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40화 (140/202)

140화. 삼자대면 (2)

오늘 밤하늘엔 별이 떴을까. 삼승은 창문 대신 걸어 둔 오래된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붓과 먹물로 그린 난초. 매란국죽 중 하나인 난초 그림은 삼승이 서천에 들어오며 받은 선물이었다. 힘 있는 붓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담긴 그림은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묵묵히 지켜보게 했다.

삼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방으로 연결된 곳의 문을 열었다. 빔 프로젝터가 쏘고 있는 벽 위엔 귀도의 위치가 찍혀 있었다. 빨간 점은 여전히 청주에 놓여 있었다. 삼승은 프로젝터 곁에 놓인 작은 휴대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곧 ‘1’을 길게 눌렀다. 구식 휴대폰 액정이 천천히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

신호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곧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삼승의 연락을 받았다.

-후우, 후, 훅, 후…….

“귀도.”

-……삼, 승님.

귀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삼승은 빈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단말마의 비명이 귓속 깊게 꽂혔다.

자신에게 세성이 말했던 ‘피바다’가 얼추 그려지는 듯했다. 삼승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귀도에게 물었다.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가 위태롭게 일렁였다.

“죽였니.”

삼승의 질문에 귀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와야 할 목소리 대신 들리는 건 귀도의 벅찬 숨소리와 낯선 비명뿐이었다. 삼승은 벽에 비친 그림 위로 둥둥 뜨인 빨간 점이 제자리에서 맴도는 걸 지켜보다가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길게 눌렀다. 곧 전국을 보이던 지도가 청주를 중심으로 확대되면서, 본부의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빨간 점은 2층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삼승은 프로젝터 밑에 깔아 둔 종이를 한 장 빼냈다. 그동안 귀도가 보안팀으로 행색을 꾸미면서 알아낸 본부의 구조였다. 빨간 점은 아주 잠깐이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점이 흔들릴 때마다 건너편 속 귀도의 목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벽에서 빛나고 있는 빨간 점은 점차 삼승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세성이 말한 피바다가 어떤 것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기도 했다. 귀도가 몰고 오는 피바다. 그것은 청주에서 멈추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들 테다.

누군가를 붙잡거나 힘껏 내리치는 타격 소리가 귀에 매달렸다. 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상대는 나가떨어졌다. 삼승은 잠자코 귀도의 대답을 기다렸다. 빨간 점이 복도 한가운데에서 끝에 다다를 무렵, 귀도의 가파른 숨소리도 더욱 크게 울렸다. 귀도는 숨을 다스리는 듯 심호흡을 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웃었다. 기뻐서 내는 웃음은 아니었다. 삼승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죽였니. 귀도.”

-하아, 하……. 아니요. 아직 필요한 것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 같구나.”

-괜한 화풀이라니요? 여즉 정신을 못 차린 켈리의 수하들만 상대했습니다. 한 명도 죽이지 않고……, 그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 것뿐이에요.

“거기에 남은 다른 서천 사람들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하니. 남은 사람들은 네가 떠나고 난 후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거냐?”

-괜한 걱정이십니다. 저는 이곳에 남은 생명을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에요. 그들에게도 위험한 인물을 직접 삼승님 앞까지 이송하는 일을 하는 거죠.

“……머리를 많이 썼구나, 귀도.”

-하늘마루에 계시죠? 제가 거기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데리고 갈 테니, 칭찬해 주세요.

귀도는 설핏 웃는 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삼승은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있는 빨간 점을 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선택으로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이해해 주세요, 삼승님.

그리고 통신은 그대로 끊겼다. 삼승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눈을 깜박였다. 곧 위치 추적기까지 부순 건지, 빨간 점은 그대로 화면에서 사라졌다.

*

“고낙조, 일어나.”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낙조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낙조는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희뿌옇게 번지던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지면서, 어두운 인영이 점차 확실하게 눈앞에 드러났다.

“일어나 봐…….”

해화였다. 그녀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낙조를 흔들면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너무 깊게 잠들었나. 좀처럼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아 낙조는 몸을 웅크렸다가 안경을 찾아 손을 뻗었다. 해화는 곧장 낙조의 안경을 찾아 손에 놓아 주고서 그가 몸을 일으키길 기다렸다.

“몇 시야.”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입술을 열고 흘러나왔다.

“나 자꾸 이상한 꿈 꿔.”

해화는 낙조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서 자신의 말을 멋대로 꺼냈다. 낙조는 안경을 쓰고서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은 해화를 말없이 응시했다.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을 켜니, 걱정 가득한 해화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낙조는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몇 번 닦고서 입을 다시 열었다.

“몇 신데 나한테 와서 꿈 얘기를 해.”

여러 곳에서 핍박받은 정신이 건강한 꿈을 낳을 린 없었다. 그러나 여태껏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투정 비슷한 걸 부린 적이 없는 해화가 아이가 부모를 찾듯 방까지 찾아와 꿈 얘기를 하는 것은 의심을 품기 적당했다. 타인의 말을 묵묵히 들어 주기만 하던 낙조의 이전 모습과는 달리 차가운 대답에 해화는 우물쭈물하며 낙조의 이불을 쥐었다.

오랜만에 푹 잠드나 싶었던 낙조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서 해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어느 상황이든 밤이만큼 쉽게 흥분하거나 쓸 데 없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썬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보다는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위험할 순 있어도 때로는 용감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던 해화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낙조이기에 이런 사소한 투정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낙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해화는 낙조의 눈치를 보다가 가만히 놓인 낙조의 새로 돋은 오른손을 덥석 쥐고서 말을 쏟아냈다.

“꿈에서 자꾸 네가 나와. 네가 나온다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건데.”

낙조는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꿈 내용이 어떤지 얘기하지도 않고서 막무가내로 자신에게 달려들어 특정 대답을 듣고 싶은 것 마냥 매달리는 해화의 행동에 오히려 잔뜩 날이 섰다. 해화에게 잡힌 손을 빼내자, 해화는 더욱 안달복달하는 얼굴로 낙조의 손을 다시 찾아 쥐었다.

“너라고 하는데 네 얼굴이 아니야. 그러면서 나한테 네 이름을 물어봐.”

“……그게 무슨 말인데.”

말을 할수록 엉키는 것이, 낙조는 맘속에서 불쾌한 흐름이 조금씩 흐르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해화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도.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판별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은 세성뿐이었다. 물론 해화 또한 세성과 비슷하게 자신의 힘이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제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예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 해화의 말은 누군가가 조작한 듯 어딘가 이상하고 그녀의 말투와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낙조는 자신의 손에 매달린 해화를 가만히 두기로 하고서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하는지 부추겨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을 나한테 물어본다니까?”

“정확하게 설명을 해. 내가 어떤 얼굴을 갖고 있었는지, 너한테 왜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는지.”

“얼굴?”

“어. 내 얼굴이 아니었다며. 그러니까 다른 아는 사람 얼굴이었다든지, 아니면 어떻게 생겼다든지 그런 건 기억 안 나냐고.”

낙조는 어김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화는 붙잡고 있던 낙조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면서 고개를 저었다.

“기억, 기억 안 나.”

“그럼 내 얼굴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확신해.”

“사람이, 사람이 꿈을 꾸다 보면 그래도 느낌이란 게 있잖아. 저건 고낙조가 아니야……. 이런 느낌이 꿈속에서 들었다니까?”

“앞뒤가 다르네. 너 처음에 내가 꿈속에 나왔다면서. 그럼 처음엔 나인 걸 알았다는 거잖아.”

“아니! 처음엔 너인 줄 알았지. 근데 가까워지니까 네 얼굴이 아니었어.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잖아. 그리고 내가 빤히 네 이름을 아는데 네가 나한테 왜 네 이름을 물어보겠어. 그게 이상한 거잖아. 그지.”

“…….”

낙조는 쉬지도 않고 말을 쏟아 내는 해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미한 불빛에 비치는 해화의 표정은 말 한 마디를 뗄 때마다 수 번씩 바뀌었다.

‘홍해화가 원래 이렇게 표정이 많았나.’

의심이 더욱 굳어지는 이유는,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해화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세성의 진심을 파악할 수 없던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개로 가려놓은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화의 말은 달랐다. 아무것도 그녀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보려고 하는 곳은 텅 빈 느낌이었다.

“그래서, 너 이름이 뭐야?”

침묵이 길어지자 참다못한 해화가 말을 꺼냈다. 낙조는 자신을 붙잡은 해화의 손에 잔뜩 힘이 실린 걸 느끼면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 어떤 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가 보였다. 낙조는 잠시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해화를 바라보았다. 해화는 답을 조르는 듯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낙조의 오른손을 흔들었다.

“내 이름?”

“응응.”

‘거제도에서부터 이상했지.’

해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스테리한 일들이 낙조의 머릿속에서 둥둥 떠올랐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만 같았던 느낌을 주는 데자뷰, 그리고 해화의 껍데기와 대화하고 있는 느낌인 지금. 낙조는 피식 웃으면서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해화의 손등을 토닥였다.

“홍해화. 알면서 뭘 물어봐.”

“아니……,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내 꿈에 나와서.”

‘홍해화가 아니면 뭐지?’

낙조는 아주 잠시 동안 생각에 빠졌다. 해화의 몸을 어떤 것이 조종하고 있는 거라면, 자신이 오른팔에 조종당하고 있던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이 의문을 확실하게 풀 수 있는 질문이 없을까. 해화의 발목을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물론 대뜸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이름을 물어보는 것만큼 억지스러운 상황도 없었지만.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해화의 몸속에 있는 것이 안다면, 도망갈 수도 있다. 낙조는 태연하게 시선을 굴리면서 생각했다. 자신처럼 해화는 신체의 한 부분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즉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했다.

“그니까 그냥 꿈인 걸 왜 나한테 와서 물어봐. 꿈이잖아 그냥.”

“그냥 꿈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지…….”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악몽 꿨다고 생각해.”

“아니 낙조야.”

“어.”

“내가 자꾸 물어보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줘.”

“너가 지금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대답을 왜 해. 너 이미 알잖아, 내 이름.”

“……꿈속에서 아니라 그랬다니까!”

결국 해화가 벌컥 소리를 높였다. 아마 이 정도라면 밖에서도 들렸을 테다. 낙조는 누군가가 이 소리를 들었길 바라면서 해화가 자신의 손을 콱 붙잡은 것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들려선 안 된다. 단단히 붙잡아 두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낙조는 오히려 오른손에 힘을 꽉 주면서 해화가 함부로 손을 빼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울컥 치솟는 낙조의 힘에 당황한 듯 해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불이 일어나기 전부터였나? 아니면…….’

낙조는 해화가 한 달 동안 잠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곁에 없던 시간이 더 길어 정확히 어떤 사건이 해화를 잠식했는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해화가 은근슬쩍 자신의 손을 빼내려고 하자, 낙조는 더욱 단단하게 해화의 손을 붙잡았다.

“야아아, 아파.”

평소 해화가 쓰는 말투와는 거리가 멀다. 낙조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서 해화가 점점 다급하게 손을 빼내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는 당황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눈동자가 빠르게 문밖과 낙조를 번갈아 가며 굴러다녔다. 누가 오고 있나 보구나. 낙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해화를 꽉 붙든 채 자신의 방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단 몇 초 사이였으나, 해화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있는 힘껏 손을 빼내려 하며 자리에서 도망치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낙조에겐 손가락으로도 제압할 수 있는 알량한 힘밖에 되지 않았다. 해화가 되도 않는 엄살을 피우며 손을 놓아 달라고 말하자마자, 낙조의 방문이 열렸다.

“…….”

“장승님.”

“홍해화 씨, 뭐합니까.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무흠이 복도의 불빛을 등진 채 해화에게 물었다. 해화는 무흠을 보자마자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면서 아양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 중사님. 낙조가 악몽을 꿨나 봐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제가 와 봤는데……, 가지 말라면서 붙잡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놔 달라고 소리를 지른 거였어요. 근데 낙조가……, 낙조가 무서운 표정을 하고 안 놔주고 있었어요.”

무흠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낙조는 무흠을 돌아보면서 해화의 말을 잘랐다.

“장승님. 홍해화 지금 뭐에 씌였어요. 제가 그 오른팔에 조종당했던 것처럼. 근데 그것보다 더 강하게. 지금 이거 홍해화 아니에요. 괴물이지.”

“어, 안다.”

무흠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스탠드 불빛만이 방안을 밝히는 와중에, 무흠마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안 해화가 온몸을 비틀어 댔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사람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무지막지한 힘으로 낙조의 손을 뿌리친 해화가 곧장 방문 문고리에 달려들었다. 무흠은 해화의 발을 걸어 그녀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직전 뒷덜미를 잡아챘다. 무흠의 손에 달린 해화의 입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변종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성님께 데리고 가야겠다.”

무흠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낙조는 허공에 떠서 온몸을 파닥거리는 해화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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