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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43화 (143/202)

143화. 기습

천장이 울렸다. 앉아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진동이었다. 처음엔 미미하게 흔들리던 것이 점차 더욱 크게 방안을 휘저어 놨다. 밤이와 오랜 얘기를 마치고 돌아온 낙조는 서둘러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방에서 나온 밤이와 눈이 마주쳤다.

“방금…….”

“지진 난 거 아니야?”

밤이가 걱정 반, 짜증 반 섞인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지운이 있는 방은 조용했다. 낙조는 우선 지운이 있는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지운은 바닥에 앉아 침대 매트리스에 엎드려 있었다.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지 않는 지운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쥐고 흔드니, 지운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홍지운, 자?”

“……아니.”

“방금 너도 느꼈어? 방 흔들리는 거.”

“응.”

“…….”

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지운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떻게든 방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전보다 큰 진동이 찾아왔다. 낙조는 지운을 잽싸게 감싸고서 문밖을 확인했다. 벽을 짚고 서 있던 밤이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는 게 보였다.

“백무흠!”

밤이가 세게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흠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시선은 복도 끝쪽에 있었는데, 부르기 무섭게 무흠이 중심을 간신히 잡으면서 밤이 앞에 서는 게 보였다. 그는 방문 너머로 지운과 낙조도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밤이를 일으키며 말했다.

“변종들이 왔어. 이쪽 복도는 뿌리에게 뚫렸다! 삼승님과 세성님이 뿌리를 맡으실 테니 우리는 땅 위에 있는 놈들 먼저 상대해야 해!”

‘뿌리까지 움직여?’

낙조는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지운이 움직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지운은 공허한 눈으로 무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낙조는 지운의 어깨를 다시 쥐고 흔들면서 말했다.

“홍지운, 너 금수호 씨 옆에 붙어 있어.”

수호의 방은 낙조 일행과는 조금 멀었다. 반대쪽 복도에 있던 것 같았는데. 낙조의 말에 지운이 말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낙조는 이를 악물고 지운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뿌리가 이미 안쪽까지 침투했다면 이곳에 가만히 있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금수호 씨는요?”

“방에.”

“홍지운 좀 맡길게요.”

앞뒤 설명 없는 말이었으나 무흠은 지운의 안색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무흠이 길을 알려 준 대로 지운을 질질 끌고 반대쪽 복도로 넘어갔다. 수호도 불안했는지 덜덜 떨면서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었다. 낙조는 지운을 수호 침대에 앉히고서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호에게 황급히 말했다.

“수호 씨가 옆에서 좀 있어 줘요.”

“예?”

“장승, 아니, 백무흠 씨한테 상황 대충 들었으니까 알죠? 그래도 여기가 안전한 것 같으니까 부탁 좀 할게요.”

“아니……!”

수호가 무어라 붙잡을 새도 없이 낙조는 다시 벽을 짚으며 무흠과 밤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둘을 만나 출구 쪽으로 향하며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들과 마주쳤다. 이틀 전 있었던 사건에서 보았던 얼굴들도 있었다. 낙조와 무흠, 밤이까지 합한다 해도 수는 20명을 넘지 못했다. 무흠의 말로는 안쪽에 남아 삼승과 세성을 지키는 이들이 갈려 모든 인원을 모을 순 없다고 했다.

“밖에 얼마나 있는데요?!”

“자세히는 모른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거라…….”

무흠 또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삼승이든 세성이든 외부에서 공격하는 낌새가 느껴졌다면 지시가 미리 떨어졌을 텐데. 내부가 뚫릴 때까지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낙조는 병사들에게서 총과 칼, 팔다리에 걸쳐 변종의 공격을 일차적으로 막을 수 있는 보호복을 입는 무흠과 밤이를 바라보다가 오른팔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고낙조. 너는?”

방탄모까지 쓴 밤이가 총을 장전하며 급히 물었다. 낙조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몸 무거워지면 우리만 손해예요.”

“그래, 좋겠다.”

밤이는 옅게 코웃음을 치면서 중얼거렸다. 계단을 조금씩 오르면서, 낙조의 손끝도 점차 날카로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틀 전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전 팔과는 달리 어느 상황에서든 같은 형태로 변하는 걸로 보아 골치 아픈 일은 없을 듯했다. 낙조는 길게 뻗은 손가락과 그 끝에 달린 뾰족한 가시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가장 최악의 수를 생각하자. 어떤 상황이든 곧장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풀까진 넘어오지 못했나 봐.”

무흠이 선두로 문을 열자, 밤이가 소곤거렸다. 낙조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무흠의 뒤에 붙었다. 곧 수풀 너머로 눈을 돌렸다. 병사들 중 누군가가 ‘흡’하고 입을 막는 소리를 냈다. 무흠과 밤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시야에 들어차는 변종의 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굴에서 모두 기어 나온 개미 떼와도 비슷했다. 쉽사리 몸을 밖으로 빼지 못하고 있을 때, 무흠이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왼쪽이 숫자가 더 적어 보이니 너희 셋이 왼쪽을 맡는다. 당신이랑 내가 전방을 맡고, 너희 다섯은 오른쪽을 맡아. 나머지는 고낙조를 호위한다.”

“……나랑 당신 둘이서 전방을 맡자고? 둘이서만? 장난해?”

“어쨌든 고낙조가 길을 트면 쉽게 끝낼 수 있어.”

“겨우 열 마리 때려잡은 게 엊그제야. 저 많은 수를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밤이가 기가 차다는 듯 무흠에게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으나 항상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낙조를 사지로 내모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낙조는 밤이의 앞을 살짝 막아서며 속삭였다.

“제가 해야죠. 할 만 해 보여요.”

“야.”

“그리고 얘네……, 그렇게 빠르지 않아 보여요. 아직 잠에서 덜 깬 느낌이랄까. 누가 억지로 깨워서 그런가.”

낙조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낙조의 말에 밤이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변해 갔다. 누구인지 특별하게 짚지 않아도 낙조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밤이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총구를 앞쪽에 겨누었다.

“무모하게 나대지만 마.”

그리고 떨어진 그녀의 말에 낙조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흠이 숫자를 천천히 카운트했다. 낙조는 그의 입에서 ‘다섯’이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먼저 수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주변을 서성이며 비척거리던 변종들의 이목이 낙조에게로 한 번에 쏠렸다.

모두 인간 형태의 변종이었다. 모두 흙 속에 처박혀 있다가 나온 건지, 대부분 과각화 된 피부에 흙모래가 잔뜩 끼어 있었다. 잠깐이었으나 수풀 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움직임 또한 굉장히 느렸다. 이전 오른팔이 불러냈던 변종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낙조는 변종들의 ‘머리’를 주시하면서 길게 뻗은 오른손을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휘둘렀다.

오른쪽 아래부터 왼쪽 위까지, 대각선을 그리며 변종 셋의 머리 위쪽이 날아갔다. 까맣고 단단하게 여문 뇌의 조각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안구가 반으로 잘려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라곤 없었지만. 낙조는 자신을 따라 뒤이어 나오는 병사들이 위치를 각자 잡은 것을 확인하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변종들의 눈이 뒤쪽으로 돌아가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뒤통수나 목 뒤를 깊게 베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틀 전보다 날카로워진 것 같은 가시는 변종의 물렁물렁한 피부를 뚫기에 최적화돼 있었다.

피 대신 진액이 튀는 게 변종과의 전투에서 가장 곤란한 부분이다. 아무리 면역체계가 잘 잡혀 있는 몸이라고 해도 부작용처럼 어느 순간 돌변할지 몰랐다. 의아한 점이 짚일 수 있는 상황은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한 번 벨 때 여러 마리를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목을 베는 것을 선택했던 낙조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다수를 찌르는 것으로 방식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최악은 아니야.’

손끝에 자라난 가시 덕분에 손가락 세 개만 길게 뻗어도 네다섯 마리가 얻어걸렸다. 물론 완벽한 뒤처리를 위해 한 번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게 문제긴 했으나 조금이라도 머리나 심장에 무리가 간 변종은 다시 달려들지 못하니 그나마 최선의 방법이었다.

팔을 오래 휘두르니 그만큼 힘이 많이 든다는 게 문제긴 했으나, 새로 난 팔에 익숙해질수록 변종과 대치하는 것도 그리 겁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굵은 땀이 흐르고 숨은 차올랐다. 잔기침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들긴 했다. 아무리 쓰러뜨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흠과 밤이를 비롯한 병사들이 다치진 않았나 확인하려 뒤를 돌아도 보이는 건 변종뿐이었다. 소리를 질러 대화를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대뜸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낙조는 지치지 않고 자신 쪽으로 몰려드는 변종을 사방으로 물러 세우다가 순간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김도연이랑 홍해화……, 뿌리였는지 나뭇가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도연이 허공에 떠 있을 땐 나뭇가지에 매달린 상태였지.’

‘나도 변종인데, 못할 거 없잖아.’

생각이 끝나자마자 낙조는 오른손을 흙에 깊숙하게 꽂아 넣었다. 손끝마다 힘을 주며 손목까지 흙이 차오름과 동시에 끝에서부터 힘이 더욱 길게 뻗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변종 하나가 낙조의 턱을 쥐고 입을 천천히 벌리고 있었다. 녀석을 왼손으로 밀쳐 내면서 그 힘이 땅속을 몇 바퀴 휘젓는 걸 느꼈다.

‘그래도 직감이란 건 남아 있어.’

퍼억!

퍽!

파파파팍.

“하아아악!”

“끼아아아악.”

“캬아아악…….”

흙을 파헤친 후 뚫고 나온 굵직한 나뭇가지들이 이곳저곳에 있는 변종들을 무참히 꿰뚫었다. 낙조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이제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전 팔로 변종을 처리할 땐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촉감이었다.

나뭇가지는 계속해서 자라났고 그 끝마다 달린 가시는 변종의 속살과 기생초를 끝까지 파헤쳤다. 밟고 있던 산의 한 부분을 위로 들춰낸 것처럼 흙더미가 위에서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귀를 빽빽하게 메우는 총소리도 멎었다. 낙조는 숨을 고르면서 흙에 파묻힌 손을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었다. 동시에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산에 울리면서 남은 변종들마저 잔가지에 붙잡혀 몸이 터졌다. 진액이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생각 못했다.’

낙조는 아차,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무흠과 밤이,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수풀 근처에 있던 일행들은 낙조의 눈짓에 서둘러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툭, 투두둑.

이리저리 몸이 꿰뚫린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변종들을 바라보며 낙조는 쫙 피고 있던 손을 오므렸다. 천천히 오그라드는 주먹의 모양새를 따라 변종들도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마침내 하나의 공처럼 똘똘 뭉친 변종 덩어리를 눈앞에 두고서, 낙조는 그대로 주먹에 힘을 잔뜩 주었다.

으그그그극…….

펑!

뭉친 덩어리가 폭탄처럼 터짐과 동시에 낙조는 발 근처에 죽어 있는 변종의 몸을 왼손으로 들어 앞을 가렸다. 그럼에도 온몸을 막진 못해 정수리와 등 뒤로 진액이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고낙조!”

나뭇가지와 가시 끝엔 터지다 만 변종의 살가죽이 걸려 있었다. 낙조는 그걸 보고 난 후 손에서 서서히 힘을 빼냈다. 허공에 가만히 떠 있던 나뭇가지들이 다시 뚫고 나온 구멍을 찾아 빨려 들어갔다. 길게 뻗은 것들이 점차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는 목소리는 보지 않아도 밤이의 것이 분명했다. 낙조는 흙 속에 박힌 손을 완전히 빼고 흙까지 털어 내고서 뒤를 돌았다.

“야!”

“아씨 깜짝이야!”

어느새 코앞까지 뛰어온 밤이가 낙조에게 윽박질렀다. 다행히 공격은 당하지 않았는지 밤이의 외관은 깔끔했다. 낙조는 눈을 두세 번 깜박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왜요.”

“왜요? 왜요? 왜요?”

“무섭게 그렇게 따라하지 마요.”

“따라하지 마요?”

“아 누나 진짜 잔소리 쫌!”

“잔소리?!”

“들어가서 얘기해요! 들어가서 다 얘기해 줄게!”

분명 ‘무모하게 나대지 말라’고 했지. 낙조는 밤이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액을 사방에 흩뿌리면서까지 한 방에 변종들을 옭아매려 한 자신의 계획에 대고 잔소리를 할 게 빤했다. 낙조는 혹여 자신의 몸에 묻은 진액이 옮겨 묻을까 싶어 밤이의 몸엔 손대지 않고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먼저 말했다.

“진액이나 닦고 얘기해!”

“내가 알아서 한다고!”

“이 새끼가.”

질렸다는 듯 겁도 없이 외치자 밤이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낙조는 금세 입을 다물고 밤이가 건넨 얇은 수건으로 목부터 닦기 시작했다.

‘누나가 변종보다 더 무서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흠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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