리가 서천에서 도망간 이후 처음 살아 있는 흔적을 남긴 게 어느 묘지 앞이었다. 돌보는 사람이 없는 묘를 파서 시체를 꺼내고, 서천에서 가져온 풀을 시체 몸에 사용해 본 거지. 거기서 꽃이 핀 걸 우리가 뒤늦게 찾았고.”
“……‘악어와 새’에서 봤던 켈리 모습으로만 설명하자면, 그냥 앞뒤 없이 미친 년인 건 맞는데, 이유가 확실해야 해. 가능성 없는 일에 도박하는 짓은 안 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서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해. 당신이 삼승이든 세성이든 털어서 알아봐.”
“……정말 서천이 잘못한 게 있다고 보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리고 서천에서 훔친 풀로 저런 짓을 했으면, 서천이 직접 나서서 뭐, 그렇게 꼭꼭 숨겨둔 꽃이든 풀이든 다 풀어서 사람들 안전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뭔 죄를 지어서 그런 식으로 죽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어, 상황이. 이거 내부분열 되기 직전이라고. 내가 볼 땐 여기 안에도 배신자 몇 명 있어.”
“세성님이 딴 맘을 품은 자는 확실히 구별하신다.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
“그 애기? 하 존나 답답하다. 이봐요, 그렇게 용하다는 무당도 못 맞추는 게 있어. 인간이니까. 진짜 ‘신’ 같은 게 아니니까! 똑같은 인간인데 그렇게 눈먼 사람처럼 굴 거야? 그리고 내 말 초점 똑바로 잡아. 지금이라도 서천이 나서서, 세계는 못 구해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보니까 서천엔 멀쩡한 사람들 많드만. 산 사람들은 살아야지. 산 사람들도 그냥 싹 다 지옥 가라고 할까? 어?”
가만히 앉아 있던 밤이는 점점 엉덩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낙조가 손을 뻗어 밤이를 진정시켰다. 성격은 물론이고 서로가 믿는 것 자체가 상극인 둘에게서 평화로운 대화가 흘러가길 바라는 건 욕심일 수도 있었다. 낙조는 무흠도 입을 열지 못하게 한 후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켈리가 왜 그랬느냐, 에 대한 대답은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요. 귀도란 사람이 여기까지 죽이지 않고 온 이유를 스스로 말했잖아요. 삼승님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예요. 켈리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라고 데려온 거니까, 누나 질문도 그때 물어보는 게 좋겠어요. 저 여자는 약 없으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니까.”
낙조의 말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꽤 오랫동안 생각했는지 말에도 막힘이 없었다. 밤이는 낙조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책상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밤이가 그런 무흠의 표정에 책상 아래로 무흠의 다리를 툭 쳤다. 곧장 무흠이 눈을 부릅뜨자, 밤이는 고갯짓으로 낙조를 가리켰다. 좀 들으라는 듯이.
“그리고 밤이 누나 말대로, 서천이 나서야 해요. 다 죽게 생겼는데 끝까지 이곳을 숨길 생각은 아니잖아요. 사람을 살리는 곳이라면서요. 그럼 당연히 이곳이 직접 나서야죠. 뜯긴 제 팔도 새로 나게 해 주셨어요. 정말 필요한 사람만 살리는 거라고 해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 모두 살려야 해요. 한 명이라도 더 잃으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예요.”
낙조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무흠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켈리가 만든 이 세계는 끝장을 내야죠. 아마 삼승님이 저를 부른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으니 새 팔을 준 거겠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세계를 책임지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제가 예전부터 다짐했던 거예요. 이 세계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새 세계를 만들 수 있겠죠.”
세상을 죽여야겠다는 다짐은 아무것도 맘대로 되지 않는 세계에 앙심을 품고 한 생각이었다. 무지와 앎의 경계에 서서 농락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점차 쥐고 있던 의문이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깜깜하기만 했던 세상의 끝을 기어코 자신이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멋대로 죽이기만 해서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는 낙조의 생각처럼, 이 세계도 똑같다고. 분풀이로 모든 걸 죽이면, 그동안의 내 고통은 누가 알아줄까. 모두 죽어 버릴 테니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함께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아서 지금 이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고 기억해야 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장승님이 나설 필요 없어요. 제가 삼승님을 뵐 겁니다. 아예 서천과 관련이 없던 사람이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선뜻 무흠이 대답하지 못하자 낙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굳은 의지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낙조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무흠에게 물었다.
“……금수호 씨도, 장승님이 청주에서 차마 죽으라고 놔둘 수 없었으니까 데려온 거죠?”
“…….”
“……아니에요?”
“맞아.”
“그런 마음인 거예요 저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낙조가 잠깐 불안해하다가 무흠의 수긍에 다행이라는 듯 살짝 웃었다. 밤이는 순간 바뀌는 무흠의 표정을 보고서 속으로 욕을 뇌까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낙조는 눈동자를 굴리며 밤이와 무흠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박수를 치면서 다시 둘의 집중을 자신에게로 모았다.
“그리고 켈리가 깨어나기 전까지 할 일이 있어요.”
“나 뭔지 알 것 같아.”
낙조의 말을 밤이가 덥석 물었다.
“홍해화.”
“네. 홍해화를 찾아야 해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낙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곤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곳, 제주도를 안전지대로 만듭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안전할 수 있도록.”
무흠은 조용히 그 말을 생각하며 낙조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낙조는 이전에 봤던 모습처럼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무흠의 시야에 들어오는 낙조의 얼굴에선 깨끗하고 강한 힘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지난밤, 지운을 끌어안고 황망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무흠은 묵묵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흠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밤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는 누가 필요해서 살리진 않을 거예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리고 싶어요.”
“…….”
“하지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남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살리지 않을 겁니다.”
낙조가 웃음을 모두 거두고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하면서 누구를 떠올리는지, 둘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저만큼 치를 떨 사람은, 세상에서 한 명뿐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