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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16화 (116/202)

116화. 공공의 적

섣불리 켈리를 찾아가는 건 의도가 빤히 보일 듯해 억지로 식사시간이 끝날 때까지 참았다. 미지근한 물로 목만 겨우 축인 연우는 식당에서 돌아오는 이들의 발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켈리에게서 들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다. 자신이 켈리에게 할 질문도 하나밖에 없다. 그녀가 일부러 쳐 둔 덫이라고 해도 대답은 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덫의 목적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정말 자신을 완벽히 이곳에서 추방 시키고 싶은 건지, 아니면 완전히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기 위함인지 판가름해야 했다.

켈리의 일기를 옮겨 쓰지 않아도 모든 문장이 머리에 박힌 것처럼 또렷했다. 연우는 모니터를 끄고서 일어났다. 켈리의 방으로 가기까지 누군가가 말을 건 것도 같았으나 연우의 발걸음은 급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방문을 노크할 때는 손이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켈리는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특유의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연우의 이름을 듣자마자 들어오라 말했다.

“잠을 못 잤나요?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네요.”

“네, 생각할 게 많아져서…….”

“막힌 부분이 있나요?”

“아뇨, 이제는 다 알 것 같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짚고 가고 싶어서요. 제가 이런 걸 못 참는 성격이라.”

“그래야죠. 물건을 다룰 때도 신중해야 하는데, 이 거창한 생명을 관찰하는 데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겠어요.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는 법도 없고. 그래서 뭐가 알고 싶어서 왔을까……. 내가 한 번 맞춰 볼까요?”

일부러 뜸을 들이는 거다. 연우는 즉각 알아차렸다. 연우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우연일 수 없어요. 처음부터 일부러 그런 거죠.”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여러 의미로요.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했던 거, 신에 대한 얘기한 거, 당신만이 볼 수 있는 문서들을 넘겨 준 거.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된 것까지, 전부 다요.”

“서연우 씨는 그럼 우주의 시작도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생명이 탄생하면서 동시에 갖게 되는 먹이사슬의 힘 그런 것들 다……. 사실 박테리아 사이에서 나타난 돌연변이가 햇빛을 맞아도 죽지 않게 되면서부터 ‘눈’이란 기관이 생겨난 것도 우연일까요? 왜 돌연변이가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 그걸 ‘진화’라고 부를까요. 왜 모든 생명체는 영원할 수 없을까요.”

“그럼 그런 게 다 계획된 증거라는 건 어디 있나요? 정말 신이라는 게 있으면 곤란해져요. 인간의 나약함은 믿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냈어요. 인간이란 게 지구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계속 무언가를 숭배해 왔다구요. 시대에 맞게 종교의 힘은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어요. 이런 세세한 것까지 다 계획된 거라구요? 신이 그만큼 한가해요?”

“신은 서연우 씨 같은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나는 신을 모시는 게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신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신을 인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신은 우리처럼 모르는 걸 실험하고 탐구하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지 않아요. 이미 신은 알고 있죠.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계획할 수 있는 겁니다.”

연우의 입이 다물렸다. 정작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 차단당했다. 켈리는 연우를 오랫동안 봐오진 않았으나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켈리 스스로가 얘기했던 것처럼 켈리와 연우는 마트료시카 인형 같은 존재들이다. 연우가 무슨 욕망에 가장 잘 휩쓸리고, 무슨 힘에 이끌리는지, 무엇을 가장 탐내는지는 켈리가 가장 잘 알았다. 어떤 방식으로 연우를 건드려야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건 약점을 공격하는 게 아니다. 연우가 자신의 힘에 기생하도록 자신의 틈을 내주는 것과 다름없다.

“자헌 박사는 살아 있나요?”

한참 말이 없던 연우가 켈리에게 물었다. 예상한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궁금하겠지. 그 사람도 이 재앙에 참여했는지, 혹시 주동자는 아닐지.

그래서 결국 얻어 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할 것이다.

“그게 서연우 씨가 푸는 문제에 꼭 필요한 질문인가요?”

켈리의 연극은 바람을 타고 순항 중이었다. 자신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연우에겐 몇 초에서 몇 분까지 고민하는 시간을 벌고, 연우가 어렵사리 대답한 말은 항상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켈리에겐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일방적인 켈리의 연극이었다. 연우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켈리는 그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두 손을 한 곳으로 모아 깍지를 낀 후 측은하게 말을 덧붙였다.

“서연우 씨가 내 앞에서 증명할 사실에는 필요하진 않죠? 그건 개인적인 호기심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호기심은 직접 알아보는 게 서연우 씨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서연우 씨를 가르치려 들려고 그런 중요한 얘기를 했겠어요. 이런 부분은 서연우 씨가 생각을 좀 해봐요. 내가 다 떠다 먹여 줄 순 없잖아. 다 큰 어른이, 자기의 할 일 정도는 알아서 해야겠죠?”

연우의 눈빛이 사납게 뒤바뀌는 걸 보면서, 켈리는 흐뭇해졌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 다른 것도 아닌 상대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을 조금만 휘저어도 곧장 감정을 토해 낸다. 관찰자는 그저 즐거울 뿐이다. 자신의 계획대로, 아무런 변수 없이 순항하는 이 상황 자체를 즐긴다.

“그리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고 친다면, 신은 인간에게 우호적일 수 없다는 걸 생각하세요. 세상에 그리도 많은 생명체가 있는데, 무슨 이유로 인간을 예뻐할 것 같나요? 나는 신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은 직접 겪어 보지 않는 이상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하기에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하죠. 내가 말한 것. 신에 ‘가까운’ 사람. 신처럼 모든 것을 계획하여 일을 진행하는 것. 내 일이 그겁니다.”

자신을 추앙하라, 존경하라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아도 연우는 자신의 말에 깊숙이 파고들 것이다. 자신의 말에 결함은 없는지, 자신의 위치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혹은 이것을 역사에 새겨질 수 있는 순간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너무나도 빤하기에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켈리는 연우가 아무 말도 않고서 있다가 ‘알았다’ 라는 대답만 남긴 후 방을 나간 걸 지켜봤다. 이대로만 간다면 연우는 영락없이 알고도 제 덫에 걸려 주는 방패가 되어 줄 테다. 연우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 또한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켈리는 연우가 닫고 나간 문을 응시하고 있다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나랑 너무나 비슷해서……, 틈을 벌리긴 쉽지만 벌릴수록 불쾌하군.’

연우에게 꿀 같은 말을 흘리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엄청나면서도 쉽게 주저앉는, 아직은 어리고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화부터 내는 성격. 하나라도 엇나갔다간 자신이 그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켈리는 가만히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연우가 자헌 박사에 대해 묻자마자 머리를 핑 돌게 할 만큼 어지러이 떠도는 생각들은 아직도 자신을 옥죄고 있었다.

‘나도……, 저 애처럼 자헌 박사에게 꿰뚫리듯이 보였나.’

마이 연구소에서 만난 자헌 박사는 평소엔 항상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의 보조로 연구에 참여하게 됐지만, 서천에서 훔쳐 온 약초 몇 가지로 자헌 박사와 켈리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숨겼던 자신의 계획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를 신뢰했고 자신의 꿈을 쉽게 이뤄 줄 든든한 조력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이용했던 거지.’

믿고 싶지 않고, 지금까지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결론이 다시 머릿속을 헤집었다. 켈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뒤져 알약 여러 개를 입안에 쏟아 넣었다. 물도 없이 그것을 씹고, 넘기면서 심호흡을 했다.

더 이상 자신은 그런 추잡한 장난에 놀아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생각을 여러 번 자신에게 되새기고 덧입히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

무흠은 낙조의 질문을 듣고서 그를 방에 다시 가두었다. 남은 이들에게 아침을 주고 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낙조는 피 냄새가 가득한 자신의 방에 앉아 다시 생각했다. 죄책감에 떠밀려 주저앉기보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정보가 사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오른팔은 이제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닌 걸까? 새벽에 있었던 일로 낙조는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팔뚝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손톱으로 긁기도 했다. 빨간 자국이 곧장 남았고, 통각도 여전했다. 부상의 반복 때문인지 통각에 무뎌지긴 했으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전과 같았다.

다른 변종의 낌새를 먼저 눈치채게 해 준 건 오른팔이 맞다. 냄새를 맡은 것처럼 반응을 보였고, 자신을 공격하는 변종에게는 망설임도 없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꿀꺽꿀꺽 잘도 삼켜 댔다. 자신의 감정을 따라 하듯 상황마다 적재적소의 무기를 낙조에게 쥐어 주기도 했다.

그간 오른팔이 자신을 속여 온 것이라면? 자신의 몸에 완전히 기생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속이고, 죽지 않을 만큼만 힘을 ‘빌려’ 준 것이라면. 게다가 무흠의 말로는 자신의 모든 신체기관에 각기 다른 식물이 엉겨 붙어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식물들도 오른팔처럼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낙조는 껍데기와 알맹이를 모두 잃은 자가 된다. 처음 봤던 변종과 다를 바 없다.

‘그분이 누구지. 누군지 알고 바로 알아봤던 거야?’

가시지 않는 의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발광 구체와 닿자마자 변종의 비명이 아닌, 본래 자신의 목소리로 죽음을 애걸하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분’이 오셨다고 말했다.

그분. 지옥. 고통.

공통적으로 나열됐던 단어들을 떠올렸다. 단어만 조합해 봤을 때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었다. 고통에서 구제하여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자.

‘저승사자?’

낙조는 무심코 저승사자를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식물과 근접하게 관련된 연결고리도 없다. 다시 도돌이표였다.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자……, 그 문장에 포커스를 맞춘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 낙조의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드니 무흠이 낙조의 아침을 챙겨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낙조의 맞은편에 앉아 낙조가 가져온 뿌리를 다시 바라봤다가, 아침을 성의 없이 툭 건네곤 입을 열었다.

“그 여자의 흔적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왜 들었어.”

“시작을 알 수 있으니까……, 시작을 알면 끝도 알 수 있겠죠.”

무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흐리멍덩했던 낙조의 초점은 아주 또렷해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두가 잠든 사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었으나 순서를 지켜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지금 낙조의 상태는 조금의 입김만 불어도 금세 산 하나를 다 태울 만큼 커질 수 있는 불씨와 같았다.

무흠은 낙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하는 건지 모를 우유부단한 선택들과 그로써 이어진 상황에서도 낙조에겐 성장하는 모습이 없었다. 무덤덤했던 얼굴에서 조금씩 감정이 표출될 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어땠기에 죽음 하나하나에 쉽게 무너지는지……. 뒤바뀐 세상을 오래 버티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천에서도 나를 필요로 합니까?”

무흠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낙조가 한 번 더 질문했다.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지 않는 시간이 왔다. 무흠은 순순히 대답하기로 했다.

“그래.”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겁니까?”

“그건 아니다. 운이 좋았지. 붕어섬에서 서천과 마지막 무전을 쳤을 때 네가 목표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중사님이 청주에 간 거네요. 하, 맞네. 빼앗기면 안 되니까.”

낙조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도 오래 가진 못했다. 낙조의 얼굴에 여전히 남은 핏자국은 선명했다. 낙조는 안경을 벗고서 눈을 감은 채 눈꺼풀을 문질렀다. 할 말이 태산처럼 쌓였는데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무흠에게 따진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이 있을까? 저절로 끼워 맞춰지는 실수들이 생기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울분을 토해 낸다고 자신의 마음을 달래 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장승이라고 했잖아요. 서천을 지키다가 왜……, 군인으로 위장했어요? 피마자 실험 명단에 분명 있었잖아요.”

“서천에선 장승이었고, 사람들 사이에선 군인이었지. 켈리의 행방을 찾던 중 서천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이미 붕어섬 연구소엔 서천 사람 하나가 숨어들어 있었지. 처음 붕어섬에 갔을 때 박사 하나는 자살했고, 하나는 못 찾았던 거 기억하나? 그 하나가 서천 사람이다. 없어진 걸 보곤, 서천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다.”

“생체실험을 스스로 당하러 붕어섬에 갔다는 말이에요?”

“서천엔 몸속에 항체를 만들어 내는 약초가 있었으니 죽을 일은 없었다. 피마자 실험에 성공한 결과가 나 하나뿐인 이유도 그렇고. 인간에게 식물을 심는 기술은 서천 사람들만 아는 일이다. 외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니, 당연히 도망친 켈리와 그 추종자들일 거라고 판단했지. 어떻게든 흔적을 찾아야 더 큰 일을 막을 수 있으니까.”

낙조는 서늘한 얼굴로 무흠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평소처럼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농담 섞인 말을 얹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입을 먼저 열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낙조는 아주 느리게 입을 뗐다.

“그럼, 서천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도 몸에 식물이 담긴 사람도 있습니까?”

“없다. 기술만 개발했을 뿐, 정말 모두에게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서천에, 사람의 영혼……, 아니, 그런 비슷한 의식 같은 걸, 지옥으로 보내는 자가 있습니까?”

둘이서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침묵이 중간중간 이어졌다. 무흠은 낙조의 질문에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낙조가 가져온 뿌리에게로. 낙조와 마찬가지로 피와 알 수 없는 진액 덩어리가 군데군데 묻은 뿌리는 이미 숨이 끊겼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만약 변종의 몸에서 뽑아낸 것이라면 일반 사람 몸에 달린 식물의 뿌리는 아닐 게 분명했다. 낙조가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진 적도 없었기 때문에, 무흠은 대답할 말을 조금 더 고민했다.

“한 번은 네가 먼저 대답해야지.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지?”

“대답하세요, 중사님. 고통받느니 지옥으로 가겠다는 이들을 안내하는 자가 서천에 있냐구요.”

낙조는 완강했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시선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 이야기는 웬만하면 나중에 하고 싶었는데.’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리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미루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무흠은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낙조는 조용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침묵임을 알았다.

“있긴 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었단 거죠.”

“…….”

“그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혹시 접니까?”

정확히 과녁의 정중앙을 맞춘 질문이었다. 무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엔 무흠이 내세운 긍정의 침묵이었다. 낙조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전처럼 낙조의 기분을 대충이라도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 일부러 말하지 않고, 숨기려 드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네가 대답할 차례다.”

무흠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서천의 명을 받든 이상, 낙조를 이곳에서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거운 죄도 없었다.

“그래서, 도망칠 생각이냐?”

못을 박는다. 빼앗길 수 없다. 놓아 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방관하지도 못한다.

무흠에겐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게 평생의 원수고 천적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무슨 방법이든 해낼 것이다.

생명을 살려야만 지켜낼 수 있는 서천. 서천을 지켜 내려면 낙조가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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