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마이 리틀 선샤인
“키르르륵, 킥? 켁!”
눈동자는 없었지만 낙조는 그 구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챘다. 구체가 한 번씩 뒤집힐 때마다 걸쭉한 소리가 울렸다.
‘본체가 이거 하나인 건가? 이것만 해도 큰데…….’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서 변종이 쫓아오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도망가지 않는다면 곧장 잡아 먹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무력화에는 죽지 않을 자신이 얼마든지 있었으나, 변종의 공격을 어느 정도까지 감내할 수 있을진 모른다. 낙조는 몇 번이고 구체가 깜박이는 순간에 수많은 생각을 했다.
‘따돌리기만 하자.’
무흠이 말한 대로 자신의 신체기관 모든 곳이 업그레이드된 거라면, 거대한 크기만큼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을 찾아 숨는 게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낙조는 속으로 셋을 세는 동시에 앞쪽으로 뛰었다. 앞길에 무엇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멍이 들든 넘어지든 앞으로 가야 했다. 뒤쪽은 여관과 이어지는 길밖에 없었기에.
최대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저것을 떼어 놓을 수 있을까? 소리라곤 자신과 저 변종만, 아니, 근처에서 웅크리고 있을지 모를 다른 변종들을 깨우는 건 아닐까? 발을 뗌과 동시에 그런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움직인 이상 달려야 했다. 낙조는 숨을 한 번 들이킴과 동시에 쏟아지는 생각에 휩싸였다.
구구궁, 쿵.
크레인으로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 무게가 나가는 것이 움직이면, 땅에서 전해지는 진동은 당연히 크다. 낙조는 한 번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동시에 발에 무언가가 걸려 앞으로 크게 넘어졌다.
“아, 씹, 진짜……!”
속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참담한 울음기를 내뱉었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움직이는 동안에는 몇 초에 한 번씩 깜박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려면 알아야 했다. 낙조는 자동차 타이어와 비슷한 감촉의 물건을 매만지면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뒤를 살짝 훔쳐보았다.
쿵.
깜박.
발광체는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나마 눈앞에서 마주쳤을 때보다는 거리가 조금 벌어져 있었기에 발광체를 둘러싼 것이 무엇인지 대충은 보였다.
“…….”
늘어진 살가죽. 덧대고 덧입혀서 빈틈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찬 살덩어리. 이전에도 본 적 있는 변종이다. 보고 지나친 것도 아니고, 홀린 것처럼 스스로 기어 들어가서 죽을 수도 있었던 덫이었다. 변종을 불러일으키는 변종. 변종의 덫.
“아니야, 아니라고……, 정신 차려, 고낙조, 이 개새끼야!”
그때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낙조는 튕겨 올라가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붙잡고 다시 앞으로 뛰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른 신체기관에도 기생식물이 붙었는데, 왜 오른팔만이 자신의 의지를 꺾을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저 발광체에 먹혀도 상관없다는 듯,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요동치는 것이……, 정말 발광체가 자신에게 평온히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외계인 손 증후군.
언젠가 들었던 신경 질환 이름이 떠오른다. 사람의 의지와는 다르게 목적을 갖고 멋대로 움직이는 한쪽 손. 한 번씩 마음이 맞아 들었던 적은 있었으나 그게 필요할 때마다 발현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려는 의도가 가득한 상태로 자신에게 덤볐던 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이 증후군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좌반구와 우반구를 연결하는 뇌량에 문제가 생겼을 시 뇌량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서로가 소통하는 데에 문제가 생기는 게 가장 크다. 물론 이 증후군에 걸린 건 아니지만, 식물이 신체기관에 붙으면서 뇌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잖아!”
앞으로 계속해서 뻗어 나가려는 오른팔을 붙잡고 있다가,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 스스로를 구석까지 몰아세우며 발광체와 눈을 마주했다. 바닥에서 지글지글 끓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고열의 분노가 손바닥 위로 솟고 있었다.
만약, 이후 시간이 지나 완전히 식물에게 존속된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아니니까. 아직 몸은 자신의 것이었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무의식 한 조각도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확실했다. 지금은 낙조가 발산하는 힘이 더욱 컸다. 마침내 손으로 움킬 수 없을 정도로 꾸덕한 덩어리가 가득 차올랐다고 느껴졌을 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자신의 손바닥이 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어졌을 때. 낙조는 발광 구체에게 손바닥 안에 있던 것을 힘껏 흩뿌렸다.
타다다닥, 칙, 치이익, 칙-
“키아아아아악!”
“으아악!”
“아아아악!”
“으아앙―”
발광체에 거미줄을 치듯 달라붙은 끈끈한 진액은 곧장 구체의 일부분을 순식간에 태우기 시작했다. 구체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던 살가죽들 사이에서 저마다 크기와 모양, 색깔이 다른 입이 튀어나와 아우성을 질렀다. 나이와 성별을 구별할 것 없이 각각의 입에선 고통에 가득 찬 비명만이 흘러나왔다.
‘그 덩어리랑 비슷해…….’
낙조는 쉬지도 않고 깜박거리는 발광 구체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회복했다고 해도 이제 막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몸이라 평소보다 에너지 소모가 큰 느낌이었다.
‘무리로 움직이던 변종이 한꺼번에 식물에게 잡혔을 리는 없고, 사람 하나에 달라붙어서 다른 변종들을 하나둘씩 잡았을 확률이 높아.’
거리가 꽤 멀어졌다 싶었을 즈음 다른 건물에 숨어 타들어 가는 발광 구체를 바라보던 낙조는 숨을 돌렸다. 순간의 위험은 모면했으나, 저 정도 가지고선 완전히 죽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 처음 저 구체와 비슷한 살덩어리 변종을 만났을 때 모조리 흡수해 버리자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멍청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내 오른팔이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돼. 변종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알아 챌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거야.’
오른손 손바닥에서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혹여 이 냄새를 따라오지 않을까 싶어 낙조는 황급히 바람에 차갑게 식은 문고리를 붙잡고 손바닥을 식혔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따가운 고통이 즉각 올라왔으나 참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냄새가 멎었을 때 움직일 생각이었다. 낙조는 복도에 놓인 공용화장실 문고리와 계단 난간을 번갈아 가며 붙잡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발광 구체가 내뿜는 비명도 조금씩 멎어가고 있었다. 조금 녹긴 했어도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된다는 거다.
손바닥은 이미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신평 파출소에서 폭약을 터뜨렸던 때만큼 손바닥은 너덜너덜해졌다. 이 상태에서 뭔가를 더 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낙조는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다잡았다.
가능하다. 여기까지 와서 목숨 하나 던지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모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낙조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낙조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내지른 실수이니 처리해야만 했다. 던진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었다. 죽어도 괜찮다, 라는 생각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그것을 넘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삶의 목적이 한 생 내내 같을 순 없다. 곁에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쓰기로 생각했던 처음과는 달랐다. 낙조는 쿵, 쿵, 느리게 바닥을 찧으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무게를 느끼면서 오른손 손목을 붙잡았다.
나를 지켜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
날이 밝는 대로 켈리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우는 글자만 빼곡하게 들어찬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고 연우는 분 단위로 시간이 바뀔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물어봐? 말도 못하는 애를 데려다가 실험을 한 사람이야. 뭘 어떻게 물어볼 건데.’
‘보면 안 될 거였으면 애초에 권한을 넘겨 주지 말아야 했던 거 아니야? 함정 수사라도 할 작정이었나? 숙제 비슷한 문제를 내주고 정답지를 몰래 껴서 준 거랑 뭐가 달라. 그래놓고 해설문 몰래 봤냐면서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누가 알아. 그냥 내가 알아서 걸려들기를 기다린 거 아니냐고.’
‘기다렸다……, 정말 기다린 거일 수도 있잖아. 나한테 다 알려 주려고. 뭐가 어떻게, 왜,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여자뿐만이 아니라 이 지옥을 설계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결국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 알고 있을 수 있잖아? 거기에……, 그 라인업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거지. 켈리 이름 아래, 아니, 어쩌면 더 위일 수도 있어. 내가 잘한다면, 내가 고낙조보다 더 대단한 걸 만들어 낸다면…….’
잠이 부족해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면서 연우는 생각했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남은 문서를 모조리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커서가 서서히 눈동자를 따라 움직이고, 첫 번째 문서 창이 닫혔다. 연우는 가만히 나열된 문서들을 보다가 용량이 제일 큰 문서를 열었다. 시간은 첫 문서보다 2년 정도가 더 흐른 상태였다.
[1998년 11월 11일
릴리가 완벽한 문장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릴리를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은 아이가 자신들의 말을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학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점심을 먹을 때 자헌 박사는 그들이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다며 역정을 냈다. 틀림없이 보모가 자신들 몰래 릴리를 교육했을 것이라 자부했다. 자헌 박사가 릴리의 보모를 못마땅해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식당 같은 장소에서 크게 소리를 친 건 처음이라 듣는 내가 민망할 따름이었다.]
2년 정도가 흘렀다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거나 그 나이를 지났을 때일 테다. 아무리 말이 느리더라도 이미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단어를 안다면 문장을 말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몇 번을 읽어도 자헌 박사는 과민반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우는 커서를 내리면서 자헌 박사의 이름을 곱씹었다. 이전에 자신이 봤던 논문을 쓴 사람의 이름인지, 한 번이라도 학술에 거쳤던 이름인지는 모르나 계속해서 그 이름을 읽으니 어쩐지 한 번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자헌 박사는 나를 데리고 릴리의 방으로 향했다. 릴리는 자헌 박사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게 됐다. 작년 겨울에 있었던 실험 이후로 릴리는 자헌 박사가 찾아올 때마다 전처럼 인사하지 않는다. 작년 겨울 실험엔 내가 보조로 들어가지 않아 자세히 정황은 알지 못하지만, 아만다에게 전해 듣기론 릴리에게 주사하던 중 마취가 풀렸다고 했다. 수술대의 감촉이 익숙할 줄 알았는데 릴리는 처음 물을 밟은 새끼 동물처럼 겁을 잔뜩 먹었다고 했다. 자헌 박사는 마스크에 안경, 수술 모자와 수술복 차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으며 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물론 그땐 말은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상태였긴 했으나 아이가 알 리 없는 욕을 했다는 게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저 자헌 박사의 보조가 된 게 자랑스러워 아만다가 나에게 허풍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만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나는 릴리의 반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모는 자헌 박사가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가자 황급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릴리는 그런 보모의 앞에 서서 자헌 박사를 노려보았다. 항상 맑게 빛나던 릴리의 눈빛이 그때만큼은 무시무시했다. 서천에서 새 삼승과 첫 대화를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고작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내뿜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자신이 보지 않은 몇 개의 문서 사이에 실험은 꾸준히 이어진 모양이었다. 와중에 마취가 풀리는 사고가 있었고, 그날이 릴리에게 트라우마 비슷한 기억으로 낙인찍힌 것은 틀림없었다. 릴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연구소 안에서 정해진 룰 위반이니 자헌 박사는 그 탓을 보모에게 돌린 듯했다.
[자헌 박사는 릴리와 한참 말없이 마주보고 있다가 보모를 끌어냈다. 릴리가 자헌 박사의 손목을 깨물며 막았지만 자헌 박사는 릴리를 떼어 내고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곤 나에게 문고리를 꽉 잡아 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헌 박사는 릴리의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는 보모를 짐승처럼 끌고 갔다. 방문 안에선 릴리가 보모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불쌍하긴 했으나 문을 열어 주진 않았다. 아무리 연구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릴리를 예뻐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버릇이 없어지는 건 곤란하다. 자헌 박사를 비롯한 다른 박사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실험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순간 릴리가 받는 대우는 순식간에 뒤바뀔 것이다. 아이가 그 정도까지 수를 생각하진 못하겠지만.]
연우는 그 문장까지 읽고 스크롤의 길이를 확인했다. 반 정도 읽은 듯, 스크롤은 중앙에 멈춰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보고서가 아닌 만큼 켈리의 개인적인 생각도 이전 문서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연우는 꼭 켈리가 곁에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스크롤을 내렸다.
[1998년 12월 25일]
“……날짜가 왜 안 나뉘어 있지?”
몇 줄이 공백으로 띄어져 있다 싶더니, 갑자기 한 달이 지나 있었다. 연우는 혹시 몰라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다음 문서를 열었으나 릴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릴리라는 이름은 그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연우는 황급히 읽고 있던 문서를 다시 열었다. 식은땀이 난 손 때문에 스크롤을 내리던 휠이 미끄러졌다.
투두둑.
크리스마스 당일. 연우는 단숨에 그날에 도착했다.
[릴리의 영양분을 주사로 채운 지 한 달이 됐다. 보모가 사라진 이후 아이는 보모가 어디로 갔는지 대답해 주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헌 박사는 그녀를 끌고 간 날 이후 나에게 보모에 대해 말 한 마디 없었다. 나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자헌 박사는 릴리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험을 일찍 끝내야겠다는 말이었다. 이곳이 워낙 잘 맞았던 나에겐 뜻밖의 소식이었지만, 자헌 박사는 예정된 실험에 나를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자헌 박사는 릴리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다며 박사들과 함께 수술실을 풍선으로 가득 채웠다. 조금 삼엄한 분위기였던 수술실은 빨간색과 초록색 풍선으로 금세 뒤덮였다. 오히려 풍선을 불던 박사들과 연구생들이 더 좋아했다. 저녁 영양분을 모두 맞은 릴리를 데려온 아만다는 아이의 뒤에 서서 눈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자헌 박사는 등 뒤로 큰 곰 인형을 들고 있었다. 인형은 릴리에게 차고 넘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저걸 선택했을까? 내 의문은 릴리의 눈을 감기고 있던 아만다의 두 손이 떠나면서 즉시 풀렸다.
릴리의 몸에 큰 용량의 액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박혀 있던 바늘을 통해, 아만다는 끝없이 약을 투여했고 자헌 박사가 그 틈에 릴리에게 인형을 내밀었다. 릴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인형을 받아들었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박사들이 “릴리,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연구생들이 뒤에서 박수를 쳤다. 릴리는 가만히 서서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꼭 기억하려는 것처럼. 내가 보기엔 그랬다.
30초도 되지 않아 릴리는 기절했다. 자헌 박사는 직접 릴리를 안아 수술대 위에 올렸다. 그제야 풍선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혈침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일주일마다 피를 뽑는 건 박사들의 일정 중 하나이긴 했으나 기다란 줄에 연결된 커다란 통이 신경 쓰였다. 릴리의 키와 덩치에 맞게 뽑는 피의 양도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통은 너무나도 컸다.
모든 게 순식간에 진행됐다. 자헌 박사는 릴리의 몸에 찬 피를 모조리 빼냈다. 피를 빼내는 데에만 몇 시간이 소요됐는지 모른다. 릴리의 피에선 쇠 냄새보다 단내와 풀내음이 뒤섞인 향이 수술실에 퍼졌다. 자헌 박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피가 빠진 릴리의 몸을 한참 바라봤다. 꽃과 열매, 이파리는 금세 시들었다. 박사들은 말없이 그것들을 모두 뽑아낸 후 연구생들을 수술실 밖으로 내보냈다. 릴리의 피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아이의 껍데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들었을 뿐이다. 수술실을 나가기 전, 자헌 박사가 릴리의 푹 꺼진 얼굴에 대고 속삭인 말을.]
연우는 마지막 문장을 조용히 읊었다.
“스윗 드림, 마이 리틀 선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