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망자 (2)
죽음을 거스를 수 있다 해도 낙조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죽음과 동시에 자신을 미미하게라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의 기억에서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기억의 형체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런 생각도 했다. 죽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두 분 모두 같은 곳에 계시겠지. 스스로 죽게 된다면 천국엔 갈 수 없다는데, 그럼 죽어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건가. 종교는 없었으나 언젠가 들었던 얘기를 생각하며 옷걸이를 매만지고 커튼에 괜히 매듭을 묶어 보기도 했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엔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 반드시 있겠지, 삶과 이어지는 길이 있으리라 믿었던 게 문제였다. 부모님의 장례식이 끝난 후엔 허공에 대고 엄마, 아빠, 하고 불러 보기도 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낙조만이 지키는 집에선 사람의 온기가 조금씩 떠나갔다. 차가워진 방바닥에 볼을 기대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졌고 반나절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거부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완전히 통제당했을 때였다.
부모님은 남겨진 자신에게 못다 한 말이 있었을까?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방법이야 많았다만 당시의 낙조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선은 항상 비슷했고 도움의 손길 또한 부담스러웠다. 외로워지는 만큼 사람이 고파지는 이도 있겠으나 낙조는 달랐다. 외로움에 좀먹혀 스스로를 파먹어 가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마음 편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일상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말 것. 혹여 자신의 이름이 날카로운 칼끝이 될까 봐 인생사는 좀처럼 밝히지 않았다.
대부업에서 잠시 일을 했던 몇 년 동안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렸을 땐 키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고등학생 때부터 갑자기 성장했다. 군복무 시절엔 내내 운동만 하다 보니 그저 건강하기만 했던 몸은 날렵해지면서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무얼 시키든 말대답 한 번 하지 않고 꾸역꾸역 일을 했던 게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형의 눈에 들게끔 만들었다. 그의 제안을 낙조는 거절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에 깡패처럼 집을 찾아가 물건을 부수고, 사람을 때리는 짓 같은 건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하게 된 지 반 년 쯤 됐을까, 새로운 막내가 들어왔다. 서글서글 잘 웃고 말솜씨도 좋은 아이였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임에 눈치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빨랐다. 곤란할 수도 있는 사회생활을, 막내는 부스럼 없이 섞이며 모든 이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그만큼 열심히 하기도 했다. 막시안을 봤을 때 느꼈던 기시감은 이 기억에서 터져 나왔다. 성실하고 근면하며 옳은 일을 판가름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왜’ 이 일을 할까. 그 호기심이 원인이었다.
대학은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그 동생도 낙조와 비슷하게 자신의 과거를 잘 털어놓지 않는 유형이었다. 하루는 막내를 데리고 밀린 이자를 받기 위해 체납자의 동네에 갔다. 체납자는 검사였는데, 급하게 필요하다는 돈이 있다며 한두 번 연락한 사이를 갖고 업체 대표를 협박해 개인 돈을 뜯어 갔다. 처음 2개월까진 돈이 잘 들어오다가, 3개월 때부터 연락이 안 되기 시작했다. 대표는 낙조를 시켜 막내에게 현장의 이것저것을 알려 주라며 등을 떠밀었다.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다니냐?」
「아, 불편하셨습니까?」
「아니아니……, 이 일이 그만큼 재밌나 싶어서.」
전문 상담원까지 갖춘 대부업체도 많지만, 업체를 등록하지 않고 높은 이자율을 붙여 불법으로 대부업을 운영하는 곳도 많다. 낙조가 일하던 곳은 후자였다. 낙조는 체납자의 동네로 가는 도중 막내에게 말을 붙였다.
「저는, 사실, 선배님이 저 별로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왜?」
「말을 잘 안 하시길래…….」
「그냥 말이 없는 거야.」
「아, 역시 그러셨군요!」
뭐야 그 반응은. 낙조는 운전대를 잡은 채 힐끗 막내를 바라봤다가 차를 서서히 멈춰 세웠다. 검사의 집은 부자들의 동네로 유명한 곳에 있었다. 으리으리한 담벼락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물리적으로 소동을 피우거나 협박을 하는 건 안 그래도 법조계 사람이니 골치 아파질 수가 있어 집 앞에서 무작정 진을 치고 있었다. 노을이 질 때였나, 검은색 승용차 여러 대가 낙조의 차 쪽으로 길게 늘어서더니, 딱 봐도 주먹 꽤나 쓰겠다 싶은 녀석들이 우르르 내렸다.
「선배님, 이거…….」
「너 여기 문 잠그고 수그리고 있어. 찍 소리도 내지 말고.」
그래. 상대는 법조계 사람이었다. 법을 교묘하게 잘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문제였다. 낙조는 막내가 상체를 숙이는 걸 확인하고서 차에서 내렸다. 의심이라도 살까 봐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는데. 결국 맞더라도 몇 명은 눕혀야 상황이 그나마 풀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욕을 섞어 가며 겁을 주던 녀석들도 낙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손을 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맞았지만 낙조는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머리가 빙빙 돌고 어디에서 터졌는지 모를 피가 얼굴과 셔츠를 흠뻑 적셨으나 정신만은 온전했다. 딱히 아끼면서 키운 몸은 아니었으나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게 조금은 다행이었다. 녀석들 중 몇 명은 완전히 뻗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낙조는 피가 섞인 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숨을 헉헉거리며 낙조를 노려보다가 체납자의 담벼락을 한 번 세게 걷어차고 차로 돌아갔다. 그제야 낙조도 막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막내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꾹 박은 채 숨도 못 쉬고 울고 있었다.
「왜 우냐……, 대표님한텐 내가 말할 거니까 괜찮아.」
팅팅 부은 눈으로 운전을 하자니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돌아가는 와중에도 끅끅거리던 막내는 사무실 주차장까지 오고 나서야 말했다. 사실 아버지가 사업 경영 중 파산 위기에 놓였는데, 어떻게든 세우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 쓰다가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고. 집엔 할머니도 계시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찾아오니 걱정이 돼 자신이 직접 대표를 찾아와 일하면서 기본월급과 성과금을 모두 아버지가 빌린 돈에서 까겠다고 했다.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으나 높은 이자율 때문에 원금이 어마어마하게 불은 상황이었다. 낙조는 운전석을 뒤로 젖히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막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시는 오지 마라. 웬만하면 이사 가거나 다른 데서 불편하더라도 좀 살고. 니 서류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막내가 울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내일 뵙겠습니다, 라고 하자마자 낙조가 말했다. 벙찐 막내가 ‘예?’ 하고 되묻자, 낙조는 몸을 일으켜 조수석 문을 닫아 버렸다. 막내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쥐어 터진 채 사무실로 돌아간 다음 날, 대표에게도 죽기 직전까지 맞은 낙조는 자신의 월급과 막내의 빚까지 청산했다. 끝까지 사직서를 쓰진 않았다. 낙조만큼 일을 빨리 처리하는 이를 구하기도 힘들었기에 대표는 돈을 받고서 남자들끼리 깨끗하게 풀자며 낙조의 등을 두드리고 웃었다.
무리를 떠나는 방법도 생각했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붙잡힐 게 빤했다. 서천이라는 곳이 자신을 그냥 놓아두지 않을 테다. 그러나 서천이 정말 변종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넋을 지옥으로 보내는 이유 하나로 자신을 찾는 걸까? 서천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많지 않았기에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무흠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왜 이리도 옛날 생각이 날까. 누가 자신의 기억을 통째로 뒤흔든 것 마냥 머리가 울렸다. 메슥거리는 속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게워 내고 싶었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던 낙조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잔인해진다는 범주 안에는 꼭 살생한다는 것만이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짓밟은 후에도 죄책감에 젖지 않는 것. 정확한 이유 없이 타인을 괴롭히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약자를 응시하며 방관하는 것, 또는 약자의 목소리를 이기적이라 여기는 것. 법으로 규정되지 않았기에 암묵적으로 이행했던 행동들은 점차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에 바빠졌고 자신의 삶이 힘겨워지면 그 이유는 무조건 타인의 탓이 됐다.
살려고 한 짓인데, 왜 죄인이 돼요.
신평에서 만났던 동식이라는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상황은 역전되기도 하고 몰락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선 뭔들 못하겠냐만, 낙조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꿈을 꾸던 사람이라 동식이 내세운 이유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겐 보잘 것 없는 소신이라 할지라도 낙조에겐 지금까지의 삶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것을 지탱하고 있던 신뢰가 무너지고 나니, 어디서부터 다시 자신을 다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구를 또 믿을 때까진 시간이 걸리고 만남에는 이별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세상에서 보기 좋은 이별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또 얼마나 깎아야 할지, 깎아야 할 때가 왔는데 내어 줄 마음이 부족하면 어떡할까. 유일하게 회복력이 느린 곳은 마음이었다. 벌어지는 일마다 겪는 스트레스, 자괴감 같은 것은 언뜻 보면 비슷하더라도 회복하기까지의 시간이 저마다 다르다.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항상 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지금까지 책임져 온 삶에서 낙조는 일을 만들고 도망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나도 바뀌어야 하나, 라는 생각에 잠긴 적도 있었다. 뒤바뀐 세상에선 상대가 공격하지 않아도 먼저 공격하는 게 정당방위였다.
생존한다는 건 그런 식이었다.
‘이놈 수명은 얼마나 될까.’
낙조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인간에게도 수명이 있듯 식물도 마찬가지다. 물론 영양분을 제공하는 자신의 삶이 끝나면 몸에 깃든 모든 식물도 함께 죽을 수 있겠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만약 낙조 자신 또한 바이러스의 변이로 인해 식물과의 융합에 성공한 거라면 타인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도 존재했다.
어디에 가든 자신은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붙잡으려는 손길을 뿌리치는 것도 지쳤다. 선택해야만 한다면, 이 지긋지긋한 세상의 끝을 확신시켜 줄 곳에 서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고 지켜낼 생각은 진작 버렸다.
이 세상을 죽여야겠다.
폐허 깊은 곳에 원한을 심고 망자가 되자.
잠시뿐인 행복이라도 영원처럼 안고 죽을 것이니.
*
무흠은 평소보다 사뭇 다른 얼굴로 통신방에 들어왔다. 수호의 식사를 건네고선 그는 바로 잠시 방에서 나가 달라 부탁했다. 이전에 전화했던 곳으로 연락을 취하려는 모양이었다. 수호는 별 말 없이 자리를 떴다. 흡연자였으면 그냥 창문 열고 멍이나 때릴 텐데. 통신방을 벗어나면 딱히 할 일이 없어 바닥만 밑창으로 슥슥 끌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밤이와 지운은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아주 보통의 대화도 나눴다. 무흠은 밤이와 지운에게 서천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수호는 무흠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나 어찌 됐든 일행이 된 이들에게까지 숨기려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해화도 차도를 보였다. 무흠의 말로는 이제 겨우 눈을 떴지만,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한다고 했다. 어디서 그런 명약을 구해 오는 걸까. 지금까지 수호에게 서천이란 공간은 그저 사이비 집단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무흠이 치료를 맡은 낙조와 해화 모두 반시체 상태에서 살려내니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해화와 지운은 남매라고 했다. 지운은 무흠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걸음을 돌렸다. 무흠이 스쳐 지나가는 말로 해화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곧장 장소를 바꾼다고 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요?」
「여기는 누가 지켜.」
「아니 혼자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서천 사람들이 올 거다. 너에 대해서도 대충 얘기해 뒀으니 굶어 죽지는 않을 거니 염려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나만 두고 가냐구요!」
「네 무기는 여기에 있잖아.」
무흠은 그렇게 말하면서 수호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쓰다듬었다. 할 말이 없었다. 무흠의 말대로 자신은 머리 쓰는 일밖에 하지 못했고, 그걸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수호가 이들 중 가장 믿는 자도 무흠이었다. 미운 정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 그렇게 오랫동안 들쑤셨던 낙조 일행보다 곁에서 죽어가는 걸 지켜봤던 무흠의 말에 더욱 신뢰가 갔다.
여관으로 건너가던 중, 수호는 지운이 여관 문 앞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소리를 죽인다고 하긴 했으나 인기척을 이미 느꼈는지 지운이 먼저 뒤를 돌아봤다.
“좀 쉬셨어요?”
“아아, 네…….”
전날 험악했던 분위기를 기억하는지 지운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건넬 말이라도 찾고 싶었으나 수호에겐 마이쮸나 담배 같은 것도―극과 극의 아이템이지만―없었다. 수호는 조금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고 서서 입을 열었다.
“홍해화 씨 의식 차렸다는 거 들었어요?”
“네.”
“그……, 백무흠 믿어도 돼요. 적어도 사람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아서.”
“둘이 어떻게 친해졌어요?”
‘이게 친한 건가?’
수호는 지운의 질문에 잠시 멈칫거렸다가 어떤 대답이 가장 지운에게 편하게 들릴지 생각했다. 지운이 무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불편했던 이틀 전을 떠올려 보면 그리 긍정적인 평가는 아닌 듯했다. 그래도 너무 오래 뜸을 들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청주에 있을 때……, 서연우한테서 백무흠 실험, 아니, 고문이었죠 거의. 그걸 봤거든요. 왜 저렇게까지 살려고 하나 싶어서 좀 알아봤어요. 정보실 권한으로. 그랬더니 5년 전 기록이 나오더라구요. 아시겠지만. 탈출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드리려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럼 왜 말도 없이 아저씨 데려간 거래요?”
지운이 아마도 무흠에게 직접 묻고 싶었던 말일 테다. 수호는 조금 더 가까이 지운에게 다가간 채 숨을 골랐다. 지운의 얼굴은 청주에 있을 때 오래 봤던 터라 자신에겐 그나마 익숙했으나 지운에겐 자신이 아직 낯설기 그지없을 테니, 대화를 정중하게 이어 가려면 선을 지켜야 했다. 낙조가 통신방에 다녀간 이후 수호는 낙조보다 그의 일행들과 먼저 가까워지기로 선택했다. 생각보다 낙조는 말랑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저도 잠깐 다쳤어서……, 기억나는 건, 고낙조 씨 처음 봤을 때 상태가 엄청 안 좋아 보였다는 거 정도? 그리고 백무흠도 좀 급해 보였고. 한 달 동안 치료만 한 걸 보면 웬만한 상처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가 왜 다쳤는지는 말했어요?”
“……아뇨. 백무흠이 말해 주지도 않았거든요.”
걸렸다. 지운은 공허한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 중에, 친구가 있었어요. 물을 뜨러 산에 갔다가 나무가 비명을 지르는 걸 들었대요. 내려와서 보니까 허리에 상처가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약을 살 수가 없어서……, 방치하고 있었던 거죠. 아저씨가 그 산에 다시 가 보자고 해서 갔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그러다가 땅속으로 사라졌어요. 지진이 난 것처럼 산이 통째로 흔들리고, 움직이는 길을 따라가 보니까 나뭇가지에 묶인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거예요. 발견했을 때 친구는 죽지는 않고 있었지만 죽은 것처럼 보였어요. 변종의 말을 하고, 나뭇잎처럼 몸이 둥실둥실…….”
자신이 알고 있던 일행이 전부가 아니었나? 수호는 친구가 있었다는 지운의 말에 잠시 의문을 품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나무가 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는 청주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상처는 둘째 치고 다시 산에 갔을 때 땅속으로 꺼졌다는 것과 나뭇가지에 묶였다는 시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상황의 신고라면 워낙 인상이 강하게 남아 기억을 못 했을 리 없다.
‘어디였는지 물어볼까.’
그러나 당장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지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수호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기보다, 그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 순간을 회상하는 듯, 가끔 입이 멈칫거릴 때도 있었다.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처음 털어놓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 번에 이해하기엔 뒤죽박죽인 말이었다. 수호는 슬그머니 지운의 곁에 앉았다.
“아저씨가 다른 산이라고 괜찮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다른 산에 가자고 했어요. 그때 할머니 만나러 나만 잠깐 대피소에 들어갔었어요. 나왔는데, 기다리고 있겠다던 사람들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아침이 될 때쯤이었나, 아저씨랑 밤이 누나만 돌아오더라구요. 우리 누나가……, 그, 친구처럼, 사라졌대요. 산에서. 같이 가서 아무리 찾아봤는데도 못 찾았어요.”
지운은 거기까지 얘기하고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마 해화의 실종 이후로 일이 벌어졌나 보지. 수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가 정면을 조용히 응시했다. 차마 지운을 독촉할 수 없었다.
“……그러다 알게 된 게 있는데, 산을 덮은 흙은 껍데기고, 흙 아래에 우리가 모르는 물질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지진처럼 산이 흔들릴 때마다 길이 바뀌었거든요. 큐브 있잖아요. 그거 맞출 때처럼 일부분만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산 전체가 바이러스 천지라고 해도 그게 말이 돼요? 애초에 지구 땅도 몇 세기에 걸쳐 나뉜 건데, 그게 몇 시간 만에 되냐구요.”
“산이……, 길을 바꿨다고요?”
귀를 의심하게 할 만한 말이었다. 수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지운에게 확신을 구했다. 지운은 또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제안을 했어요. 가져온 차를 터뜨려서 산불을 내자고.”
지운은 그리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말들 사이에는 고통뿐이었던 시간이 함축돼 있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고 지운은 말하면서 조금 뜸을 들였다. 비가 온 이후부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렷한 정신에 남은 기억은 빈집에 들어가 낙조와 해화를 눕혔다는 것, 그리고 며칠 동안 일어나지 않는 그들 옆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저 겉으로만 들어도 입을 함부로 열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운과 밤이가 왜 이곳에 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제자리를 잊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사방을 둘러싼 것이 천적뿐인 세상에서 고립됐다는 사실이 얼마나 견디기 혹독했을까. 수호는 재앙의 날이 시작됐던 새벽부터 지금까지 줄곧 누군가와 함께 있었기에 지운이 겪었을 시간을 멋대로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를 당장 위로해 줄 만한 말도 찾을 수 없었다. 옅은 한숨 쉬는 것도 지운에겐 공격적인 태도처럼 보일까 싶어 입을 억지로 꾹 닫아야 했다.
‘그럼……, 켈리를 만난 후 있었던 일 같은데. 거기선 어떻게 도망쳤지.’
그럼에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건 수호의 머리였다. 황망했다. 가슴으론 지운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선 ‘악어와 새’에 머물렀던 시간만 비어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수호는 엄지손톱을 까딱거리며 씹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저, 하고 입을 틔웠다.
“그, 악어와 새 관리하던 여자……, 있잖아요. 제가 탈출했던 날에, 서연우가 그 여자에 대한 프로필을 갖고 온 적이 있어요. 켈리 화이트, 그 여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든 정보를 알려 달라고 했어요. 말 안 해도 대충 알 것 같았어요. 그 여자가 청주로 오고 있구나.”
수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생기 없던 두 눈동자가 또렷하게 수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켈리가……, 청주에 있어요?”
“……확실하진 않아요. 서연우가 갑자기 그 여자 프로필을 갖고 온 것도 이상했고, 그렇게 다급해 보이는 건 처음 봐서 추측한 건데…….”
수호는 엉겁결에 말을 토해 냈다. 지운은 무슨 생각에 빠진 듯 잠시 시선을 옆으로 비켜 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수호도 덩달아 일어나니, 지운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가 수호에게 물었다.
“아저씨……, 지금 어디 있어요?”
“오늘 밖에 나온 걸 못 봤으니 아마 방에―”
또. 지운은 수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당탕, 먼지 쌓인 바닥에 미끄러져 한 번 중심을 잃은 지운은 넘어지기 직전 계단의 손잡이를 잡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수호는 혹여 이 소동을 밤이가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잔뜩 죽인 채 지운의 이름을 부르며 쫓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서? 송밤이보다 고낙조를 왜 먼저 찾지?
지운이 들려준 이야기로만 모든 정황을 파악하기엔 아직 맞춰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서, 수호는 이를 악물고 지운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