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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23화 (123/202)

123화. 항해 (2)

의자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그저 차를 타고 몇십 분을 달린 것뿐인데도 몸이 너무나 피곤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대화도 하지 않고 곧장 잠든 모습이 보였다. 와중에 자신까지 눈을 감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눈을 아득바득 뜨고 있던 수호도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꾸벅거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배 안은 고요했다. 동이 막 틀 때인지 어슴푸레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느껴졌다. 앉아서 자려니 자기 전보다 몸이 더욱 뻑적지근했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꺾던 수호는 이내 무흠이 앉은 곳을 바라보았다. 무흠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꼿꼿하게 고개를 세운 채 미동도 없는 모습을 보니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왜 자신까지 데리고 왔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어볼 수 있는 때는 지금밖에 없다. 모두의 귀가 잠든 사이, 수호는 용기를 내어 주춤거리면서 일어났다. 무흠이 앉은 곳까지 앞으로 다가가니, 배가 한 번 크게 출렁거렸다. 허공에서 팔을 휘젓다가 무흠의 옆 의자를 콱 쥐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동시에 감겨 있던 무흠의 눈이 번득 뜨였다.

“헉미친.”

너무 놀라서 멋대로 말을 뱉은 수호는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무흠의 시선에 멋쩍게 옆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잠든 상태이니 목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물어볼 것 좀 있어서요.”

“뭐.”

“저……, 저는 왜 같이 가요?”

“…….”

“솔직히 저 개고생 하면서 하라는 거 다 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좀 아깝잖아요. 거기 통신을 다 끊고 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타라 그래서 오긴 왔는데, 뭐 그렇다고 싫은 게 아니라 무슨 생각이신지 싶어서요.”

“……빠져나갈 구멍은 있어야 하니까.”

‘빠져나가?’

수호는 의아함만 가득한 무흠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확실하게 대답해 주던 때와는 달리 들은 후에도 찝찝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가만히 무흠의 말을 곱씹어 보던 수호는 주위를 둘러보곤 다시 한번 조용히 물었다.

“뭘 빠져나가요. 지금 가는 데 원래 아저씨 잘 아는 곳 아니에요?”

“몇 년 만에 돌아가는 거라 뭔가 많이 바뀐 것 같다.”

“아까 그 우의 쓴 남자 의심하는 거예요?”

“조용.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경비가 삼엄한 걸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거기도 믿을 만한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아직까진 몰라. 내가 너무 오래 떠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니……, 그냥 내가 언제 신호를 주면, 알아서 준비해.”

“뭘, 뭘요.”

“너 혼자라도 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으라고. 만들어만 놓으면 나는 알아서 나갈 거니까.”

무흠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수호가 주위 눈치를 보면서 몸을 아무리 흔들어도 무흠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수호는 문득 어딘가 비어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담요. 소박한 짐. 낙조의 자리였다. 화장실에 간 건지 낙조는 자리에 없었다. 수호는 가만히 낙조의 자리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젓고서 자신도 눈을 감았다.

‘들어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죽어야만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스스로에게 농담처럼 던지는 생각엔 조금의 공포도 섞여 있었다.

*

“판단을 이곳까지 와서, 가는 와중에 하시겠다고요.”

낙조는 여전히 세성에게 손이 붙들린 채 말했다. 세성이 앞서 말한 것들은 그럴 법했다. 그럴 법했으나 자신을 설득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같은 인간이 누가 더 사는 게 득이 될 것인지 판가름한다는 것 자체가 무흠에게서 들었던 서천의 정체성과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말이 됩니까? 효율성이 너무나 떨어지는데요. 세성님이 안 된다고 하면, 삼승이란 분은 그걸 받아들여요? 내가 필요 없다고 판단 되면 당장 바다에 밀어 넣게요?”

바다에 밀어 넣는다고 해도 질식사할 걱정은 없다. 가습식물의 활동력은 전보다 월등해졌으니 들어간 이후 숨을 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걸리는 것은 체온이 떨어지는 것. 아무래도 남해를 가르고 가는 중이다 보니 근처에 섬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헤엄쳐 갈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았다.

“예시가 틀렸지. 너는 환자가 아니잖아.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세성은 낙조의 얼굴에 대고 웃으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그러니 더 자세히 보는 거야. 서천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그럼 세성님도 틀렸습니다. 저는 삼승님이 직접 부른 사람이니, 세성님이 그걸 판단할 필요가 없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허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야?”

“삼승님이 세성님보다 높은 분이라면 그분의 말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전에 나는 내 일을 하는 거고.”

‘이 새끼 사회생활 나보다 안 했나.’

낙조는 바득바득 고집을 부리는 세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얼마나 버릇없이 자랐기에 같은 서천 사람인데도 이리 분위기가 다른지. 낙조 스스로도 사회성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세성은 자신보다 더한 놈이었다. 권위적인데다가 고집불통. 어쨌든 자신의 손을 거쳐야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낙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삼승님 허락은 받으셨어요?”

이런 사람에겐 돌직구가 좋다. 원래도 없던 사회생활을 쥐어짜려니 조금 힘에 부쳤다. 아이를 달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드는 분류의 사람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이나 주위의 누군가를, 혹은 동물을 따라 하는 행동을 보인다. 그 과정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일상이 되면서 낯선 것을 대면했을 때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움직인다. 대상이 누구냐,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건 천천히 상황을 꾸며 가며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세성은 어른이다. 일단 어려 보여도 나이가 찼을 테니 삼승 밑의 권한을 쥐고 있을 게 당연하다. 이유 없이 서천의 권력을 남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서천에 있는 걸 보면. 무흠이 설명한 서천의 이미지와는 아주 달랐으나, 비슷하진 않아도 켈리라는 인물이 십몇 년간 모두를 속이고 지냈던 행적을 생각하면 이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

세성은 대답이 없었다. 당연히 못 한다.

‘그런데 그만큼의 머리도 안 굴러가면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았다고?’

이 부분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처음부터 자신을 압박하듯 이야기의 물꼬를 터뜨린 세성은 어딘가 심히 결핍된 사람 같았다. 궁금하다며 멋대로 자신을 부른 것부터, 심방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끄럽게 늘어놓는 걸 보면 사고를 한두 번 치고 다니진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결국 그가 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잘 가려냈겠지. 결과가 어찌 됐든 좋았으니 그를 대치할 만한 사람을 찾으려는 노력도 안 했을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단체라도 한 번 금이 간 곳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면 둑처럼 터지는 건 순식간이다. 켈리가 빠져나간 이후 서천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기에 맘대로 사람을 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만.

“서천에 어울릴 수 있는 조건 같은 게 있습니까?”

“엄청 많지! 사람을 살리는 곳이니 생명을 가볍게 보는 사람을 절대 안 되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들어오려고 해서도 안 돼. 입이 가벼워도 안 되고 너무 동정심이 많아서도 안 돼.”

“그렇게 말고, 보편적으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런 게 있잖아요. 뭘 하는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성님도 그 일을 잘한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서천의 비밀이야. 아직 입장 허락도 안 받은 너에게 얘기해 줄 순 없어.”

있지도 않은 미운 사촌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낙조는 포기하고서 가볍게 세성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럼 그냥 궁금해서 불렀다는 말이죠?”

“응. 생각보다 별 거 없네~”

“가 볼게요.”

“근데 잘못하면 잡아먹힌다. 만약 네가 먹힌 후 서천에서 난리가 나면, 너 때문인 거야.”

세성은 물정 모르는 척 눈을 빛내고서 낙조에게 충고 같은 말을 한 마디 남겼다. 은근히, 가 아니라 대놓고 면전에 저주를 퍼붓는 것만큼 기분이 나빴다. 낙조는 방을 나와 등 뒤로 문을 닫은 후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해가 조금씩 뜨고 있었다. 모두 제자리에 있었고, 잠들었는지 숨소리만 가득했다. 낙조는 널브러진 담요와 짐을 챙겨 아래로 다시 내려왔다. 평상처럼 뻗은 마루에 누워 담요를 덮으니 그나마 머리가 덜 어지러웠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가위라도 눌릴 것 같은 기분에 쉽사리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제주도에선 무당을 심방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어. 그럼 서천의 간부들은 거의 그쪽인가…….’

고통에서 해방해 지옥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던 그 영혼들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는 듯했다. 낙조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눈을 감았다. 우의를 쓴 남자는 조용히 낙조의 웅크린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연우는 거울로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켈리와 약속한 날의 해가 떴다. 일찍이 자료는 모두 정리해 두었고, 켈리 앞에서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다시 깔보는 인간들은 없어질 것이다.

켈리와 둘이서 만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자신의 명예에 달린 큰일을 위해 켈리의 앞에 서는 건 처음이었다. 연우는 입술을 다물고서 켈리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라고 한 시간에 딱 맞추어 가는 게 좋다. 켈리는 약속을 정말 칼처럼 여기는 사람이니까. 코너를 꺾어 다시 긴 복도를 가로지를 때였다.

“서연우 씨.”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웬만한 사람들의 목소리라면 듣지도 못하고 지나칠 게 빤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단번에 연우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목소리의 주인은 연우의 뒤쪽에 있었다. 미친 듯이 켈리의 방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자신을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연우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여자였다. 아름답지만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아우르던 사람. 연우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아직도 몰랐다. 그냥 오지랖이 이상한 쪽으로 넓은 사람이겠지, 싶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본부 안에는 워낙 많이 깔렸으니 그중 하나일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실까요?”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요.”

“누가 모이라고 했죠?”

“그걸 왜 물어보세요?”

“아침 먹을 시간도 아니잖아요. 회의는 대부분 식사 후 이뤄지니까요.”

“짧게 보고서 드리러 가는 길이에요. 바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연우 씨.”

“왜 자꾸 불러요!”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되지 않는 건,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머릿속에 울려 퍼지듯 계속해서 자신의 곁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환청처럼 계속되는 울림에 연우는 목소리를 세웠다. 이른 시간이었기에 복도는 조용했고, 누군가 이 소란을 들어 복도로 나올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켈리의 방으로 향하는 자신의 동선도 들통 날 게 빤했다. 연우는 주먹을 꽉 쥔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생기 없는 얼굴로 묵묵히 연우만 응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대화를 하려면 소속이랑 이름 정도는 밝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부터 자꾸 따라와서 이상한 말이나 하고. 어디서 뭐하는 사람이에요? 뭘 하길래 이 시간부터 남 뒤나 쫓고 다니냐구요!”

“음……, 알아내서 뭐 하시게요. 징계 소집회 열 권한이 아직 남았나요?”

“쫓아오지 말라구요!”

“보안 1팀에서 근무하는 파도라고 합니다. 지금 시간은 제 근무 시간입니다. 서연우 씨가 사용하는 연구실은 이쪽이 아닌데, 뛰어가시는 걸 보고 쫓아온 거예요.”

“나는 팀장……, 아니, 연구원이잖아요. 사방천지가 다 연구실이에요. 나는 이제 뛰기만 해도 의심받아야 해요?”

“휴……, 이렇게까지 미친년을 왜 살려 두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서연우 씨, 사람 목숨은 공공재가 아닙니다. 당신이 사용하고 싶다고 해서 원할 때마다 생명 갖고 장난치는 거. 다 업보로 돌아와요. 의심받는 게 싫으시면 되도록 눈에 띄지 마세요. 제 눈에 자꾸 띄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요. 누가 알까요,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힘이 당신이 가진 힘보다 더 클지.”

귓구멍에 못이 박히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쪼개지고 갈라져서 연우의 머릿속을 조각냈다. 생각과 생각이 연결된 틈을 무자비하게 잘랐고 그것도 모자라 머릿속을 손으로 쥘 수도 없을 만큼 작은 모래로 가득 채워 잡다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연우는 파도가 처음에 내뱉었던 말을 듣고서 왈칵 소리를 지르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점차 입을 다물게 됐다.

“조상신이 덕을 많이 쌓으셨나 봐요. 여기서 죽어 나가도 모르는 척할 사람만 태반일 텐데. 애써 살려 두라고 하시는 거면 나중에 당신을 이용할 필요가 있는 거겠죠.”

“…….”

“당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착각, 차마 못 버리겠지만 살고 싶으면 버리세요. 아니면 내가 당신 손발을 다 부러뜨린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피를 질식할 때까지 당신 입에 부어 버릴 테니까.”

파도의 표정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마지막 문장까지 내뱉은 다음, 허리를 살짝 펴고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연우는 그때까지도 내뱉지 않고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잔기침을 터뜨리다가 제자리에 주저앉은 연우는 문득 품이 허전하다는 걸 느꼈다.

“……이, 이, 미친년이…….”

가져갔다. 켈리에게 보여 주려 했던 자신의 보고서. 이 재앙의 시초가 어디서부터 이어져 지금까지 왔는지, 모두 정렬해 둔 자료들이 파도의 손에 넘어갔다. 연우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켈리와의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단 3분. 머릿속에 남은 기억들로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파도가 연우에게 내놓은 조언 같은 건 이미 휘발된 후였다. 연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켈리의 방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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