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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38화 (138/202)

138화. 생각지도 못한 선물

사회를 이루는 크고 작은 집단들 속엔 다양한 군상이 숨어 있다. 왜 숨어 있다고 표현하냐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진짜 모습을 쉽게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좌절을 연속적으로 맛본 사람은 쉽게 분노할 가능성이 있다. 어느 정도의 나이를 먹기까지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란 건 불확실하지만 누군가에겐 그다지 큰 파동 없이 변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부모가 쥐게 한 안전한 공간과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맡겨지며 그럴 법하게 큰다. 겉으로는 문제없이 성장하나, 개인의 감정만이 크고 비대해져 타인과 섞일 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라고, 삼승은 파도에게 가르쳤다. 그녀가 파도를 처음 만났을 때 해 주었던 말이었다. 삼승과 파도는 땅끝마을 해남에서 만났다. 바닷소리가 울리는 길목에 앉아 있던 파도를 발견한 삼승은 아이인 그녀를 데리고 먹을 것을 주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파도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 날이었다. 집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한 가족은 상복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얼굴들이 오갔다. 삼승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파도는 삼승이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깨끗이 정돈된 머리와 수수한 화장, 그리고 격식 있는 말투가 파도의 눈을 사로잡았다.

「왜 이름이 파도니?」

「가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가져다준대요. 파도가.」

「참 좋다. 꼭 누군가의 마음을 읽은 듯이 선물을 가져오는 거네?」

바닷가에 서서 나눴던 대화는 파도에게 잊지 못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삼승은 바닷바람에 넘어가는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았다. 묵묵히 수평선을 응시하면서 해가 지는 걸 바라보았다.

「왜 집에 있지 않고 길에 앉아 있었어?」

「집에 있으면……, 할아버지가 소리를 질러요. 병풍 앞에 무섭게 앉아서.」

「부모님껜 얘기 안 해봤어?」

「부모 없이 큰 애라서 어른들은 내 말 안 믿어요.」

「누가 그런 말을 했니?」

「할아버지요.」

삼승이 준 먹거리는 동네 슈퍼에서 팔지 않는 과자였다. 큰 비닐에 비해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파도의 대답에 삼승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노을이 지는 걸 묵묵히 바라보던 파도는 처음으로 삼승에게 질문했다.

「할아버지랑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궁금하니?」

「네.」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던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어른이 파도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삼승은 옅은 미소를 짓고서 무릎을 꿇어 파도와 시선을 맞추었다. 노을빛에 반짝이는 삼승의 검은색 두 눈동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람은 식물처럼 끈기 있게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곧 죽을 것 같더라도 고개를 돌리면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이따금씩 말을 걸어 외롭지 않도록 해주어야 하는 존재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삼승은 갖가지 식물의 이름을 불렀다. 이 아이는 어떻게 보살펴야 하고, 저 아이는 이렇게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사실 파도는 식물에 대해서 큰 관심은 없었다. 그저 식물에 대해 얘기할 때 반짝이는 삼승의 눈동자가 멋져 보인다는 생각뿐이었다.

「할아버님이 파도에게도 얘기해 주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멋대로 얘기할 순 없지.」

「죽었잖아요.」

「……파도도 봤잖아? 할아버님이 병풍 앞에 앉아 계신 걸.」

매몰찬 파도의 대답에도 삼승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파도와 맞닿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파도의 눈에 삼승은 아름다운 여자였기에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나는 식물을 사랑해. 꽃과 열매를 틔우고 곤충이 오가며……, 어디를 보든 항상 제자리에 있어 주는 게 쉽지 않으니까. 특히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야. 너무 어렵지…….」

한 번씩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크게 일렁일 때가 있다.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던 물결이 발목까지 삼키고 물러나가면, 허탈함과 함께 말하지 못할 시원함이 썰물처럼 물러난다.

「보고 있다 보면 배울 점이 정말 많아. 가끔은 대화를 나누고 그러지. 아, 이건 내가 직접 키운 거야. 한 번 먹어 볼래?」

삼승이 내민 건 체리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였다. 파도는 의심 없이 열매를 먹었다. 달기보단 씁쓸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씨앗을 내뱉고서 ‘맛없어요’라고 얘기하자 삼승은 또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때 삼승이 건넨 열매에 맹독이 들어 있었다는 건 서천에 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파도는 딱히 삼승에게 찾아가 왜 자신에게 맹독의 열매를 먹였느냐 묻지 않았다. 서천에 오자마자 파도는 귀도의 자리를 차지했고, 모두가 귀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삼승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문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파도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보기 껄끄러울 정도로 입을 길게 찢은 채 웃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식칼보다 더 큰 칼이 들려 있었는데, 예리하게 빛나는 칼끝이 복도 조병의 빛을 받아 더욱 서늘하게 반짝거렸다.

유현과의 대화를 나눈 후 연우가 일하는 연구실 근처까지 서성거리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연락을 하겠다는 삼승은 밤이 되도록 연락하지 않았다.

“저 기분 안 좋아요. 약 하셨으면 조용히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너랑 대화하려고 온 게 아닌 거 알잖아, 나도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무서워서 모르는 척하는 건가? 으응? 나 지금 말도 안 되게 용감한 상태거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최대한 조용히 죽여야겠지만 그 뒤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런 것도 막 벌써 상상돼. 살이 하나도 없어서 좀 아쉽긴 하다. 자르는 맛이 안 나겠어.”

“……이거 완전 맛이 갔네. 너야말로 시간 끌고 있는 거 알아? 그냥 네 모습을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건 아냐? 헛소리 그만하고 할 일이나 해.”

“완전히 미친년이구만.”

남자는 파도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쏜살같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높이 치켜든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파도는 칼이 자신의 몸으로 내려 꽂기 직전 반 바퀴를 돌아 가볍게 남자의 손을 피했다. 남자의 눈동자에선 초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쉼 없이 낄낄거리면서, 다시금 파도에게 칼을 겨눴다.

약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제대로 붙었을지도 모른다. 용감한 상태, 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걸로 보아선 그 정도까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양반은 아닌 게 분명했다. 파도는 특별히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남자가 휘두르는 칼의 범위에서 빠져 나와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처음엔 킥킥 웃던 남자의 얼굴에서도 여유로움이 점차 사라졌다. 파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용감한 상태라는 걸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이이, 닥쳐, 이 씨발 새끼야!”

“다 들려. 너는 본부에 등록되지도 않은 사람일 텐데, 그럼 잠입해서 본부 보안팀을 죽인 사람이 될걸.”

“이거, 이거, 이 썅년이……, 뭘 모르는구만? 그 여자 옆에만 있으면 뭐든 해도 상관없어. 너 하나 죽는다고 본부가 뒤집힐 일도 없거든? 어?”

“내가 죽는다고? 그건 생각 안 해 봐서 모르겠네.”

파도의 여유 넘치는 대답에 남자는 이를 악물고 파도가 기대고 있던 벽을 향해 돌진했다. 깡! 단단한 벽에 맞닿은 칼끝이 약간 부러져 나가떨어졌다. 그럼에도 갈려 나간 칼끝의 단면은 얇고 예리했다. 오히려 더욱 위압적이기도 했다.

“이런 새벽에도 잠들지 않는 사람은 많아. 꽤. 더 소란 피우면 누구라도 찾아올걸.”

“그 새끼도 죽는 거야. 너랑 내가 있는 걸 같이 본 새끼들은 다 죽는 거지.”

“아, 내가 죽이면 되는 건가?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하니까.”

“씨발 새끼가 아까부터―”

파도의 웃음기 담긴 조롱에 남자는 온몸에 힘을 잔뜩 준 채 칼을 마구 휘둘렀다. 그저 악에 받쳐 마구잡이로 허공을 내지르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사람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고 있고, 어디로 피할 것을 예상해 곧장 찌르는 각도도 정확했다. 상대가 파도이기 때문에 모두 실패할 뿐이었다. 남자의 숨이 거칠어지자, 파도는 역으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칼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비튼 후 팔꿈치로 명치 아랫부분을 세게 가격했다. 남자의 비명이 터지기도 전이었다. 파도는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작은 열매들을 남자의 입에 쑤셔 넣은 후 턱을 위로 갈겼다. 뼈가 어그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남자가 뒤로 넘어갔다.

챙강.

너무나도 손쉽게 남자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나갔다. 파도는 칼을 복도 끝으로 차 버린 후 남자의 볼을 억센 손아귀로 잡았다. 씹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쥐어 복도 바닥에 몇 번 세게 꽂아 내리자, 이윽고 그가 다 풀린 눈으로 겨우 파도를 올려다보았다.

“시간 끄는 거 싫다고 해서 내가 좀 도와줬어.”

남자를 내려다보는 파도의 눈에 자비 같은 건 없었다. 모든 말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남자는 다 뭉개진 신음을 내지르면서 몸을 간헐적으로 떨어댔다.

“너 같은 걸 용병으로 쓰는 켈리도 참……, 어떻게 보면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나한테 그렇게 당해놓고도 이렇게 멍청한 애를 옆에 둔다는 게. 너 하나로 될 줄 알았을까? 절대 아닐걸. 아마 너는 시험 삼아 보내 본 걸 거야. 나한테 죽을 걸 뻔히 알고도 너를 보낸 거라구.”

“개……소리…….”

짜악.

파도는 남자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웅웅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터졌다. 남자의 입가에서 침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파도는 남자의 턱을 쥐고 위로 올려서, 억지로 침을 삼키며 열매를 함께 먹도록 만들었다. 계속해서 양쪽 볼을 짓누르고, 열매를 뱉지 못하도록 턱이 움직이는 걸 막으면서. 시간이 조금 흘렀다. 남자는 침을 내뱉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결국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조금씩 넘기기 시작했다. 침에 섞여 물러 터진 열매도 조각이 나 침과 함께 슬그머니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양쪽 손가락 모두 뼈가 부러졌는지 손끝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남자는 괴로운 신음을 내면서 자신을 아무 감정 없이 내려다보는 파도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저 자신이 언제 죽는지 확인하려는 그 차가운 시선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무슨 맛이 나? 나는 떫어서 별로 안 좋아해.”

남자의 입안이 거의 빈 걸 확인한 파도가 조용히 물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 위에선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남자와 대화를 할 때보단 즐거워 보이는 듯했다.

“콜록, 윽, 콜록…….”

남자가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으며 기침을 터뜨렸다. 파도는 남자의 입술이 점차 피로 물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부러진 남자의 한쪽 손목을 꽉 붙든 채. 복도에 남은 칼이 조금 신경 쓰였으나 남자를 처리한 후 돌아와서 치워도 시간이 남을 것 같았다. 파도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신음을 흘리는 남자를 질질 끌고 복도를 걸었다. 켈리가 있을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자신만의 안락한 쥐구멍에 숨어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켈리를 생각하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인이어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파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기절 직전인 남자는 숨만 겨우 내뱉으면서 독에 중독되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지치지 않고 일으키는 발작 증세. 파도는 잠시 고민하다가 인이어를 꺼내 귀에 꽂았다. 기다렸다는 듯 삼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도. 늦어서 미안하다.

“……네, 많이 늦으셨어요.”

-서천에 일이 생겼었어. 잠들었던 변종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입구로 들어오려 했다.

“그랬군요.”

파도의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럽다는 걸 느꼈는지, 삼승은 잠깐 말을 끊었다. 파도는 비상구 계단이 있는 곳으로 남자를 끌고 들어갔다. 약한 불빛 아래서, 파도는 남자의 숨이 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삼승님.”

-……네게도 무슨 일이 있었구나.

“서연우를 왜 살리려고 하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렴.

“서연우는 살리되, 켈리라도 죽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 여자……, 옛날보다 멍청해졌습니다.”

-귀도.

“겁을 상실한 건지, 아니면 눈이 어두워져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혹시 알까요, 삼승님께서도 직접 이곳에 오셔서 켈리를 보면 마음이 바뀌실지.”

-섣부르게 움직이면 안 돼, 켈리가 직접적인 증거를 흘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증거를 서연우가 먼저 캐냈을 수도 있잖아요, 삼승님……. 둘 중 누가 먼저 약점을 드러내는지 기다리는 건 너무 시간 낭비예요. 저는 더 못 기다립니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재고 서로의 뒤에 숨어서 살려고 하는 모습들, 지긋지긋해요. 오래 지켜본다고 해서 달라질 인간들이 아니에요. 그 어떤 보살핌도 필요 없는 작자들입니다.”

-진정해, 귀도. 우리 생각보다 만만치 않을 거야. 켈리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짜놨을 수도 있다. 그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청주에 맨몸으로 들어오진 않았을 거라고, 내가 널 그곳에 보내기 전에 얼마나 많이 얘기했니.

“진정하지 못하겠어요. 지금은 삼승님의 말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가 어떤 덫을 쳐놨든 저에겐 중요하지 않아요. 그 여자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살려 두자구요? 그럼 서연우는 도대체 왜 살려 두시는 건데요. 켈리보다 멍청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 이기적인 인간을……. 삼승님, 서천은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곳이 아닙니다. 삶의 기회를 주는 곳이죠. 저는 저 인간들 갱생하라고 돕는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파도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삼승에게 말했다. 삼승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삼승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내뱉고서 인이어를 빼냈다.

“제가 삼승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있었나요?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번 일은 제가 선택해야겠어요. 삼승님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게 귀도니까요. 쓸모없는 영혼은 제가 직접 거두겠습니다.”

파도는 빼낸 인이어를 바닥에 놓고 밟아 부셨다. 부서진 잔흔은 발끝으로 밀어 계단 사이로 떨어뜨렸다. 가루가 되어 흩날린 것을 확인한 후, 파도는 다시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숨이 겨우 붙어 있는 정도였다. 파도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채고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근육으로 뒤덮인 남자의 몸도 가뿐히 든 파도는 조용히 계단을 올라 복도로 빠져 나왔다. 켈리의 방은 두 번의 코너를 꺾으면 나타난다. 이 시간에 켈리의 방을 오갈 사람도 없다. 이미 켈리 주변인들이 어느 시간에 움직이는지 외우고 있던 파도에겐 두려움조차 없었다.

“켈리님이……, 너 따위한테―”

“―시끄러워. 이빨 다 빼내서 먹이기 전에 닥쳐.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니가 원하는 대로 죽게 안 놔둘 거야. 켈리 앞에서, 네가 뭘 잘못해서 나한테 이 지경까지 당했는지 일일이 설명할 거니까 잘 들어놔. 혹시 알아? 켈리가 널 기특하게 여겨서 살려라도 줄지.”

“이……, 이……!”

남자는 양쪽 손이 다 부러진 상태에서 온몸을 뒤흔들더니 고개를 꺾어 파도의 발목을 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파도의 두 발을 가져오라는 켈리의 말이 떠올랐다. 있는 힘껏 파도의 맨살을 깨물어 잇자국 그대로 피가 송송 새어 올라왔다. 그럼에도 파도는 움직임 하나 없이 가만히 서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에 남자가 발목에서 입을 떼어 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조금 알겠다……, 켈리가 널 나한테 보낸 이유.”

“으으……, 끄윽.”

“도망치려고 한 모양이야. 네가 날 붙잡아 둘 동안.”

파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린 발목을 위로 치켜들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확인한 후, 파도는 그대로 남자의 입을 짓눌렀다. 턱뼈가 으스러지면서 하관이 함몰되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파도는 두 주먹을 세게 쥔 채 남자의 이빨이 멋대로 구겨지며 피가 바닥에 고이는 걸 유심히 지켜봤다. 남자의 비명은 파도의 발에 막혀 꼼짝없이 붙들린 채 쏟아지지 못했다.

“미끼 역할은 톡톡히 했네. 미끼의 끝은 알지?”

파도는 허리를 숙여 남자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곤 품에서 작은 앰플을 꺼내 뚜껑을 열고 완전히 엉망이 된 남자의 입안에 흘러 넣었다. 끈적한 노란 진액이 남자의 목을 타고 들어갔다. 잇몸을 다 드러낸 채 숨만 꺽꺽거리던 남자의 몸은 곧 축 늘어졌다. 파도는 조금 남은 진액을 확인하고서 앰플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두 손을 턴 후 부서지거나 빠진 남자의 이를 손으로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피비린내가 주위를 감쌌다. 파도는 고개를 들었다. 켈리의 방이 있는 복도 쪽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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