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빌미
사람의 시신에 동충하초를 심은 게 켈리의 첫 성공 사례였다. 서천을 무작정 나온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던 게 원인이었다. 자신 홀로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서천에 있을 때보다 대단한 사람이 될 거란 자신감에 도취 돼 있었다. 물론 시신에서 동충하초가 자라난 결과는 하늘이 도왔다거나 운이 좋아서 된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기에 이루어 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청주에 온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도 생각했다. 자신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이들만 가득한 곳에서 고낙조 하나 잡지 못한다는 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도 흔들리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악어와 새에선 계속 재배할 수 있었던 약초들도 이곳에선 맘대로 키울 수 없으니 용병들에게 주기적으로 지급하는 약초도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저번 만남 때 열을 올리는 걸 보아선 지금 주어진 유예기간도 그리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다. 악어와 새에서 빠져나올 때 중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연우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소모했다. 그렇게 주변을 정돈하느라 결국 자신에게 남은 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은 보이지 않는 권력뿐이었다.
연우에게 전적으로 백신 제조법을 넘긴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자신만의 시간을 유지하고, 그 시간 안에 용병들에게 줄 약초를 재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눈은 끊임없이 등장했고 와중에 서천에서 보낸 귀도까지 자신의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붕어섬에서부터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켈리는 이를 악문 채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붕어섬에 실험체로 보내진 군인 중 하나가 무흠이란 걸 미리 알았다면 서천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만한 것을 만들어 냈을까. 자신이 서천에 나온 이후 얼마나 그곳이 바뀌었는지, 연락만 통해서 듣기엔 알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자헌 박사와 이루어 낸 릴리라는 성과는 자신의 지위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서천이 쉽사리 자신을 건들지 않을 거란 생각도 스스로를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백무흠이 고낙조를 노릴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 못했지?’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청주에만 도착한다면 남은 계획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순순히 풀릴 거란 생각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 무흠이 서천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 사실만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꼼짝도 못하고 있진 않을 텐데. 삼승이 얼마나 많은 서천 사람을 자신 주위에 심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삼승은 자신이 연우에게 접근할 걸 미리 예상하고 연우에게 무려 귀도를 붙였다.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연우를 구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귀도라는 걸림돌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연우를 믿을 수 없게 됐다.
연우가 자신을 그저 살기 위한 구명보트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와 자신은 비슷했으나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일일이 관찰하는 끈질긴 힘도 달랐다. 연우는 욕망만 가득 찬 항아리였다. 어디서 금이 가고, 어디서 욕망이 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자신만 꽁꽁 숨겨 두는 짓만 하고 있었다. 객관화가 덜 된 사람은 어딜 가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더군다나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실에 자만하고 있다면.
“귀도 그 년이 제일 문제야…….”
켈리는 이를 바득 씹으며 말했다. 마음이 초조해질수록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문제를 찾는다. 눈에 보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켈리도 마찬가지였다.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자신의 실수인 걸 알았지만 이제 와서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켈리는 안 좋은 습관 하나를 꺼낸다. 눈에 보일 정도로 거슬리고 자신을 방해한다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서랍 밑에 달린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아마 근처에서 떠돌고 있을 게 분명하다. 곧 가벼운 발소리가 켈리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켈리는 대답 없이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켈리와 가장 가까운 용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켈리는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후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조용히 처리할 일이 있어요.”
“성공하면 어떤 걸 주십니까.”
“원래 양보다 세 배.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주지요.”
“…….”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켈리는 약초에 대해 말할 때 효과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말하기보다 그것이 꼭 옳은 일에 쓰이는 것처럼 말했다.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 살아가다 보면 그 문장은 생각보다 빤한 거짓말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남자와 켈리의 관계에선 달랐다. 켈리는 웬만해선 자신이 만들어 낸 약초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에, 그녀가 내어 준 약 중에선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없었다. 남자는 꽤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서 입을 열었다.
“제 생각보다 급하시나 보군요.”
“이전에 봤던 낯선 여자 하나 있죠? ‘도’라는 단어가 이름에 들어간다는.”
“아.”
“너무 거슬려요. 내 주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짜증이 납니다.”
“그 정도입니까?”
“거머리처럼 떨어지질 않으니까요……. 오늘 내로 끝내준다면 좋겠어요.”
“특징 같은 건 없습니까?”
“발소리가 안 들려요. 급습 같은 건 안 통할 겁니다. 웬만하면 즉사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세요.”
남자는 켈리가 우두두 말을 쏟아 내자,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켈리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억지로 미소를 참으면서 켈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나 보죠?”
“그 여자가 뭐, 세계에서 주목하는 킬러도 아니지 않습니까. 면역자가 아니면 당장 변종에게 입이 찢기는 세상인데 답지 않게 너무 무서워하는 거 같으셔서요.”
“직접 만나면 그 생각 달라집니다.”
남자의 태도는 불량했다. 청주에 오고 난 후 생활이 안정적으로 돌아서서 그런지는 몰라도, 악어와 새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켈리를 낮잡아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켈리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욕을 꾸역꾸역 삼키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실패하면, 다음 사람에게 바로 넘길 거예요.”
“제가 실패한다고요?”
“여기서 실패한다는 건 그냥 미수가 아니라 당신이 죽는 거예요.”
“……아무리 겁을 줘 봤자 저는 똑같아요. 악어와 새에서 여기까지 켈리님 지킨 거, 사실 제가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자존심……, 하, 그래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부탁한다고요. 오늘 밤 내로. 확실하게. 증거로는……, 그 여자 머리카락과 두 발을 잘라 오세요. 그게 제일 거슬렸으니까.”
켈리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가만히 켈리 앞에 서 있다가 슬쩍 손을 켈리에게 내밀었다.
“오늘 밤 내로 처리하려면, 그걸 주셔야죠.”
“…….”
“용기 주셔야죠, 저한테.”
남자는 자연스럽게 켈리에게 속삭였다. 켈리는 차갑게 언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다가 맨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구석에 처박아 둔 작은 봉투 하나가 손에 걸렸다. 지퍼백에 담겨 있던 주사기는 총 여섯 개였다. 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사기 한 개를 꺼내고서 남자에게 말했다.
“팔 걷어 봐요.”
남자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왼팔 소매를 걷었다. 이미 멍 자국과 주사 자국이 가득한 피부가 보였다. 남아 있는 혈관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켈리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남자의 팔을 내려다보다가 옅은 혈관 하나를 찾아 바늘을 꽂아 넣었다.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잘게 웃었다.
“근데 무슨 용기를 주는 겁니까?”
남자가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켈리에게 물었다. 켈리는 빈 주사기를 쓰레기통에 넣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남자는 음침한 웃음을 내뱉으면서 방을 빠져나갔다.
귀도의 머리카락과 두 발. 눈앞을 자꾸만 스쳐 지나가는 그 길고 까만 머리카락과 소리가 나지 않는 두 발이 자신의 앞에 놓인 걸 상상했다. 켈리는 주먹을 꽉 쥐고서 의자에 앉았다.
서천과 알량한 눈치 싸움을 할 시간도 이제 없다. 자신이 세운 프로젝트가 성공을 이루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코앞에서 자신이 몇십여 년 동안 공들여 세운 이 새로운 세계를 서천의 손에는 절대 넘겨 줄 수 없다. 상대가 서천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스스로 깨우친 세상엔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켈리는 새파란 눈을 크게 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다시 그 팔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낙조는 덜렁 한 쪽만 놓인 옛 오른팔을 보면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무흠이 그 옆에 까만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 움직임이 없던 오른팔은 주머니가 놓이자마자 움찔대더니 바닥을 기어 주머니 위로 올라탔다.
“뭐가 들리나?”
“세성님은 인간의 속마음만 들리세요?”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세성님도 들을 수 있으면 세성님이 직접 하지 그러세요.”
“나는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우가 있어서 대화가 안 될 수 있으니까.”
“잘 빠져나가시네요.”
낙조는 이제 세성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산을 등반하듯 꾸역꾸역 주머니를 타고 오르는 오른팔을 내려다보는 시선엔 경멸이 가득했다. 완전히 새로 돋은 팔에 적응하고 나니 구질구질한 미련 따위도 없어졌다. 고작 몇 달이었지만 평생 괴롭힘 받던 것을 떼어 낸 것처럼 홀가분했다.
“……내 생각엔 너 안 들릴걸?”
가만히 지켜보던 세성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의 말대로 낙조의 귓가엔 그저 백색소음만이 떠돌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것이었기에, 자신과 함께 움직였기에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남남이 된 듯 분리된 듯한 기분에 적셔지니 오른팔이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조차 추측하기 힘들었다.
낙조가 아무 말 없이 오른팔만 응시하고 있자, 세성이 낙조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이러지 말고 삼승님에게 갈까.”
“예?”
곁에 있던 무흠이 반문했다. 어쩐지 그는 그가 그렇게 바라던 서천에 왔으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세성이 뒷짐을 진 채 무흠을 바라보았다. 무흠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으나 보는 눈이 많아서인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삼승님께선 그대로 얘기해 주실 수도 있으니까. 장승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누구보다 환인을 걱정하고 있는 게 삼승님이신데.”
“뵙고자 해서……, 지금 당장 뵐 수 있습니까?”
“환인의 일이라면 그렇지. 융통성이란 게 생겼으니까, 서천에도.”
세성의 말은 들을수록 모호했다. 무흠은 익숙한 듯 한숨을 눌러 참았다. 낙조는 다섯 손가락으로 어떻게든 까만 주머니의 매듭을 풀려는 오른팔을 바라보다가 문득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일부러 안 풀어 주는 거예요?”
“뭐를. 이거?”
“네.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안 풀어 주는 건 아니에요?”
낙조의 말에 세성이 조용히 웃었다. 낙조의 시선은 여전히 까만 주머니에 달라붙은 오른팔에 고정돼 있었다. 힘이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매듭을 풀려는 모습에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냄새가 워낙 역해 빠지지 않도록 무흠이 힘껏 묶어 놓은 매듭의 틈새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빠지지 않고 눈에 가득 들어찼다. 낙조는 허리를 조금 굽혀 바들바들 떨면서 매듭을 풀려는 손가락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페로몬 같은 걸 흘려서 잠든 변종을 깨울 정도로 전파력이 컸다면, 고작 주머니 하나에 막혀서 버둥거리진 않을 텐데 말이에요.”
“…….”
“다른 목적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네가 낸 결론은 뭐야?”
세성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낙조는 마른침을 삼키고 슬쩍 뼈마디만 굵직하게 남은 팔에 손을 뻗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낑낑거리던 낡은 오른팔은 손끝이 닿자마자 팔짝 뛰며 심하게 놀란 듯 보였다. 주머니에서 고꾸라졌다가, 낙조 쪽을 향해 손등을 보이고서 다 갈라진 손톱을 바닥에 세웠다. 누가 보아도 공격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낙조는 시선을 까만 주머니로 옮겼다.
“반응 보니까 얘도 살아 있을 확률이 높네요.”
낙조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매듭을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반응이 궁금한 것뿐이었다.
낙조의 손이 매듭에 닿자, 오른팔은 금세 공격 태세를 죽이고서 얌전히 기다렸다. 마치 낙조가 매듭을 풀 때까지 기다리는 듯했다. 낙조는 아주 살짝, 매듭의 틈을 벌렸다. 고약한 냄새가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오기 전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낡은 오른팔이 펄쩍 뛰더니 낙조의 손목을 붙잡았다. 다 죽어 가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억센 힘에 황급히 왼쪽 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매듭을 마저 풀려는 힘에 낙조는 아예 끈을 잡아당겨 다시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그제야 그것이 멈칫거렸다.
“제 생각으론…….”
낙조는 손목에 묻은 진액 찌꺼기들을 떼어 낸 후 입을 열었다. 세성을 돌아보자,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잡아먹으려고 한 것 같아요.”
“네 팔이, 방금 가져온 뿌리를?”
“이제 제 팔 아니에요.”
“응……, 아무튼 뿌리를 먹고 싶어 한다는 거지?”
“네. 영양분 섭취인지, 아니면 수명을 늘리려고 하는 건진 확실하지 않지만. 방금 느낀 힘으로 봤을 땐 그래요. 자기를 구하러 와 준 동료한테 저런 식으로 달려들진 않잖아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인사가 먼저지.”
낙조는 아직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세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밤이가 낙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럼 저 썩은 냄새는 뭐야?”
“모르겠어요. 변종들이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는 건 이제 다들 아는 사실인데, 사람이 맡기 힘들 정도로 역한 냄새는 처음이라서…….”
“그럼 암호라고 봐도 되는 건가?”
밤이의 말에 낙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밤이는 까만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종의 신호 같은 거지. 다른 종족은 눈치채지 못하게, 아예 먼저 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거야.”
낙조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밤이의 말이 끝날 때마다 힘없이 손끝이 움찔거리는 것이, 꼭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