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삼자대면 (4)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잠깐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저 멀리 앞서가는 게 세월이었다. 무흠과 안으로 다시 들어온 낙조는 쓰러져 있던 문지기부터 챙겼다. 그는 기절만 잠깐 했을 뿐 작은 외상도 입지 않았다. 무흠은 그를 회복실로 옮기겠다고 했다. 낙조를 다시 방으로 데려다준 후 무흠은 사라졌다. 적막한 방 안에서, 낙조는 침대에 앉아 머리를 감쌌다.
자신 맘대로 돌아가는 게 단 한 가지도 없다.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번번이 누군가에게 짓밟히거나 막히는 게 대다수였다.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안다고 평가하며 미래를 점치고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낙조의 역할에 맹신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변화지만 계절 두 개가 넘어가도록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은 하늘도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낙조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매달렸다. 그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속에 꿍쳐두고 있던 알량함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쉰 적 없는 삶이었다. 편하게 살고자 주변을 버린 것도 아니었는데, 꼭 자신이 속한 곳과 사건마다 속속들이 헤쳐서 숨도 쉬지 못하게 옥죄는 환경이 곤혹스러웠다.
거제도에서 방에 하루 내내 틀어박혀 세상을 죽여야겠다는 다짐을 한 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사람도 아닌, 이 세상 자체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마저 아무도 이루어 주지 않을까. 상대의 포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목을 내놓을 게 어디 있다고. 이제는 어머니가 이름의 뜻을 읊어 주며 다독이는 추억마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어떤 자극도 낙조에겐 선량하게 다가올 수 없었다.
서천은 지하에 있었고, 자연스럽게 창문도 달리지 않았기에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낙조는 하염없이 침대에 앉아 있다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급한 표정의 지운이 문턱을 밟고 서 있는 것을 본 낙조는 다시 참담해졌다. 지운에게 당장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해화가 산에 끌려갔을 때보다 더욱, 마음과 입 모두 무거워졌다.
“아저씨, 혹시 누나 봤어?”
“홍지운.”
“……아아, 나 데자뷰 온다. 또 이상한 말 하지 마.”
“홍해화가 혼잣말했다거나 뜬금없는 말 한 거 있으면 말해 줘.”
“여기까지 와서 이럴 거야? 나 진짜 싸울 힘도 없어, 아저씨. 우리 누나 잃어버렸다고 하지 마. 어?”
낙조는 대답 없이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운 또한 묵묵히 그 침묵을 이어 가다가 어설프게 헛웃음을 쳤다. 낙조도 더 이상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에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없었고 자칫했다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세상을 마지못해 떠받드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낙조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지운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곳에서 지운이 문에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내가 협조하면, 일이 잘 풀려?”
힘없는 지운의 목소리는 이제 낯설지 않았다. 주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팽개칠 수 있을 것처럼 낮은 목소리에 낙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힘도, 제 3자의 힘도 어느 순간을 마주치면 부스러지는 이 세상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알지 못했다. 승자라는 것은 사실 애초부터 없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없고 그 누구도 미련 없이 죽지 못할 세상의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자신 같은 이들을 괴물이라 통칭한다 해도 그들 밑바닥까지 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저씨, 솔직히 나는 이제 모르겠다.”
“……뭘.”
“굳이 살아야 할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와 목울대를 강하게 찍는 말이었다. 목이 격하게 메이지도, 그렇다고 마른 침조차 넘어가지 않는 순간. 기울어진 삶이 얼마나 자주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지 낙조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재앙은 천재지변보다, 사실 가장 가까운 것을 빼앗아 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 사라지면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음이 약해진 사람의 주위에서 맴도는 게 개인의 재앙이다.
지운은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빼앗겼을까. 남의 불행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는 건 쓸모없는 짓이었으나 낙조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지운의 눈동자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다 긁어 먹혔다고 생각할까? 뼈까지 닳고 닳아서 내어줄 것이 없다고 생각할까. 지운이 조금 더 말을 해준다면 그 무게를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겠지만 해화가 사라진 곳도 모르는 마당에 말을 함부로 얹을 순 없었다. 적어도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가 전생에 잘못한 게 있나?”
“…….”
“나라를 팔아먹었어? 지금까지 우리가 한 짓이 다 벌 받을 일이야?”
지운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걸 이미 낙조는 알고 있다. 낙조는 손을 뻗어 스탠드 불을 켰다. 곧 은은하게 퍼지는 빛에 따라 지운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운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가득 젖어 있었다. 빨간 눈에선 쉬지도 않고 눈물이 흘렀고, 지운은 그것을 소리도 없이 참아 내며 내보내는 중이었다. 지운이 우는 것을 보게 된 건 처음이 아니었으나 그때와는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다. 낙조는 침대에서 내려와 지운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지운은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숨을 애처롭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냥, 우리 누나도, 아저씨도……, 이상한 사람들한테 걸려서 개고생하는 거 아니냐고.”
“넌 그렇게 생각해?”
“아니면 뭔데? 우리를 딱하게 여겨줄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아? 꼭 대피소가 아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 우리끼리 다니면 안 됐던 거야?”
“그게 나았을 것 같아?”
적어도 혼자 집에 남아서 벽에 대고 얘기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낙조는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지운과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시선이 지겹게 따라붙은 걸 알았는지, 엉망으로 떠돌던 지운의 시선이 이윽고 낙조와 마주했다. 짧은 시간 동안 겹겹이 쌓인 불신과 의심의 벽이 너무나도 높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선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와 비슷한 희망 고문 같은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아무런 대책 없는 이야기를 믿게 하는 것부터 지운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과 같았다. 낙조는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지운의 팔꿈치를 쥐었다. 처음 만났을 땐 그래도 꽤 다부졌던 몸이, 뼈만 남을 정도로 완전히 말라 있었다.
“너는 날 구해 준 거 아직도 후회 안 하냐?”
낙조가 불빛 아래서 물었다. 청명하게 웃으며 자신의 곁에 꼭 붙어 있겠다고 말했던 지운의 웃음이 하필 지금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서 웃어 보기라도 할 텐데.
“그건 후회 안 하지. 아저씨 좋은 사람인 거 아니까.”
“내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어떻게 되긴……, 나는 개차반이었을 거고, 서연우는 미리 죽이지 않았을까? 켈리라는 여자도 그렇고……, 아마 국제기구 곳곳에서 아저씨 잡으려고 수배령 떨어졌을 수도 있지.”
“너는 왜 개차반인데?”
“나는 쓸모가 없잖아, 쓸모가…….”
지운은 그렇게 말하고 버석거리는 웃음을 내뱉었다. 낙조는 쥐고 있던 지운의 팔을 놓고서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너 없었으면, 평택 대피소 그냥 함몰됐을지도 몰라.”
“그것도 아저씨가 다 한 거잖아.”
“홍지운 니가 가장 중요한 일 했지.”
지운이 음료수 자판대 옆에 쪼그려 앉아 훌쩍거리는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는 어쩌다가 이 남쪽까지 떠밀려 내려왔을까. 낙조는 여전히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지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를 품에 안았다. 너무나도 마른 몸이 낙조의 품에 들어찼다. 그제야 지운은 낙조의 어깨에 눈가를 묻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꾹 눌러 담아 내뱉었다. 먹먹하게 가슴을 조이는 그 울음소리는, 꼭 부모님의 장례식장 근처에서 울려 퍼졌던 곡소리와 비슷했다.
*
웬일인지 무흠은 해가 다시 질 때까지 낙조를 찾지 않았다. 지운을 달래고 방에 데려다준 후 낙조는 맞은편 방에서 나오던 밤이와 마주쳤다. 그녀는 대충 지운의 상태를 알고 있었는지 목소리를 잔뜩 줄인 채 낙조에게 말했다.
“홍지운 상태 안 좋지.”
“……쭉 저랬어요?”
“눈치도 드럽게 없다. 너랑 홍해화 산불에서 겨우 건져낸 후부터 저 상태였어.”
“홍해화가 이상한 말 중얼거렸다고 해도 제대로 못 짚었겠네요.”
“말이라고 하냐. 지금 세상 이 꼴 난 것도 다 지 탓인 줄 알고 있는데.”
밤이는 조용히 말하면서 낙조를 슬쩍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문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닌 듯했다. 낙조는 밤이를 따라 복도를 빠져나가면서 한숨을 툭 떨어뜨렸다.
“너까지 한숨 쉬지 마라. 안 그래도 존나 심란하니까.”
“누나.”
“왜.”
“홍해화……, 새벽에 여기 나갔어요.”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밤이가 일순간 목소리를 크게 키웠다. 낙조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대고 제발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아직 지운의 방에서 그렇게 멀리 오지 못했다. 밤이는 당황한 눈으로 낙조를 응시하다가 빠른 걸음으로 먼저 길을 앞서 나갔다. 도착한 곳은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밤이가 가지런히 정리된 컵 하나를 꺼내 물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조용히 나간 거야? 제 발로?”
“아뇨. 일단 홍해화가 아니었어요. 완전 다른 사람처럼 얘기하고 말하고 그랬는데, 하, 아무튼 길어요.”
“야 얘기를 자세히 해 줘야 알지.”
“근데 누나는 길을 벌써 외웠어요? 여기 이런 곳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여기……,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 그때 같이 싸운 사람들은 이쪽에 얼씬도 안 하는 것 같고. 심심해서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는데 마실 거랑 먹을 거 다 있길래. 그래서 홍해화는 어떻게 나간 건데.”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변종처럼요.”
밤이는 낙조에게 물이 든 컵 하나를 내밀고서 골똘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문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밤이는 자신이 먼저 거제도로 온 후부터 남매를 곁에서 직접 지켜 낸 장본인이었으니까, 지운이 어떤 식으로 저런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졌는지도 이해하고 있었을 테다.
“너랑은 다른 거지?”
“네. 홍해화는 완전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종이었어요.”
괴물이라고 하기보다 변종이라고 하는 게 더 마음에 편했다. 낙조는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넘기고서 무언가 생각난 듯 밤이에게 물었다.
“그때, 산에 잡혀갔을 때요, 홍해화.”
“어.”
“그 하루 동안 잡혀 있었을 때 뭔가 당하지 않았을까요.”
“……가능성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니야.”
“유일하게 잠들지 않았던 게 하나 있었잖아요. 홍해화 힘으로 못 재웠던. 아마 그게……, 홍해화를 노린 걸 수도 있어요.”
낙조는 해화가 끌려갔던 날을 떠올리면서 말을 오목조목 내뱉었다. 3인용 소파에 조금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은 밤이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함께 그 모습을 목격한 이로서 낙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겨우 잠들게 했다는 해화의 말만 놓고 보자면, 산 전체를 ‘완벽하게’ 재우진 못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할 수 있는 만큼 했으나 결국 해화가 사용할 수 있는 힘보다 더 독한 변종이 해화의 능력을 미리 알아채고 채간 것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우리랑 대화하려고 홍해화를 데리고 간 게 아니라는 거지.”
“네. 죽일 생각도 없었고……, 이용하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정리가 되네. 어쨌든 그 변종도 산에 속해 있었을 테고, 뭔가 지 딴엔 계획도 있고 홍해화를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고 마음을 먹은 게 있었네.”
“홍해화가……, 오늘 새벽에 내 방에 들어와서 깨우더니 갑자기 악몽을 꿨대요. 꿈에 내가 나왔는데 내 얼굴이 아니라면서, 내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게 뭐야? 무슨 엑소시즘 하려고 악마 이름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자꾸 이름 물어보는 게 진짜 이상했어요. 누가 봐도 홍해화가 아니었는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니까.”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낙조는 고개를 저으면서 밤이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토로했다. 입을 열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 해화가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를 들은 무흠이 찾아와 세성에게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것까지. 옮기는 와중 해화가 탈출했으며 무흠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자고 말했다는 것도. 밤이는 잠자코 얘기를 듣다가 컵을 잘근잘근 씹었다.
“왜 다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밤이가 컵에서 입을 떼어 내고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낙조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휴게실 허공에 시선을 둔 밤이는 정말 이상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밤이의 말에서 흘러들어오는 마음에 거짓은 조금도 없었다. 예전 같았다면 저 말도 온전히 믿지 못했겠지. 낙조는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애써 괜찮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헛기침을 몇 번 하니, 쭉 빠져 있던 힘이 그나마 손끝에서라도 도는 것 같았다.
“누나, 근데 나도 이상한 꿈을 꾼 적이 있거든요.”
“꿈은 다 반대야.”
“아니 쫌. 들어보고 얘기해요.”
“뭔데.”
밤이는 간식 바구니에서 꺼내온 사탕 껍질을 까며 무심하게 맞받아쳤다. 낙조는 ‘악어와 새’에서 보았던 꿈인지 환영인지 모를, 켈리가 만들어 낸 붉은 색 세상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내가 진짜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는 모습을 봤어요.”
“어떤 식물인간. 내가 아는 식물인간이야?”
“…….”
“니 표정 보니까 아니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식물인간? 완전히 식물이랑 합쳐진 모습?”
“네. 누나 근데 일부러 그러는 거죠. 나 약 올리려고.”
“반은 맞아. 이런 칙칙한 곳에서 농담도 못하면 나도 머리 돌아 버릴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긍정하는 밤이의 말도 완벽히 진심이었다. 낙조는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품안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아이처럼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이것을 놓아야 할지, 풀릴 때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리고 내 신체기관 전부 각자 다른 식물에게 숙주가 되어 있다면……, 진짜로 그런 모습이 되는 거,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꿈속에서 그런 모습으로 변한 후에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나?”
밤이는 예상하지 못한 곳을 파고드는 걸 잘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모습이 어쩐지 믿음직스러워 멋대로 팀에 합류하는 걸 제안하기도 했다. 그 결정은 오로지 자신이 내린 선택이었다. 낙조는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남은 물을 한꺼번에 들이키고선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들 다 죽어 있었어요.”
붉은빛에 잡아먹혀 공간 모든 곳이 녹아내리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자신은 분명 동료들의 시신을 보았다. 품 안에서 조금씩 무거워지던 지운의 몸을 안고 있던 감각은 아직도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낙조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가까스로 가빠지려는 숨을 다스렸다.
세상을 죽인다는 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는 말과 같은 것일까.
낙조의 머릿속이 모순을 앞세운 생각으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