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향 (1)
“뭐 먹긴 먹었어요?”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수호가 지운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지운은 낙조가 데려왔을 때부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아예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수호는 다시 가만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여자 분은요? 홍해화 씨.”
“……우리 누나요.”
해화의 이름을 부르자 지운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 처참히 가라앉은 눈동자는 어두운 곳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수호는 께름칙함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은 말없이 수호 쪽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사라졌어요. 그때처럼.”
“에?”
“없어졌다니까요.”
지운은 그리고서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수호는 턱을 괸 상태로 지운을 빤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갔나?’
그래도 거제도에 있을 땐 대화라도 된 것 같았는데. 아예 연결고리가 끊긴 것처럼 구는 지운의 모습에 수호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무흠과 낙조마저 밖에 나가고 없으니 그들이 돌아올 동안은 꼼짝없이 이곳에 있어야 했다. 삼승과 세성이라는 자들이 이곳은 무조건 지켜 낼 테니 나오지 말라던 무흠의 당부도 생각났다.
‘괜히 무섭네, 저러고 있으니까.’
수호는 지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렇게 고요한 곳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는 지운은 귀신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면 곧장 자신에게 시커먼 눈을 치켜뜨고서 달려들 것만 같았다. 수호는 지운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뿌리가 많이 자라난 염색모를 관찰하기도 하고, 그가 숨은 쉬고 있는지 등이 오르내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무흠이 말한 쥐구멍은 언제 찾냐…….’
지운에게서 관심이 떨어지니 무흠이 일러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새 쌀 한 톨 만큼의 믿음이라도 생겼는지 이곳에서 나가지만 않으면 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무흠과 멀리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삼승과 세성이란 사람에 대해선 특별하게 궁금하지 않았다. 하루만이라도 평화로우면 안 되나. 겨우 하루를 넘기나 싶었더니 결국 자정을 지나지 못했다. 조금 잠잠해졌다 생각했는데, 무흠에게 이곳에 대해 질문할 틈도 주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씻을 곳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곳이었으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쥐구멍은커녕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거제에 있을걸 그랬나. 부모님 상황도 살필 겸…….’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큰 고민 없이 지나왔던 시간조차 아까워지는 법이다. 거기에 함께 있는 지운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자신도 덩달아 부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청주에서는 그나마 간간이라도 연락할 수 있었으나 무흠과 함께하면서는 살아 있는지도 얘기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
너무 얼떨결에 휩쓸려 제주까지 왔다는 생각을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살아남아서, 부모님께 돌아가는 게 가장 최선이지 않을까. 적어도 아직까진 청주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일은 듣지 못했으나 근처 대피소까지 살필 여력은 없을 테다. 수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냥 돌아가고 싶다.’
부모님의 곁으로. 어떻게 살아남든 그들의 곁에 있는 게 지금까지 지닌 죄책감을 털어 낼 수 있는 최선의 일 같았다.
*
“이거면 됐다.”
삼승은 징그럽게 녹고서 남은 진액을 내려다보며 세성에게 말했다. 계속 안으로 들어오려 하던 뿌리는 어느 순간부터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도망가려 했다. 그것을 붙잡고 아예 녹여 버렸다. 불태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세성은 뿌리를 붙잡느라 이곳저곳에 상처가 남은 삼승의 손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삼승님, 상처가 많습니다. 돌아가서 치료하시지요.”
“……얘들아, 잠깐 나가 있거라. 세성과 할 말이 있다.”
삼승은 세성에게 먼저 답하지 않고 뒤에 서 있던 병사들에게 얘기했다. 병사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삼승이 한 번 더 말하자 그제야 방을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후, 삼승은 뿌리의 습격에 무너진 벽과 엉망이 된 방안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예상가는 게 있니.”
“……환인과 같이 온 신소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여자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언제.”
“하루 전 새벽입니다.”
“왜 바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니.”
“……조금 있으면 귀도가 도착할 것입니다. 많은 짐을 얹어 드리기 싫었을 뿐입니다.”
“신소미가 지금 네 눈에 보이느냐.”
“흐릿합니다. 하지만 어제처럼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마 간헐적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듯합니다. 장승, 환인과 함께 귀도가 도착하기 전 찾을 테니 걱정 마세요.”
세성의 눈에선 삼승조차 피해 갈 수 없었다. 삼승 또한 세성의 움직임과 그 그림자를 볼 수 있었으나 세성은 순간마다 발휘하는 판단력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아주 일부분만 보고서도 5수 앞까지 내다보는 게 대다수라 함부로 그의 의견을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고삐를 놓아줄 수도 없는, 위험하며 꼭 곁에 두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말린 대추가 얼마나 남았지.”
“태울까요.”
“산 밑에 태워라. 귀도가 올 때까진 얼씬도 못하게.”
“예.”
세성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삼승은 자리를 떴다. 세성은 혼자 방에 남겨져 바닥을 뒹굴고 있는 온갖 흙더미와 다 자라지 못한 약초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곳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가장 힘이 좋은 나무를 이끌어 약초를 훔치려 한 게 틀림없었다.
‘분명 이곳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을 텐데.’
세성은 흰 소매를 걷어 고약한 냄새를 퍼뜨리는 진액을 가만히 살폈다. 웅덩이처럼 고인 진액은 두꺼운 굵기의 뿌리만큼 그 색이 무척이나 진했다.
무흠에게서 해화가 ‘무언가에 씐 것처럼’ 변하여 그녀가 아닌 다른 이의 힘으로 하늘마루를 탈출했다고 들었다.
‘배에 탈 때부터 뭔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여자가 억지로 붙잡고 있던 거였어. 그러다 이곳에 와서 힘이 다 빠진 모양이고.’
낙조의 잘린 오른팔의 말을 해석할 때에도 해화는 누군가에게 붙들린 것처럼 잔뜩 겁을 먹은 채 벌벌 떨었다. 보는 눈이 여러 개라 굳이 언질을 주진 않았으나 잠깐 눈 돌린 틈을 타서 이곳을 나갔다는 사실이 세성에겐 참으로 괘씸했다. 적어도 이틀에서 사흘까지는 버티리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도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하려고 그렇게 고약한 게 붙었나…….”
세성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방을 나오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 몇 명이 세성에게 말을 걸었다.
“삼승님께선―”
“―저온 창고에서 대추 중 별초로 열다섯 되를 준비해 오거라. 산 밑까지 내려가서 태워야 하니 얼른.”
“……아, 예, 세성님.”
세성의 단호한 말에 병사들은 허리를 숙이고서 다급히 저온 창고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성은 느린 걸음으로 그들을 뒤따라가면서 끊임없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 아주 가깝다, 가까워. 살아 있는 이에게 함부로 들러붙으면 잘 되려고 했던 일도 전부 막는 게 내 일이다. 멍청하다, 멍청해.”
*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씻을 생각이었다. 낙조는 찝찝한 몸을 억지로 끌고 계단을 밟았다. 밖에서 시간을 꽤 끌기도 했으니 안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으리라 생각했다. 어쩐지 피부 위에 맺힌 진액이 점점 굳어 가는 느낌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고낙조.”
먼저 밑으로 내려가 있던 무흠이 낙조의 이름을 불렀다. 씻을 생각만 가득했던 낙조는 처음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무흠이 두 번 더 부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네.”
“5분 안에 씻을 수 있지.”
“갑자기 왜요.”
“산 밑에 경계선을 세워 두려 하는데…….”
무흠은 말하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곁에 남은 병사들의 이목이 모두 자신 쪽으로 쏠린 게 조금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모두 쉬러 가도 좋다. 세성님과는 나와 고낙조가 붙을 테니.”
“나는 왜 빼?”
“당신이 가서 뭐하게.”
“뭐하다니,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판단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이곳에 들어왔다고 해서 개인행동까지 허락한다는 건 아니다.”
“이게 무슨 개인행동이야? 같이 가는 건데?”
“……자, 너희들은 어서 들어가라.”
무흠은 골치가 아픈 표정으로 병사들을 완전히 돌려보내고 나서 천장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번도 지려고 하지 않는 밤이를 왜 설득시켜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빠져 더욱 피곤해졌다.
“띠꺼우면 말을 해. 내가 왜 빠져야 하는지.”
“가서 뭘 판단할 수 있다고 같이 가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한 건 잡을 수도 있지. 홍해화랑 내가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고 해도 걔 성격은 내가 더 잘 알거든.”
“홍해화가 당신 싫어한 이유가 어쩐지 나랑 같을 것만 같은데 그래.”
“싫어하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또 고낙조 부려먹으려고 데리고 갈까 봐 그것도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빠질 거면 당신이 빠져. 어린 남자애 앞에서 아무 말도 못 씹는 주제에.”
밤이는 완강했다. 속에서부터 천불이 끓는 분노가 무흠의 얼굴 위로 스쳤다. 밤이는 낙조를 끌고서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빨리 씻어. 머리 완전 떡졌어 너.”
“누나 근데 무슨 일인데요? 나 늦게 들어와서 세성님 얼굴도 못 봐갖고.”
“아까 들었잖아. 산 밑에 경계선 친다고. 병사들 안 데려가는 거 보니 이상한 제사라도 지내려는 건지 뭔지……, 아무튼 나는 여기 사람들 못 믿겠어. 너 사냥개처럼 쓰는 것도 맘에 안 들고. 백무흠 저 새끼는 여기 와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깡 좋은 새끼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야. 사이비에 휘말리면 다 저러냐?”
“다 들리니까 조용히 가!”
뒤쪽에서 무흠이 바짝 약이 오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밤이는 오른손을 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엿을 날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둘이 상극이지. 낙조는 자신을 보며 씩 웃는 밤이를 보면서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나는 집에 안 가. 네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믿어 줄 때까지 안 갈 거야. 나는 너한테 빚진 것들 다 갚기 위해서라도 못 가.」
문득 이틀 동안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밤이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믿어 줄 때까지 가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때의 목소리를 생각하니, 거짓이 조금도 묻지 않은 밤이만의 단단하고 깨끗한 마음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듯했다.
“누나.”
“엉.”
밤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기 전, 낙조가 밤이를 불렀다. 그녀는 조금 피곤한 눈을 하고서 낙조를 돌아보았다. 낙조는 그 눈을 마주하고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굳이 거짓말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사람은 아니구나.’
세성이 말했던 것처럼, 말로 형용하기 힘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소리로 사람의 진심을 파악하고 눈빛으로 그 속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깨끗한지 어느 정도 느껴졌다.
낙조는 설핏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 빡치게 너까지 나 놀릴래.”
“누나가 장승님 놀린 거잖아요. 방금은 누나가 이긴 것 같은데.”
“어, 쌍욕 뒤지게 하고 싶었는데 좀 참은 거야.”
“그런 것 같았어요.”
“뭘 그런 것 같아, 새끼가, 말대답하지 마.”
“아 이게 무슨 말대답이야. 완전 진짜 꼰― 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밤이가 낙조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꿀밤이라는 단어가 귀엽게 읽히는 것뿐이지, 한 손가락으로 호두쯤은 가볍게 부술 수 있을 만큼의 강한 힘이었다. 낙조는 잠깐 시야가 180도 뒤집히는 걸 느꼈다가 가까스로 벽을 붙잡아 버텨냈다.
“시간 없다. 빨리 씻고 나와. 너 지금 냄새나.”
밤이는 낙조가 무어라 말을 쏟을 새도 주지 않고 방으로 홀랑 들어갔다. 낙조는 빨갛게 손가락 자국이 남은 이마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것 하나가 줄어든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