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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45화 (145/202)

145화. 향 (2)

낙조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생각했다. 평온하다. 조금 전 엄청난 힘을 썼음에도 전처럼 기가 빨리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억누르고 있었던 힘을 풀고 나니 긴장감도 사그라들었다.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했다. 낙조는 수건을 내려 두고 두 팔을 침대에 짚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홍지운은 아무래도 수호 씨랑 같이 있는 게 낫겠지. 혼자 놔둬선 안 될 것 같고…….’

무흠이 수호와 대화를 하루에 두세 번이라도 나눈다면 수호의 방에 있는 지운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더불어 수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겉으로 훑어만 봐도 알 수 있으니 자신의 뜻도 이해할 것이다. 낙조는 희망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지운의 얼굴을 생각하다가 이불을 꽉 쥐었다.

항상 최악의 상황만 상상하다 보니 종종 맞닥뜨리게 되는 이런 평화가 더욱 간지러웠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 느슨하고 고요한 평화를 놓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자신이 제주까지 온 이유엔 앞으로 자신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 남았기 때문일 테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최악에서도 이렇게 잠깐이나마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행복하진 않더라도 긴장을 풀 수 있는 조금의 틈이 영영 사라질까 싶어 한숨이 절로 샜다.

똑똑.

“야 아직도 씻어?”

밤이의 목소리였다. 낙조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털면서 문을 열었다. 밤이의 뒤엔 무흠이 서 있었다.

“빨리 준비하셨네요.”

“너 또 안에서 멍 때렸냐?”

“생각이란 걸 저도 하고 살아요.”

“빨리 나와. 윗대가리 기다리신단다.”

밤이의 퍽 거친 말에 무흠이 곧장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밤이는 이제 무흠의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챙겨갈 게 있냐는 낙조의 질문에 무흠은 고개를 저었다. 곧장 들어올 테니 몸만 가면 된다고 했다. 낙조는 둘의 뒤를 따라서 방을 나갔다. 위로 올라가는 문 앞엔 세성과 병사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깨끗했던 세성의 흰 도포 밑자락이 뭔가에 그을린 것처럼 까맣게 물든 게 보였다. 낙조는 말없이 그 부분을 응시하다가 세성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대추를 태울 거야. 열다섯 되 정도. 전부 태우려면 시간이 그래도 꽤 걸릴 테니 다시 몰려오기 전에 준비하자고.”

세성의 얼굴에선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삼승과 둘이서 처리한 일이 고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항상 미소라도 띠고 있었던 그가 막상 무표정을 지으니 상황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낙조. 유독 이상한 냄새가 나는 길이 느껴지면 나한테 얘기해. 아마 그쪽으로 도망간 것일 테니까.”

“……이상한 냄새요?”

“그래. 맡아 보면 무슨 냄새인지 감이 올 거야.”

“홍해화가 도망간 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이에요?”

“눈치챘으면 더 물어보지 마. 자, 각자 나눠 들어라.”

세성은 답지 않게 호통 비슷한 말까지 내뱉고서 병사들과 무흠에게 지시했다. 셋이 각자 대추가 담긴 작은 상자를 품에 안아 들자 세성이 문을 열었다. 낙조는 무리의 가장 끝에 서서 계단을 올랐다. 수풀 밖으로 발을 디뎠을 때, 세성은 상자 몇 개를 밤이에게 넘겨주곤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 테니, 장승은 반대쪽으로 돌아. 해가 지기 전에 보자고.”

무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성과 병사 두 명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걸음을 옮겼다. 무흠은 물끄러미 그들이 사라지는 걸 보고 있다가 반대쪽으로 먼저 몸을 움직였다. 낙조는 밤이의 품에서 상자 한 개만 빼고 나머지를 가져가며 속삭였다.

“뭔진 몰라도 분위기는 완전 별로네요.”

“그러게.”

밤이도 찝찝한 기색을 버리지 못하고 수긍했다. 무흠은 그나마 걸어 내려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선두로 나아갔다. 낙조는 상자를 안자마자 훅 끼쳐오는 대추 향에 상자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댔다. 어릴 때 따서 먹었던 녹색 대추 냄새와는 조금 다른, 한약재 같은 향이 콧속을 깊이 찔렀다.

“대추 냄새가 변종한테는 무슨 뜻이에요?”

막연한 궁금증이었다. 산을 거의 내려갈 때쯤 낙조가 물었다. 무흠은 잠시 고개를 돌려 낙조를 바라보더니 다시 걸음을 떼면서 간결하게 대답했다.

“오면 죽여 버린다는 거다.”

정말 조금 전 몰려들었던 변종과 뿌리가, 해화가 보낸 것들이 맞나. 식물과 대화할 순 있다고 해도 그들의 수장처럼 행동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낙조는 괜히 상자를 꽉 껴안고서 곰곰이 생각했다.

무흠이 말한 대로 해화의 최종 목표물이 자신이라면 목적은 무엇에 있는 것인가. 결국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것인지……, 조금 답답해졌다. 식물과 대화할 수 있다는 능력을 더욱 포괄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변종을 설득시켰다거나 세뇌하여 자신들을 공격하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 보였다. 아직 해화의 본체를 삼킨 채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추측조차 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해화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덜 질 수 있었다.

마침내 산 아래로 완전히 내려왔을 때 숨이 트였다. 각자 들고 있던 상자를 아래에 내려 두고 주위를 먼저 둘러보았다.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낙조는 조용한 걸 확인한 후 곧장 상자 뚜껑을 열고 바닥에 대추를 와르르 쏟는 무흠을 바라보았다. 그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서 선을 그리듯 대추를 옆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불이 옮겨 붙을 가능성은 없어요?”

“서천꽃밭에서 기른 약초들은 서천 바깥으로 불씨를 옮기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2미터씩 나눠서 뿌린 다음에 불을 지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낙조는 무흠을 도와 대추로 경계선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밤이도 조용히 둘을 거들었다. 두 되를 쏟아부은 후 맨 처음에 놓인 대추에 무흠이 불을 붙였다. 타는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알싸하거나 매캐한, 코를 들쑤시는 냄새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소한 냄새가 먼저 퍼졌다. 타닥, 타닥, 불씨가 터졌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낙조가 입을 열었다.

“좋은 냄새네요. 이걸 맡고 오지 못한다니까 뭔가……, 기분 이상해요.”

“왜?”

밤이가 대추를 옆에서 길게 쏟으며 물었다. 그저 순진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낙조는 대열을 이탈하고 밖으로 삐져나간 대추를 다시 제자리로 옮기면서 대답했다.

“아까 장승님이 그랬잖아요. 이 냄새가 ‘오면 죽여 버린다’라는 뜻이라고. 근데 뭔가 나는 이 냄새에 홀려서 올 것 같아서요.”

“뭐……, 열매 굽는 냄새긴 하니까.”

“그리고 이건 이상한 점. 내가 떼어 낸 오른팔을 갖고 있었을 땐 단내가 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요. 그럼 이 냄새도 변종을 이끌리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생각 같은 거?”

“일리 있네. 어떻게 생각하쇼, 장승 양반?”

밤이는 무심하게 무흠에게 낙조의 대답을 던졌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무흠은 밤이를 이제 포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대신 입을 열었다.

“변종을 자극하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사람의 말 또한 ‘아’와 ‘어’가 다르듯 냄새도 마찬가지다. 비슷하게는 느껴져도 의미 자체는 완전히 다른 거지.”

“오……, 이번 건 좀 좋았다.”

“당신은 그만 떠들고 돕지 그래?”

“나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쉬었는데? 애처럼 투정을 부려. 나이는 엄청 먹어 놓고서.”

낙조는 무흠과 밤이가 은근히 둘의 사이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한쪽이 아무리 물고 뜯어도 다른 한쪽은 점점 세월아 네월아 하며 포기하는 게 점점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타는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연기도 꽤 자욱하게 주위를 감쌌을 때였다. 신기하게도 잔기침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낙조는 꼭 고소한 냄새에 취하기라도 한 듯 아무 말도 없이 대추를 쏟다가 문득 먼 곳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낯선 향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산 근처엔 멀쑥한 건물 한 채도 없었다. 사람은커녕 변종도 모두 흙 속에 파묻혀 있을 계절. 막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소한 냄새도 짓이기고 온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게 되는 냄새는 거의 악취에 가까웠다.

“저 잠깐만요. 뒤에 얼마나 남았나 좀 볼게요.”

낙조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냄새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악취는 그만큼 심해졌다. 비유할 수 있는 냄새가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냄새가 지독해진다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낙조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 너머로 아주 작은 길이 보였다. 아스팔트로 덮인 도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낙조는 무심코 그곳을 향해 걷다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치밀어오르는 역함에 결국 허리를 숙이고 침을 뱉었다.

“웩, 콜록, 콜록…….”

몇 번이고 더 몸을 들썩이며 헛구역질을 하던 낙조는 입가의 침을 닦아 내고서 천천히 호흡했다. 조금이라도 익숙해질까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가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상태가 됐을 때, 낙조의 머릿속에 순간 ‘도망쳐야 한다’라는 생각이 급하게 떠올랐다.

“헉, 헉, 허억.”

코앞엔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 있었다. 그 너머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서, 낙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얼마나 걸었던 건지 무흠, 밤이와 있었던 산은 저 멀리 놓여 있었다. 낙조는 황급히 달음박질쳤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번 발을 헛디디면서도 용케 넘어지진 않았다. 겨우 무흠과 밤이를 찾아내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쓰러져 앉아 숨을 힘겹게 몰아쉬니, 밤이가 낙조의 어깨를 붙잡고 이름을 불렀다.

“야, 고낙조. 뭐야. 변종 봤어?”

“헉, 허억, 하, 아니요.”

“그럼 뭔데. 왜 이렇게 떨어.”

“하, 헉, 콜록, 허억…….”

「유독 이상한 냄새가 나는 길이 느껴지면 나한테 얘기해. 아마 그쪽으로 도망간 것일 테니까.」

다시 세성의 목소리가 눈앞에 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낙조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무흠도 낙조의 상태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대추에서 손을 떼고 다가왔다.

“세성, 세성님한테 좀 다녀오겠습니다.”

“고낙조.”

“급한 일이에요.”

무흠이 낙조를 불렀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낙조는 여전히 느껴지는 고약한 냄새의 방향을 기억하면서 아마 반대쪽에서 오고 있을 세성에게로 달려갔다. 쾨쾨한 냄새에서 멀어지면서, 다시 비슷한 연기가 피어나는 걸 확인한 후 전력을 다해 더욱 힘차게 달렸다. 곧 익숙한 세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부채로 불을 살살 올리면서 대추를 바싹 태우고 있었다.

“세성님.”

낙조가 세성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여 무릎을 쥐고 헉헉거리며 말했다. 병사 두 명도 낙조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게 이상한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지 않은 건 세성뿐이었다. 세성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낙조의 소매를 잡아끌고서 병사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찾았구나.”

“……하, 네. 맞는 것 같아요.”

“어느 쪽으로 가 있든?”

“도로……, 도로로 향해 있었는데, 냄새가 너무 심해서 더 가지는 못했습니다.”

딱!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세성이 쥐고 있던 부채로 낙조의 머리를 콩 찧었다.

“아!”

“혼자서 거길 기어 들어가려고 했단 말이야? 정말 멍청한 놈이다, 너.”

“갈 수밖에 없었어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하지 않습니까.”

“이놈아! 어디서 잡것들을 몸에 붙여 오려고 그랬어! 멀쩡히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너도 그 신소미를 따라 눈이 훼까닥 돌았을 게 빤하다. 아예 변종이랑 친구를 먹지 그래?”

세성은 답답하다는 듯 낙조의 등을 부채로 퍽퍽 내려치며 말했다. 작은 손이었으나 손맛은 꽤 매웠다. 낙조는 따끔거리는 등을 움츠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아픈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세성은 몇 번이고 낙조의 등을 치다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세성의 손이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낙조는 꾹 참고 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홍해화가 신소미라고 하셨던 적 있죠. 배에서 내린 후에.”

“응.”

세성은 곧장 대답했다. 딱히 숨기려고 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신소미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이런 건 장승에게 물어봐. 나 좀 그만 귀찮게 하구.”

부채를 소리 나게 쫙 펴면서 세성이 맥 빠지게 대답했다. 그는 진심으로 낙조를 귀찮아하고 있었다.

‘언제는 내가 궁금하다고 따로 면접 같은 걸 봤을 땐 언제고.’

“다 들린다니까~ 장승이 네 쪽에 가 있잖아. 가서 물어봐.”

“어쨌든 서천에 관련된 일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그냥 식물 관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장승님도 홍해화와 관련해서 자세히는 모르는 것 같고.”

“하암.”

“세성님, 홍해화가 도망친 길까지 찾았잖아요. 정보를 주셔야 찾죠!”

결국 참지 못하고 낙조가 벌컥 소리를 높였다. 세성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하품만 내지르다가 살짝 눈만 보이게 부채를 내렸다. 웃음기 하나 없는 눈가가 조금 살벌하게 빛났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낙조에게 다가와 속살거렸다.

“변이 식물의 숙주가 된 인간의 혼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 제 육체에서 쫓겨나니 이름까지 빼앗겨 저승에 갈 수 없게 되고. 그들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는 게 신소미야. 혼에게 말을 걸어 잠시나마 자신의 육체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리고…….”

세성은 병사들이 있는 곳을 향해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한숨을 내지르곤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들이 변종이 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저승으로 보내는 게 네 역할이다. 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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