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결계
회의가 끝난 후 연우는 곧장 짐을 챙겨 켈리의 연구실로 향했다. 켈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연우를 백신 개발 담당자로 추진시켰다. 한 달을 넘게 기다린 백신 제조 공유에 대한 소식에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백신 없이 이 재앙에 버텨 봤자 죽어 나가는 건 자신들뿐이라는 걸 아는 게 분명했다.
연우가 켈리의 연구실로 들어간 걸 확인한 파도는 벽에서 등을 떼어 냈다. 모든 연구실이 그렇지만, 켈리의 연구실은 특히 보안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근처에 머무는 것조차 위험한 곳이었다. 백신 제조가 확실시된 직후니 경계가 삼엄해질 건 당연했다. 파도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방으로 들어갔다. 파손되거나 고장 난 물건들이 가득 쌓인 곳이었다.
‘서연우가 제 발로 나오진 않을 텐데.’
켈리야 워낙 자신의 방과 회의실만 오가니 그 동선을 추측하기가 쉬웠으나, 연우는 아직 그녀의 패턴을 확정할 수 없었기에 더욱 관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백신 제조가 시작됐고, 그 인력으로 연우가 동원됐다는 건 켈리와 연우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오간 게 확실했다. 연우에게 적당히 겁을 주는 건 쉬웠지만 그녀가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냥 죽여 버리면 될걸. 파도는 내심 연우를 죽일 수 있었던 많은 기회를 놓친 게 아까웠다.
사람이 아무리 드나들지 않는다고 해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도 좋지 않다. 파도는 구석진 곳을 찾아 몸을 숨긴 후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인이어 하나를 꺼냈다. 몇 번 톡톡 두드리니 일정한 전자음이 들렸다. 1초, 2초, 3초…….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도니.
삼승의 목소리가 퍽 반갑게 느껴졌다. 파도는 먼지가 가득 쌓인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서연우가 켈리에게 완전히 포섭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제 힘만으로는 서연우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기를 알고 계셨죠, 삼승님.”
-죽이지 말라고 했잖니.
“켈리와 손을 잡은 이상 서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살려 둬야 합니까?”
-내 계획을 어그러뜨리지 마라, 귀도야. 목표는 켈리다. 켈리를 먼저 물어야 곳곳에 퍼진 것들을 죽일 수 있다.
삼승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켈리와 손을 잡고 이 재앙을 계획한 이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켈리를 통해 알아내야 한다는 게 삼승의 지시였다. 연우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라는 것도 삼승이 내린 결론이었다. 파도는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조금 더 소리를 키웠다.
“켈리도 어느 정도 제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상황을 더 키우는 것밖에 더 되지 않아요, 삼승님. 서연우라도 죽여야 합니다.”
-켈리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 죽이지 않고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 그녀와 접촉한 이들을 수색하고.
“…….”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니, 귀도. 내 말 들으렴.
할 말이 없었다.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 귀도는 인이어를 짜증 섞인 손길로 빼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통화할 때마다 세계 곳곳의 IP를 무작위로 하나씩 쓰기 때문에 쉽게 추적당하진 않겠지만, 켈리가 맘만 먹는다면 잡히는 건 순식간이다. 이미 연우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이상 켈리의 시야에서 지금처럼 완벽하게 숨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삼승의 말을 거역하지도 못한다. 귀도는 분에 차 씩씩거리다가 자리를 나섰다. 다른 때보다 냉랭한 얼굴에서 살기가 어렸다.
*
신기할 정도로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낙조는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눈만 뜨고 있었다. 문밖의 소란은 간간이 찾아 들었으나, 남자는 결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신기한 건 환청이나 환각 증세도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제주에 도착할 때까진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거야. 안심하고 자도 돼. 꿈도 꾸지 않을 테니.」
세성이 방을 나가기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던 거네.’
그럼 첫 만남 때 일부러 자신을 비웃은 것도 계획 중 하나인가? 무슨 목적을 갖고?
서천에 대한 지식이 워낙 얇다 보니 그때 알아내고자 한 건 세성이 맡은 직책뿐이었다. 그가 직접 들려준 대답에도 자신은 의아함을 품었고, 결국 제대로 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논리를 재지 않고 우기기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제멋대로인 사람 앞에 서야만 솔직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럼 그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들이 사라지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도 없었다. 피는 간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나 어지럽지도 않았다. 몸에 남은 어떤 식물이 살고자 발버둥을 치는 걸까.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 것이 오히려 시원했다. 자신을 향해 부르짖으면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신은 쉽게 맑아졌다.
잠도 자지 않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시간순대로 정리하며 생각하던 낙조는, 문득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 오랫동안 있었던 탓에 갑작스럽게 스며드는 빛줄기가 낯설었다. 빛을 등지고 문을 연 이는 세성이었다. 그는 먼저 낙조보다 낙조의 주위에 뿌린 이파리들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원 안에 앉은 낙조의 낯빛도 나쁘지 않았다.
“곧 배에서 내릴 거야. 그전에 네게 줄 것이 있어.”
세성은 남자도 보지 못하도록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는 오른쪽 손으로 무언가를 움키고 있었다. 여전히 입을 떼지 못하는 낙조의 앞에, 세성은 이파리를 밟지 않은 채 쪼그려 앉았다. 고운 이목구비가 낙조와 또렷하게 마주쳤다. 세성은 곧 움킨 오른손을 낙조의 얼굴 앞에 펼쳤다.
손바닥 위엔 이름 모를 잎이 놓여 있었다. 손바닥을 펼치자마자 강한 향이 코를 찔렀다. 낙조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니, 세성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입안에 넣고 있어라. 서천에 들어갈 때까지 뱉어서도, 삼켜서도 안 돼. 무턱대고 너에게 달려들 망자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니 명심해.”
그리곤 세성은 낙조의 턱을 쥐고 아랫입술을 꾹 눌러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조금의 틈이 생기자, 그는 낙조의 입안으로 잎을 모두 구겨 넣었다. 콧속을 찌른 향이 입안에서 퍼졌다.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날려버린 두 팔의 감각은 없었지만. 세성은 다시 미소를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참 딱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세성은 굳이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 입을 움직여 무엇을 말하는 건지 묻고 싶었으나 입안에 담긴 강한 향의 잎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도 못했다. 세성은 뒷짐을 진 채 가만히 낙조를 내려다보다가 방을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팔 없이 몸을 지탱하여 일어나려니 조금 힘겨웠다. 낙조는 상체가 몇 번 엎어지려는 걸 간신히 버티고서 일어났다.
‘……언제 저렇게 됐지?’
낙조의 시선은 그를 둘러싼 이파리에 몰려 있었다. 분명 세성이 뿌렸을 당시엔 끄트머리만 살짝 그을린 이파리였는데, 세성이 다시 한번 왔다 가니 새까맣게 타 잿가루가 돼 있었다.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남았다. 가끔 인터넷에서 봤던 괴담 같은 것이 떠올랐다. 부적을 붙인다, 소금을 뿌린다, 물건을 불태운다…….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불행이 계속 찾아들면 종교가 없던 이도 신을 찾게 된다. 정답을 알기 위해서, 회피하기 위해서, 이 불운을 누군가에게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땅은 손으로도 쉽게 팔 수 있지만 하늘은 맨몸으로 파헤칠 수 없다. 무지의 영역은 인간에게 끝없는 믿음을 주었다. 볼 수 없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온다고 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무지라고 하는 것인지, 그 무지에서 시작된 믿음이 과연 존재하지 않는 걸 믿는다고 해도 되는 것인지. 사람의 믿음은 누군가의 잣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얘기랑 가장 비슷한 게 샤머니즘이야. 샤머니즘은 각국에 다른 형식으로 퍼져 있을 뿐, 맥락은 비슷해.’
‘그럼 왜 하필 서천이지? 각국의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서천에서 모여서…….’
온 신경이 서천이란 곳에 집중돼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성이 미소를 띤 채 낙조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도착했다. 이제 나와도 돼.”
세성은 대님을 묶은 바지 위, 무척 넓고 긴 소매를 가진 백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에 양태가 넓은 갓과 도포를 두른 얇은 띠, 태사혜까지 신었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드라마 속 도련님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세성은 낙조가 방에서 걸어 나오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곁에 있던 남자에게 우의를 벗으라 말했다. 남자는 당황하더니, 이내 세성의 말을 따라 우의를 벗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곳저곳에 화상 자국이 남은 얼굴은 이목구비만 겨우 보일 정도로 얼룩덜룩했다. 세성은 남자가 벗은 우의를 낙조에게 입혔다. 모자까지 푹 눌러쓰게 한 세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올라가자.”
그리고 그는 뒷짐을 진 채 계단을 올랐다. 낙조는 하얗고 고운 세성의 손을 보면서, 숨을 골랐다.
*
“고낙조, 너, 너 괜찮아?”
“피가 어떻게 멎었지? 아저씨,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말 좀 해 봐! 눈만 깜박이지 말고!”
‘손까지 없으니 뭐 설명도 못하고, 돌겠네.’
낙조가 나타나자마자 무흠을 제외한 이들이 낙조를 둘러싸고 질문을 퍼부어댔다. 말을 못하면 손으로라도 표현을 하겠다만, 팔까지 잘렸으니 도통 자신의 상태를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낙조가 난처한 얼굴로 세성을 한 번 쳐다보자, 그는 웃기만 하고서 자리를 떴다.
‘저 새끼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즐기는 듯한 웃음이었다. 절로 욕지거리가 치밀었으나 입안에서 녹지도, 흐물거리지도 않는 잎 때문에 침만 꼴딱꼴딱 넘기고 있었다.
“서천에 들어갈 때까진 입을 열지 못하니 조용히.”
그때 낙조의 뒤에서 무흠이 나타나 일행에게 말했다. 무흠의 곁엔 수호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호의 목소리는 배에 탄 이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낙조가 물끄러미 수호를 응시하자,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수호와 아슬아슬한 대화를 나눈 후 따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이틀 기절하고 깨어났을 때 빼곤. 거제도에 있을 땐 수호가 필요하다고 느끼긴 했으나 서천까지 같이 갈지는 몰랐기에 수호와 대면하는 건 더욱 서먹해졌다. 낙조 또한 길게 시선을 끌지 않았다. 수호가 시선을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돌리는 걸 지켜보다가 낙조도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말을 못해?”
밤이가 따지듯 무흠에게 물었다. 무흠은 먼저 배에서 내리는 세성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팔……, 팔이 나가떨어졌어. 회복력 문제라고 쳐도 이게 그냥 받아들일 문제냐고. 말은 왜 못하는데. 이대로 서천이란 곳에 가면 애 어떻게 될지 우리가 어떻게 믿고 가? 우리까지 사지 절단 날 줄은 누가 아냐고!”
“목소리가 너무 커. 그리고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으니 일단 내려.”
“하 씨발 돌겠네. 야, 갓 쓴 새끼야! 니 진짜 뭐하는 놈인데! 고낙조한테 뭔 짓 했어!”
여관에서부터 꾸역꾸역 참았던 울분이 마침내 터졌다. 두 팔 잘린 것도 모자라 목까지 막혀서 눈만 깜박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괜찮다는 소리가 나오는지, 밤이는 먼저 배에서 내린 세성에게 외쳤다. 무흠이 그녀의 손목을 다급히 붙잡았으나 이미 내뱉은 후였다.
세성은 뒷짐을 지고 걸어가다가 한 손으로 갓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고개를 돌렸다. 무흠은 밤이를 자신의 뒤로 황급히 숨기곤 세성과 눈을 마주했다.
“…….”
“장승이 유심히 살펴야겠네. 이제부턴 정말 위험해.”
“예.”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던 세성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보통 자신의 행동에 반발심을 보이는 이들에겐 가차 없이 역정을 내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모습이 반복되니 식은땀이 흘렀다.
“아파, 좀 놔!”
“당신 진짜 죽으려고 그래?”
“죽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당신은 도대체 뭔데. 군인이야, 사이비야? 씨발 지금 이게 장난이야? 살아 있는 실험체가 필요했던 거야? 고낙조 저 꼴 났는데도 얌전히 닥치고 있는 니새끼가 제일 나빠 이 개새끼야!”
밤이가 무흠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소리쳤다. 평소였다면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서 밤이를 진정시키려 했겠지만, 팔이 없으니 중심을 잡으며 걷는 것도 불편해진 상태에선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낙조는 지운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배에서 내리며 생각했다.
‘괜찮다고 했겠지. 안 아프다고.’
매뉴얼처럼, 입 밖으로 술술 나왔을 말이었다. 버튼을 누르면 입력된 명령어를 내뱉는 기계처럼.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은 죽지 않는다 약속하면서…….
‘괜찮아야 했으니까.’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가 뜨였다. 지운이 연신 괜찮으냐 물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엔 답이 없었다. 낙조는 완전히 땅에 두 발을 딛고 나서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늦은 오후였다. 낙조의 머리 위로 석양이 하늘에 풀어 헤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