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삼자대면 (1)
배정받은 방에 들어왔을 때, 낙조는 서천에서 일하는 이들의 얼굴이 문득 궁금해졌다. 서천에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른 문을 열어본 적도 없었고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었기에 더욱 서천이라는 곳이 의심됐다. 물론 세성부터 삼승까지, 서천을 쥐고 있는 권력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정작 이곳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에 찝찝한 마음을 털 수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몸을 씻었다.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피비린내가 드디어 가셨다. 뿌옇게 수증기가 차오른 거울을 닦고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가 조금 긴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낙조는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왔다. 여름의 들판에서 맡을 법한 푸릇푸릇한 향이 방안을 감쌌다. 방의 크기는 작았으나 혼자 사용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부드러운 매트리스와 두꺼운 이불, 좋은 향기까지. 모든 게 완벽한 곳은 밖과 너무나도 달랐다. 낙조는 침대에 눕고서 안경을 벗었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면서 떠오르는 대로 머리를 굴렸다.
정리를 해보자. 떨어져 나간 오른팔에 심장이라도 달렸나? 자신의 몸 없이도 꾸역꾸역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할까. 게다가 숙주가 없어지니 어떻게라도 영양분을 채우기 위해 잠든 변종들을 부하처럼 불러들였다. 더 이상 자신은 오른팔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붙어 있을 땐 철저히 자신을 속이려고 오른팔이 연기를 한 건가. 해화의 입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의 목소리라고 했다. 아이가 울면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매달렸다고 했지. ‘네피’라는 낯선 이름도 묘하게 거슬렸다. 낯설 수밖에 없는 이름임에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이 무거워졌다. 얼굴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와 어떤 관계였는지도 모르면서, 해화의 입에서 ‘네피’라는 이름이 내뱉어졌을 때 낙조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생명이 죽은 폐허에 홀로 서 있는 심정이었다.
몰려온다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자신의 팔이었음에도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법한 정보는 없었다. 물론 오른팔에 제 것이 아닌 영혼 같은 게 실려 있다는 추측도 발광 변종의 뿌리를 뽑을 때 한 것이니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정말 아이의 영혼이라면, 왜 아이가 자신의 팔에 기생하게 됐는지, 어떤 한이 서렸기에 아직도 자신의 팔에 갇혀 버둥거리는지 알고 싶었다.
‘애초에 식충식물만 진화했다는 것도 이상하잖아.’
낙조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잠은 오지 않았으나 눈을 뜨고 있자니 주변이 빙빙 도는 듯했다. 가습식물 또한 자신의 몸에 뿌리를 내린 건 확실했다. 회복력을 담당한 식물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밤이에게 붕어섬에서 뽑았던 피 성분에 대해 묻는다면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이자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의문이 있다. 아이의 영혼은 정말 저승으로 안내하는 자가 맞을까? 무흠은 서천에 충성심을 갖고 있었고 상부의 지시를 정말 잘 드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이가 서천에 있지만 지금은 없다, 낙조가 그 역할을 자신이 하는 것이냐 묻자 그저 무흠은 ‘그래서 도망칠 것이냐’라고 되물었다.
영혼이라는 게 있긴 했나. 그렇다면 부모님의 영혼도 내 곁에 남아 있었을까.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실까. 한참 외로움과 우울에 시달릴 때 스쳐 지나갔던 생각이 다시금 낙조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낙조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이불을 꽉 쥐었다. 쓸모없는 생각이다. 과거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던 때와 다르다. 무흠의 말대로, 자신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면……. 세성이 자신을 아주 잠시 보호하고 있는 거라면? 다시 목소리가 들리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혼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일이 과연 자신 같은 사람이 해도 되는 일인가. 정답을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생각에 지칠 때쯤 몸이 노곤해졌다. 그제야 기절하고 깨어났던 날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일주일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틀이라도. 낙조는 따뜻한 이불을 눈가까지 끌어 올리고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
“부르셨나요.”
“세성, 귀도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매일 봤습니다.”
“원래도 서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니?”
“삼승님의 말씀만 따랐습니다. 귀도의 역할만 생각한다면, 그리 나쁜 고집은 아닙니다. 삼승님을 지켜야 하는 자니까요.”
“그런 아이가 내 말을 거부할 만큼 화가 났다면, 어떤 짓까지 할지 짐작할 수 있나?”
“아……, 혹시 청주에서 무슨 일이 났나요?”
세성은 웃음을 억지로 감추려 노력하며 물었다. 삼승은 어두운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많은 피가 흐를 것 같다. 피 냄새가 벌써부터 올라와.”
“저런……, 혹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여자를 건드렸나요?”
“세성이 웃는 걸 보니 내게 보이는 게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대비를 해야겠어. 문지기를 네 명으로 늘리고, 귀도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려라. 다른 간부들에겐 비밀로 하고.”
“알겠습니다.”
세성은 순순히 대답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세성을 바라보던 삼승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리곤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춘 채 세성에게 물었다.
“세성, 귀도에게 벌을 내리고 싶으니.”
“그럴 리가요. 귀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지금은 없습니다.”
“환인은……, 큰심방과 맞설 수 있을 것 같은가.”
“오늘 밤이 지나야 알 수 있습니다.”
“세성.”
“예, 삼승님.”
“세성에게 보이는 귀도는 지금 어떤가.”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세성의 눈이 갸름해졌다. 수많은 대답이 세성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길이 놓인 듯했다. 어떤 길이 고난이 가득한지 짐작은 갔지만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란 믿음은 함부로 가질 수 없었다. 세성의 대답이 늦어지자 삼승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간격이 좁아진 만큼 침묵이 이끄는 긴장도 한층 높아졌다.
“삼승님께서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세성.”
“……피바다에 잠겼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지금 귀도와 맞서려 한다면 엉망으로 부서질 것입니다. 그만큼 귀도도 함께 깨집니다. 하지만 귀도……, 귀도는 상대보다 빨리 일어날 겁니다.”
“그게 다인가.”
“확실하지 않은 것도 말씀드릴까요.”
“다 말해 주렴.”
삼승의 목소리는 어딘가 체념한 듯 가라앉아 있었다. 세성이 내뱉은 말 하나하나가 그녀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삼승을 위한답시고 거짓을 고할 순 없다. 세성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삼승과 눈을 마주했다. 어쩐지 쇠약해 보이는 눈동자는 전보다 많이 흐려져 있었다. 세성의 미소도 완전히 멎었다. 세성은 삼승을 진지하게 응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켈리라는 여자의 뒤로 두 명이 더 보입니다. 환인……, 고낙조에게서 일어난 능력 발현은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그리고 아주 강합니다. 전부 말하라 하셨으니 말하겠습니다. 큰심방은 물론이고 삼승님의 힘보다 강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좋은 소식이구나.”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성이 지금까지 틀린 적이 있었나?”
“물론 없었습니다.”
“괜히 거짓말하지 말게.”
“삼승님. 그럼 하나 여쭙겠습니다.”
세성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채 말했다. 미소는 삼승의 얼굴로 옮겨 갔다. 엷은 미소를 짓고서 삼승은 세성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서천을 지키시려는 게 맞습니까?”
“세성, 서천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삼승은 곧장 대답을 꺼내다 잠깐 주춤거렸다. 세성의 시선은 어둠에 깔려 냉철했다. 삼승의 얼굴에 간신히 띄워져 있던 미소가 서서히 모래처럼 흩어졌다. 세성은 삼승을 굳이 독촉하지 않았다. 세성에겐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고, 들어야만 하는 대답이 있었다. 세성의 뜻을 모를 리 없는 삼승이다. 삼승은 오른손을 들어 세성의 한쪽 손을 잡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두 개의 시선이 짙은 어둠 속에서 미미하게 부딪쳤다.
“서천은 이제 사람을 치료하지 않는다.”
“…….”
“식물을 되살려야 해.”
삼승의 목소리는 유언을 내뱉는 자의 것처럼 조용했으나 진심으로 들렸다. 세성은 조용히 고개를 다시 숙였다.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삼승의 손에 미약하게나마 힘이 실렸다. 마음이 뜨거워지다 못해 녹아내리는 듯했다.
*
“…….”
파도는 켈리의 방문을 열고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예상했던 대로 켈리는 방에 없었다. 침실로 간 걸까. 수많은 생각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질질 끌고 온 남자는 조금 더 무거워졌다. 바로 죽을 만큼의 독초를 먹인 것은 아니니 의식을 잃은 게 분명했다. 파도는 켈리의 방 한가운데에 남자를 내려놓고 조용히 고개만 돌렸다. 방을 밝히고 있는 건 테이블 위의 스탠드 조명 하나뿐이었다. 파도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의자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의자를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거나, 신경을 쓰지 않고 자리를 뜬 것이다. 파도는 남자의 인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청주에 온 이후 신경이 평소보다 예민해졌다는 건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계속해서 늦춰지는 삼승의 명령은 환인이라 불리는 남자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고낙조, 고낙조, 고낙조……. 파도의 머릿속엔 낙조의 이름이 아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삼승은 켈리가 억지로 비틀어 만든 이 질척거리는 세상을 낙조를 통해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방법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림이 너무나 길어졌다.
몇 명이 자신에게 달라붙든 상관없었다. 파도는 자신과의 약속처럼 처음 정한 목표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켈리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데 삼승의 지시는 늦어지는 만큼 차오른 울분이 집착을 키웠다.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서천꽃밭을 망친 자라고 생각하는 탓도 있었다. 뭐가 부족해서 이미 저승길을 지난 영혼마저 끌어들여 이 판국을 벌였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물론 고운 말을 쓸 생각은 없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악어와 새에서 켈리를 처음 만났을 때 진작 죽였을 테다.
‘삼승님은 켈리를 통해 뭔가를 더 알아내고 싶으신 거야. 모두가 안전한 범위 내에서.’
삼승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귀도는 자신이 처음이라고 서천의 모든 이가 말해 주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으나 그 말을 듣기 위해 일부러 그들에게 이전 귀도들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 삼승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파도는 끔찍이도 여겼고 모두가 그것을 알았으면 했다. 그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흔쾌히 허락한 사람이 삼승이었다.
‘그럼 당사자 입을 여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지. 어떻게 해서든 죽이지만 않고.’
삼승과 함께 서천에 왔을 때, 파도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서천의 큰심방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지면서 서천을 떠났다고 했지만 삼승은 파도가 태어난 시기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파도를 낳은 부모는 파도가 태아였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얘기를 들었을 거라면서, 그들은 파도를 밝은 어린이로 키울 수 없을 거라고도. 파도가 태어나는 순간 세 명 모두 불행해지는 운명이라 할아버지가 삼승에게 전하며 서천을 떠나셨다고 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왜 그리도 자신을 척박하게 키웠을까. 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자신을 껴안고 바다를 바라보며 왜 ‘파도’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원망조차 피지 않는 마음엔 퀴퀴한 기억 몇 개가 남아 있었다.
파도는 꿈을 통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따로 글을 배우지 않았으나 할아버지의 방에 있던 책들을 읽을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책을 여러 날에 나누어 태우며 파도가 웬만하면 글을 읽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파도의 머리엔 이미 책 한 권의 내용이 저장돼 있었다. 한 페이지가 한 장의 사진처럼 차곡차곡 쌓여 머릿속 한 부분을 채웠다. 흐릿하고 어두운 흑백으로 인쇄된 이미지들이 담긴 식물도감. 복잡한 한자와 할아버지가 곳곳에 기워 넣은 문장들까지, 파도는 그 한 권만 기억할 수 있었다.
식물도감에 빠진 이후로는 매일 악몽을 꿨다. 식물도감에 나온 모든 식물이 빼곡하게 담긴 세상을 보았다. 땅에 뿌리를 내릴 공간이 없어 완전히 자란 식물의 기둥과 나뭇가지, 줄기, 잎사귀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 또 다른 식물이 뿌리를 내렸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져서, 결국 세상은 하나의 식물로 꽉 차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이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한꺼번에 부를 수 없는, 새로운 식물이었다. 파도는 그 식물이 점점 몸을 부풀리며 자신까지 짓누르는 꿈에 질식할 것 같았다. 항상 숨이 넘어가기 직전 할아버지가 잠든 자신을 깨웠고 멍한 자신의 입안에 쓴 약초를 넣어 주었다. 그 약초를 먹으면 이틀 정도는 꿈을 꾸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도 사라졌다.
꿈에 대해서 아무리 말해도, 목소리가 들려 소리를 질러도 할아버지는 그것이 모두 허상이라고 했다. 아픈 것일 뿐이니 약을 잘 챙겨 먹으면 된다, 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면 나아질 것이다……, 이미 엉망이 된 파도는 그 말을 반만 믿었다. 학교 다닐 나이가 지났을 땐 그 기준을 성인으로 높였다. 다만 그때쯤부터 할아버지에게 치매가 오면서 파도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할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지기 시작하자, 제정신일 때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못 보던 얼굴 셋이 집에 들어왔다. 모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라고 했으나 파도의 부모는 아니었다. 그들은 파도의 끼니만 대충 챙겨 줄 뿐 거의 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기억을 잃은 할아버지는 밤마다 파도의 방으로 들어와 어렸을 적 먹였던 약초를 먹이려 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아무 말도 없이 마루에만 걸터앉아 있다가, 노을이 지면 파도의 이름을 지긋지긋하게 불렀다.
곧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거라고, 파도는 어느 날 밤 느꼈다. 그날도 한바탕 소리를 지르며 자신에게 약초를 먹이려 하는 걸 겨우 재운 후였다. 다시 잠들려고 하는 순간 파도는 감은 눈꺼풀 사이로 할아버지가 악몽에 나타나던 식물에게 깔려 몸이 터지는 걸 보았다. 자신 또한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으나 할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곤히 잠들어 계셨다. 파도는 그가 늦은 낮에 깨어날 무렵 확신했다. 아, 사흘 후면 죽겠구나. 그리고 나흘 후 삼승과 만났다.
‘할아버지가 큰심방이었을 때, 켈리를 아주 예뻐하셨다고 했지. 그런데 정말 우연처럼……, 아니……, 운명처럼 내가 태어나기 직전 켈리가 서천에서 도망쳤지. 서천에서 나오게 된 이유는 나한테 집중된 것처럼 꾸몄지만 사실……, 켈리를 그 누구보다 믿어 주던 사람이 할아버지였으니까, 할아버지는 쫓겨난 거야.’
파도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마치 곁에서 누군가가 길을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문고리를 돌렸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오직 한 방향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과 지나간 시간이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 발이 멈추었다.
‘고작 도망치고 숨었다는 곳이…….’
파도의 눈앞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우스운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관계자가 아니면, 누구를 관계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켈리와 비슷한 사람. 뒤바뀐 세상을 조종하려는 사람과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자들이겠지. 그들이야말로 이 재앙의 관계자일 수밖에 없다.
파도는 주머니에서 작은 소형 칩을 꺼내 스캐너 밑에 집어넣었다. 오른손을 스캐너에 찍는 방식으로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파도가 던진 소형 칩은 그런 기계를 몇 초 안에 해킹하는 도구였고.
무거운 문을 열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연기가 밖으로 빠져 나왔다. 파도는 새카만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렸다. 자욱하게 낀 연기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파도의 손이 천천히 오른쪽에서 두 번째 냉동고 문으로 향했다. 곧 냉동고 문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있던 것이 천천히 드러났다.
“…….”
파도의 새까만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켈리는 손에 쥐고 있던 많은 알약과 풀을 마구잡이로 입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도의 왼쪽 손이 켈리의 목을 잡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게 더 빨랐다. 큰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나뒹군 켈리는 남은 약이라도 꾸역꾸역 먹으려 알약과 풀을 씹었다. 파도는 엎어진 켈리의 머리를 움키고서 들어 올린 후 뺨을 세게 내리쳐 입안에 있던 것을 모두 뱉어내게 만들었다. 그제야 켈리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새파란 눈동자와 새카만 눈동자가 맞닿았다. 파도는 켈리와 처음 만났던 날 밤에 지은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반가워. 내 말을 아직도 이해 못했구나. 너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이르시지 않았니.”
“…….”
“서천으로 돌아가자.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