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방관
켈리의 연구실은 쾌적하고 넓었다. 연우가 팀장직으로 일을 하던 곳보다 몇 배는 더. 연우와 함께 일할 연구원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통솔자가 연우임을 이미 들었는지 놀라지 않고 연우에게 인사했다. 대부분 그리 잘 아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잘 아는 얼굴이라고 해 봤자 얼굴 붉힐 일만 남았기에 연우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짐을 풀고서 간단한 회의를 했다. 켈리에게서 받은 백신 제조법은 각 연구원들에게 나눠 주고 원리를 설명했다. 켈리는 얼마나 이 시간을 기다렸을까. 언제부터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추측했을까. 연우는 오랜만에 멀끔한 모습으로 연구원들과 회의를 마친 후 곧장 제조에 들어갔다.
‘지금 이 상황이 끝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알겠어.’
켈리와 몇 번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게 된 게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닥친 현실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란 걸. 누가 얼마나 다치고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켈리는 자신의 손으로 자연이 얼마나 뒤틀릴 수 있는지, 자연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들이 자신의 미로 안에서 어리석게 말려드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타인의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나만의 것이 아닐 때라 느끼는 순간이 종종 오는데, 그게 남의 것이라면 더욱 절제할 수 없다. 사람이 성장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그 감정들이, 켈리의 손에선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켈리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일들을 거행했다.
백신을 처음 만든 게 정확히 언제일까. 아마 마이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백신이란 건 있었을지도 모른다. ‘릴리’라는 여자아이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애초에 식물교합 생체실험 자체가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
단순한 일을 계속 반복하려니 잡생각이 자꾸만 끼어들었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연구실을 휘 둘러 보았다. 각자 맡은 일에 몰두하여 말없이 빠르게 손을 놀리는 것이 보였다. 안도하고 절실했을 것이다. 이제야 온전히 안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말도 없이 기뻤겠지. 켈리가 구원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과 함께 있는 이들이 하염없이 가엾게 여겨졌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속은 편하겠구나. 하긴……, 백신만 있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
어쩐지 웃음이 났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이 우스웠다. 연우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곁에서 전달받은 메스실린더에 표기 스티커를 붙였다.
“이제 다시 팀장님이시네요.”
고요하던 실험실에서 누군가 연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연우는 순식간에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아마 식당에서 몇 번 마주쳤거나 실험실에 심부름을 하러 오가던 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겠어요.”
자신은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멀쑥한 얼굴은 기분 좋은 웃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벽에 붙은 백신 제조법을 응시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대단하세요. 다시 올라오시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하셨을 텐데.”
“…….”
“저 같았으면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워서.”
총명한 눈빛. 예의 바른 말투. 연우에게 건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 아니었다. 팀원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기에, 연우는 ‘아니야.’ 하고 대화를 잘라 내려 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대화를 끊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백무흠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도 다 백무흠 이름을 외쳤지만, 전 팀장님 이름 불렀어요. 팀장님께서 이루어낸 거잖아요.”
“……고마워.”
“팀장님 진짜 대단하신 분이신 거 다 알아요. 욕하는 사람들도 알 거예요. 자기들이 그만큼 능력이 안 되니까 그런 말 하는 거고. 신경 쓰지 마세요. 팀장님처럼 용기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맡은 몫보다 몇 배를 해내는 것도 엄청 대단한 거니까.”
왜 얘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 연우는 그가 건네주는 메스실린더를 받고 스티커를 붙이면서 갖은 생각을 했다. 연구원 가운에 달린 명찰을 보니 ‘기유현’이라 적혀 있었다. 청주에 들어온 이후론 동료들이라는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대화 자체가 연우에겐 낯간지러울 뿐이었다. 결국 유현에게 다른 일을 시키고서, 연우는 자리를 떴다. 켈리의 연구실을 당분간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한 게 몇 시간 전인데,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예상하지도 못한 이에게서 인정받으니 기분이 이상하고 울렁거렸다.
저런 말을 듣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용기 있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백무흠 훈련이 실패했을 때 돌아온 건 살벌한 욕과 폭력이었다. 훈련이 성공했을 땐 켈리가 나타났다. 자신이 이루어 낸 모든 것들은 철저히 무시 받았으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에게 바라는 것들이 많아졌다. 어쩌면 켈리가 제때 나타나 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간 자신이 흘린 노력이 불쌍해서라도 발악을 했었던 것뿐이다.
잠시 벽에 골라 심호흡을 했다. 바닥만 응시하면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웬 인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게 시야에 잡혔다. 잘못 본 것인가 싶었으나,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자신을 쫓아 왔던 파도란 여자가 기억나 연우는 겁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보안팀이라고 해 봤자 이젠 일개 연구원이 아닌 자신을 CCTV가 난무한 곳에서 해칠 일은 없을 것이다. 발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조용히 움직이던 연우는 문득 그 인영이 켈리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켈리……? 설마.’
그녀와 켈리의 관계는 쉽게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가는 건 연우가 아는 파도와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파도란 여자는 모든 걸 계획하고 계획에 있는 것만 실행에 옮기는 듯했다. 자신이 지키려는 선이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계획이라면 계획이겠지만, 모두가 눈뜨고 지켜 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일을 저지를 정도로 멍청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남자잖아.’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서서 고개만 빼꼼 내민 연우는 켈리의 방문을 어수선하게 맴도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굉장히 불안한 얼굴로 켈리의 방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켈리가 쉽게 들여보내 주지 않는 건지, 남자는 손잡이를 붙들고 무릎을 꿇었다가, 애원했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켈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 층 전체가 켈리를 위한 방이고, 모두가 근무할 시간이라 쉽게 눈에 띄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누구에게 들킨다면 곧장 잡혀갈 게 빤했다.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그를 지켜 보고 있을 때,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남자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연우는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 켈리의 방 옆에 있는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에 있는 문과 켈리의 방은 연결돼 있긴 하나, 켈리가 이 방을 이용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일주일도 더 남았습니다. 내가 일정한 양만 사용하라고 했잖아요.’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번에 주셨을 때보다 양이 훨씬 적었어요. 삼, 사흘 지나니까 바닥이 났다고요!’
남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연우는 조금 열어 둔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남자와 켈리의 대화에 집중하여 숨소리까지 죽였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요? 언제나 양은 똑같았어요. 내가 그런 걸로 실수를 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백, 백신 제조법을 공유했다고 들었어요. 그럼, 그, 그럼 우리랑, 여기 사람들도 똑같은 거잖아요. 대우를, 해 주셔야죠! 목숨, 바쳐서, 살린 게 누구, 누구입니까!’
‘조용히 해요. 누가 들으면―’
‘―빨, 빨리! 빨리 안 주면 안 나가요!’
이해하기 힘든 맥락의 대화였다. 연우는 귀를 열고서 켈리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녀가 사적으로 고용한 경호팀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헛소문이었나 하고 넘긴 적이 있었다. 켈리의 태도로 봐선 누군가에게 저 남자의 정체를 들키는 걸 무척 꺼리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나누는 거래가 있나. 지금까지 나온 내용으로 보아선 켈리의 경호원들도 백신을 이미 맞았고, 지금까진 그 특혜로 켈리를 지키는 일을 도맡아 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백신 이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켈리에게서 받는 무언가가.
곧 켈리의 한숨소리와 함께 서랍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씩씩거리는 소리도 조금 잦아들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나눠 줘야 하는 거니,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남자는 안절부절하며 말을 떨었다. 곧 그가 원하는 걸 얻었는지, 그는 앞과는 전혀 다른 충성심을 내뱉고서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문틈에 기대고 있던 연우도 몸을 앞으로 푹 숙였다. 곧 남자의 발소리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켈리 방문 닫는 소리가 들렸나?’
쉽게 나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연우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문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조차 없는 복도를 보고서, 연우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다행히 켈리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연우는 곧장 켈리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어쩐지 뒤에서 누군가 계속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한 번도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
“여기부터 서천꽃밭에 들어가는 입구네. 장승이 알려 줬겠지만, 모두 지키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웬 망자들이 달라붙어 피곤해질 수 있어.”
수풀이 우거진 산길에 서서 세성이 말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가파라 보이지 않았으나, 팔 없이 걷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낙조에겐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지운이 잘 받쳐 주고 있긴 했지만 그도 조금씩 지쳐 가는 걸 느꼈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 말 섞지 않기. 맞죠.”
여태껏 조용하던 해화가 세성의 말에 대답했다.
“용맹하네. 과연 신소미神小巫다워.”
“신소미요?”
지금까지 들은 단어 중 가장 낯선 단어였다. 세성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흠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아냐아냐. 자세한 얘기는 서천에 가서 해도 늦지 않겠어.”
세성은 일부러 무흠이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라도 주듯 비아냥거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밤이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나왔으나, 무흠이 곧장 제지했다. 그는 세성의 뒷모습을 노려 보듯 눈에 힘을 꽉 준 채 고개를 저었다. 힘의 차이가 극명히 날 땐 극복하려고 들면 안 된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아는 사람은 더더욱.
“백무흠, 이제라도 똑바로 말해. 너도 몰랐다고 발뺌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씨발 똑바로 얘기해. 저 새끼가 지금까지 씨부린 말이 도대체 뭐야. 미친 사이비에 인신매매라도 할 작정이었어? 이러려고 그동안 영웅놀이 쳐 하고 자빠진 거야?”
밤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흠에게 쏘아 댔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자세히 듣지 않으면 그저 밤이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성은 이미 저 멀리 앞질러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낙조의 귀엔 밤이의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렸다. 환청이 사라진 대신, 누가 아무리 목소리를 죽여도 낙조에겐 바로 곁에서 얘기하는 것 마냥 또렷했다.
“빨리 말하라고. 애초에 붕어섬에서부터 고낙조 잡으려고 안달복달한 거지? 어?”
“지금 상황이 역전됐다고 생각하나 본데, 주제를 좀 파악해.”
밤이가 무흠을 다그치자 무흠이 어금니를 악문 채로 읊조렸다. 밤이는 목구멍을 꽉 채우다 못해 흘러 넘치는 욕지거리를 애써 삼켜 냈다.
“니나 씨발 똑바로 해.”
“서천엔 입이 가벼운 사람은 들어가지도 못한다. 혼자 산구석에 박혀 있을 거 아니면 좀 닥쳐.”
“할 말 없으면 닥치라고 하는 게 니 래퍼토리냐? 처음부터 눈 부라리고 있는 거 맘에 안 들었어.”
“갑자기 끼어든 건 당신이지.”
“나는 고낙조가 부탁한 거거든.”
“……여기서부턴 진짜 닥쳐. 혼자 남아도 신경 안 쓸 거니까.”
“구해 달라는 말도 한 적 없어. 좆 같으니까 영웅 행세 그만 좀 해.”
서로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복화술처럼 입술만 움찔거리며 치고 받던 무흠과 밤이의 걸음이 멈춰 세워졌다. 세성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덥수룩하게 난 수풀 우거지를 손으로 파헤쳤다. 꽃밭이라고 하여 높은 산에 있을 줄 알았던 밤이는 고개를 빼 세성의 뒷모습을 보았다.
세성은 조금씩 수풀을 헤치면서 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안은 워낙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수풀이라고 해도 인영은 조금씩 보이기 마련인데, 세성은 수풀 안으로 몸을 들이자마자 그림자까지 삼켜진 듯 사라졌다. 곧이어 화상을 입은 남자도 그곳으로 들어갔다.
“뭐야. 저길 들어가?”
“…….”
무흠과 수호는 말없이 그 길을 따랐다. 주위를 둘러 보니 해화와 지운도 들어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밤이가 해화의 손목을 붙잡자, 해화는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밤이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곤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중얼거렸다.
“고낙조.”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건 낙조뿐이었다. 밤이는 낙조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의 모자에 가려 그늘이 진 낙조의 얼굴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저 어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그저 눈을 깜박이면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윽고 지운이 낙조를 다시 부축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고낙조!”
‘아직 말하면 안 돼.’
산에 오르면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가 자신을 쫓아오는 느낌. 계속해서 달려들지만 나가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낙조는 입안에 잠긴 잎의 거친 면을 혀로 쓸면서 묵묵히 앞만 응시했다. 귓가에서 여전히 웅웅대는 소리는 나고 있었으나 그것이 목소리인지 구분되진 않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세성이 해 준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낙조와 지운도 수풀 안으로 발을 디뎠다. 순식간에 사방이 캄캄해짐과 동시에 고요해졌다. 낙조는 그제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세성을 발견했다. 그는 낙조의 입술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이제 뱉어도 돼.”
낙조는 물끄러미 세성을 응시하다 그의 말대로 잎을 떨어뜨렸다. 분명 침에 범벅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잎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툭, 떨어졌다. 세성은 그것을 소매에 넣고서 수풀 밖을 응시했다. 밤이만이 모두가 모인 곳을 향해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누나.”
이윽고 말이 터져 나왔다. 낙조가 밤이를 부르기 위해 수풀 밖으로 그녀를 불렀으나, 밤이는 여전히 주위만 둘러보며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선 바깥이 보이지 않아. 스스로 의심을 거두고 들어올 때까진 못 들어오겠지.”
세성이 말을 마치자 화상을 입은 남자가 바닥에 덮인 문을 위로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