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13화 (113/202)

113화. 최초와 태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후폭풍이 거셌다. 해화는 겉으로 보기엔 그리 차도가 없었다. 무흠은 일주일 동안은 가둬 놓은 변종의 뿌리를 먹여 봐야겠다고 말했다. 죽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죽으면 영양분이 소실되니까.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여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른 변종의 낌새는 없었다. 하나만 겨우 깨어난 걸까.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의아한 점이 싹 낫는 건 아니었다. 밤이와 지운이 하룻밤 사이에 기운이 날 리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만 남겨 두고 주변 순찰을 도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수호의 입이야 잠시 다물리게 한 것뿐, 그도 그만의 계획을 세우면 또 균열이 일어난다.

부모님의 장례식, 보리 누나와의 절연. 낙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은 그 두 개였다. 단 두 개였지만 그 이후 사람과 엮일 땐 어떻게 해서든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평화로운 선택을 골랐다. 하기 싫어도, 상대가 미워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주변의 관심이 다 타들어 간 심지 마냥 꺼지는 게 소원이었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관심은 없었다.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감정을 소모하는 것도 자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삶을 살다가 어떻게든 죽는 것. 단출한 삶의 목표는 완전히 망가졌지만,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다는 습관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제는 성격이 돼 버린 건지, 아니면 습관이 딱딱하게 굳은 건진 알 수 없지만 버리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바꿀 수 없다는 건 알았다.

‘밤이 누나는 알고 있었겠지.’

혈관에 뿌리를 내렸을까, 아니면 뼈를 감쌌을까. 몸안에 있다는 식물들도 해화처럼 자신의 피를 영양분으로 착각하는 걸까. 어째서 그 모든 식물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아등바등일까. 살고 싶어서? 이딴 식으로라도 살기를 원하나? 낙조의 머릿속은 순서를 막론하고 떠오르는 대로 자리를 뒤바꾸며 복잡하게 얽혔다.

‘왜 말 안 해 줬을까.’

무흠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알아갈 것들이 태산이었으니. 서천은 정말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건지, 비밀로 구성된 단체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도 남들과 같은지. 무흠은 애초부터 자신을 알고 접근한 것까지. 처음부터 되짚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모든 곳에 달라붙어 있다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있긴 한가.’

아직 자신의 의사로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뇌는 무사한 게 아닌가. 낙조는 괜히 머리카락을 감싸쥐어 봤다가 다시 손을 풀었다.

“변종이랑 다를 게 없네.”

낙조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버석거리는 느낌이 날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목소리였다.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서 베개만 끌어와 맨바닥에 몸을 눕혔다.

뇌까지 잡아 먹힌다면, 눈을 깜박이고 숨만 쉴 뿐, 식물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 그게 변종과 다른 점이 있나. 아무리 다른 신체기관이 기생식물에 의해 발달했다고 해도 의식마저 빼앗기면 말이 달라진다.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세력조차 모두 총구를 겨누기에 바쁘겠지. 생존력이 끈질기다 해도 모든 생명체에겐 천적이 있기 마련이다. 같은 약이라도 누군가에겐 특효가 있을 수 있으나 다른 누구에겐 독약과도 같을 수 있다.

어찌저찌 살아왔다고 해서 자신이 병도 얻지 않고, 죽지도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켈리의 실험이 만약 성공적으로 이어졌다면 자신은 ‘악어와 새’에서 꼼짝없이 켈리의 용병이 되어 있을 게 빤했다.

‘그 의지도 나만의 것이 아닐 수 있을까?’

켈리의 명령을 거역하고 난 후에야 자신의 힘을 쓰는 법을 깨우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흠의 말을 듣고 나니 그마저도 온전히 자신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어졌다.

하나씩 스스로 알았다고 생각하면, 그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실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다. 환희도 잠시뿐이다. 기쁨에 질색하는 불완전한 감정이 옹기종기 모여 한 번에 마음을 무저갱까지 떨어뜨린다. 다시는 기어 올라오지 못하도록, 희망 한 줄기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아주 작은 빈틈마저 막는다.

우울에 휩쓸려 다니며 스스로를 갉아 먹는 패턴에도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쩌면 그동안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닌, 그저 어쩌다 주어진 힘에 자만하여 살았던 건 아닐까. 노력 없이 얻은 힘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계속 그 힘을 가질 권한이 있나? 정의보단 환경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다.

힘을 쓸 줄 알아도 어디에 쓰는지는 모른다는 켈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낙조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 봤다. 절로 돋아나는 핏줄은 붉기도 하고 파랗기도 했다. 언뜻 보면 녹색인 것 같기도 했다. 왼손 손가락으로 불거진 핏줄을 꾹꾹 눌러 보다가 그마저도 그만 두었다.

“……바람이나 쐬자.”

낙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무흠은 낙조의 방을 잠그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복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낙조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꿈치를 든 채 계단을 내려왔다. 썰렁하다 못해 살갗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맞서 여관을 나왔다.

‘나는 이번 겨울을 넘길 수 있을까.’

무흠은 해화가 겨울나기를 위한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 자신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식물은 겨울나기를 하지 않는 걸까. 무엇을 원해서 자신의 몸에 이렇게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을까. 자신의 몸인데도 묻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몰려드는 무력감을 이기는 방법은 없었다.

낙조는 천천히 변종을 발견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변종이 나왔던 건물엔 후문이 있었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정도의 좁은 통로로 이어진. 낙조는 조용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잡아 놓은 놈의 뿌리로도 일주일은 해화에게 먹일 수 있겠지만, 분명 그 하나만 깨어나진 않았을 테다. 일찍이 눈을 뜬 놈이라고 해도 몇 놈은 더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까지 본 놈들은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지만, 겨울에 움직이는 녀석들은 다를 수도 있었다. 낙조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서 주변을 맴돌았다. 빛이라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전부였다. 당장 눈앞이 캄캄했기에 주변 건물의 벽이나 자동차 같은 것을 매만지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아침을 기다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또 없을 것이다.

“키륵, 키르르륵, 킥…….”

건물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낙조는 조금 먼 곳에서 소리가 난 것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보지 않았으나 소리가 난 방향 쪽으로 걸음을 돌리는 건 쉬웠다. 그나마 비슷한 소리를 생각해 보자면, 야생동물이 잠들었을 때 내는 소리와 같았다.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 숨기려 했으나 워낙 적막함이 가득한 거리였기에 완전히 소리를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위치만 대충 파악하자.’

오른손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변종이라는 건 확실했다. 낙조는 아주 느리게 걸음을 떼어 거리를 가로질렀다. 곧 전봇대 하나를 건너니 공용주차장에서 쓰이는 펜스가 붙잡혔다. 하도 찬바람을 맞아 덩달아 얼어 버린 펜스를 붙잡고 있던 낙조는 좀전에 들었던 숨소리가 많이 가까워진 걸 알아 챘다.

“키르르륵, 큭, 크륵, 크르르…….”

그러고 보니 변종이 잠든 걸 본 적이 있었나. 낙조는 걸음을 떼기 전 생각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손은 반응하고 있었지만 변종이 자신의 기척을 느끼진 못한 것 같았다. 진액을 머금지도 않는 걸 보니 이전에 봤던 변종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낙조는 잔뜩 긴장한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빛이 없어도 변종과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오른손의 떨림이었다. 점차 낙조의 뜻과는 달리 움찔거리는 강도가 심해지자, 낙조는 걸음을 멈추었다. 20초 정도에 한 번씩 들리는 변종의 소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낙조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나름 천천히 셌다고 생각했는데, 20이 넘어가도록 변종의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알아챘나?’

낙조가 펜스를 붙잡고 단 한 걸음만 앞으로 뗄 때였다.

번쩍.

2미터에 육박할 정도의 지름을 가진 동그란 구체가 빛을 발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굳어 있던 낙조는 그 구체가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닫혔다가 다시 열리는 걸 보고서 뒤로 다시 물러났다.

‘씨발……, 발광 변종이다.’

*

잠들 시간도 부족했다. 연우는 쉼 없이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한참 두드렸다. 조금만 더 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조금’이 채워지지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을 찾는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애초에 백신을 만들 줄 알았고, 갖고 있었으면……, 이 실험도 처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어디서 시작된 거지? 중국에 있었다고 했으니까 중국인가?’

길이 막혀 막막해하던 도중, 켈리가 일시적으로 빌려 준 아이디가 생각났다. 온통 영어와 러시아어, 중국어 등 외국어로 가득 찬 문서들이었으나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영어와 중국어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에 읽을 수 있는 문서 제목부터 찾기 시작했다.

“……아니다, 파일 생성 순으로 확인하는 게 빠르겠어.”

연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난잡한 파일을 생성된 날짜순으로 바꾸었다. 워낙 문서가 많아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30초도 되지 않아 문서들은 말끔히 정렬됐다.

“처음엔 거의 숫자네.”

연년도, 월, 일을 순차적으로 배열한 건가 싶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믿을 건 ‘문서가 생성된 날짜’밖에 없었다. 연우는 가장 먼저 생성된 문서를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죄다 영어였다. 연우는 침착하게 첫 문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산호……, 태평양에서, 다이버들이 찾았다? 이건 아닌 것 같고.”

클릭.

다음 문서.

“이건 러시아어네……, 하, 일단 이건 보류.”

다음 문서.

“퍼포리아 사라세니아……, 태국 로신, 로신섬?”

유독 눈길을 잡는 문장이 있었다. 연우는 그 문서를 확대해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퍼포리아 사라세니아 합성 성공 보고서 | 태국 로신섬 마이 연구소 | 1996년 7월 13일

우리는 오후 4시 경 릴리를 불렀다. 릴리의 프로필을 보니 출생지가 불분명했다. 이 점이 의아해 자헌 박사에게 물어 보니, 릴리는 애초에 실험 목적으로 인공수정되어 태어난 아이라고 했다. 생물학적 성별은 여자이나 2차 성징이 올 나이가 아니라 호르몬에 영향을 주는 식물도 이전에 시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뭐라는 거야……, 몇 살짜리를 실험했다는 거야.”

연우는 몇 문장을 읽고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었기에 실험을 위한 아이를 출산시키고 직접 키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대책 없는 야망에 휩싸인 연우라도 임상시험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피실험자의 동의가 명백히 있어야 하는데, 이 실험은 동의는커녕 태어난 이유조차 실험 때문이라니, 밖에 알린다면 학계는 물론이고 세계가 뒤집어질 게 빤했다. 물론 실험을 위해 동반되는 동물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그 상대가 인간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마이 연구소 박사들은 모두 릴리를 예뻐한다. 어디가 아프지 않은지 매일 아침 묻고, 직접 놀아 주기도 한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누군가의 자식이라 생각해 친절히 대했다. 자헌 박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릴리의 피를 소량 뽑는다. 릴리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피를 뽑을 때마다 어린 여자 연구생이 릴리의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준다. 릴리의 눈은 참 동그랗고 맑다. 자헌 박사는 릴리가 계속되는 실험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며, 아이가 원하는 건 거의 다 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는 연구소 안이 전부인 줄 안다. 릴리에게 교육이란 건 실험에 관련된 식물에 대해 얘기해 주는 것뿐이다. 릴리가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짧은 단어로 의사 표현을 한다. 이미 7여 년 동안 릴리를 직접 키운 박사들은 아이가 첫 마디만 떼어도 무슨 말을 할지 대충은 안다. 나는 아직 릴리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켈리가 썼다고 하기엔 조금 힘든 보고서였다. 일기에 가까운 문장이 가득했다. 그만큼 순간의 감정이 모두 기록돼 있었다. 연우는 스크롤을 조금씩 내리면서 숨을 죽였다. 어디선가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닌지, 묘하게 주위가 으슬으슬해졌다.

[처음으로 릴리의 벗은 몸을 봤을 땐 놀라서 욕을 할 뻔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전신마취를 한 릴리의 몸은 너무나도 작았다. 움직이지 않는 릴리를 확인한 박사들은 릴리의 팔에 여러 주사를 꽂기 시작했다. 아무리 연구소 안은 서늘한 온도를 유지한다고 해도, 항상 긴 팔과 긴바지만 입는 릴리가 의아하긴 했다. 릴리의 얇은 팔다리엔 여러 잎사귀와 꽃, 심지어 열매까지 피운 식물들이 피어 있었다. 종을 막론하고 사람의 피부 아래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 꽃을 피우다 못해 열매를 맺었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가끔 릴리가 간지럽다고 팔다리를 긁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릴리의 보모가 긁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던 게 떠올랐다.]

“…….”

[릴리에게 벌인 실험 보고서를 읽지 못한 이유가 그거였다. 나는 놀랐으나 그러지 않은 척하며 실험을 시작했다. 사실 내가 할 건 별 것 없었다. 자헌 박사를 보조하는 게 내 위치였으니까. 자헌 박사는 오늘만을 기다렸다면서, 그동안 자신이 온갖 열정을 부은 샘플을 릴리에게 주사했다. 퍼포리아 사라세니아. 자헌 박사가 틈만 나면 그 식물 얘기를 했기 때문에 이름도 단숨에 외워 버렸다.

퍼포리아 사라세니아는 식충 식물로 가정에서도 종종 키운다고 했다. 서천에 있을 때 식충 식물을 키우긴 했으나 이 품종은 다른 식충 식물과는 달리 달콤한 꿀 냄새를 흘리기에 곤충이 필요 이상으로 꼬이지 않게 하기 위해 퍼포리아는 키우지 않았다. 자헌 박사는 샘플 액을 릴리에게 주사한 후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서 꽃 향기가 나고, 열매 향도 나고, 거기에 꿀 냄새까지 난다고 하면……, 그게 에덴동산이 아니고 뭐겠어?” 그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어렸을 때 잠깐 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더니, 비교하는 족족 성경에 나오는 공간과 인물을 가져다 댔다.

릴리는 12시간이 지난 후 깨어났다. 바늘 자국이 남은 곳은 릴리가 좋아하는 동그란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릴리의 보모는 정을 과하게 주지 말라는 박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미 릴리에게 애착이 생긴 듯, 아이가 깨어날 때까지 손을 쉬지 않고 쓰다듬었다. 릴리는 그저 오랜만에 잠들었던 것처럼 몽롱한 눈을 하고서 보모부터 찾았다. 어린 아이였기에 칭얼대는 릴리를 보모는 익숙하게 달랬다. 자헌 박사는 릴리에게 기분이 어떠냐 물었다. 릴리는 대답했다. “손이 아파요.” 자헌 박사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모는 그날 밤 내내 릴리의 손을 주물렀다. 자헌 박사는 그런 보모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침을 막 먹기 시작했을 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릴리가 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외쳤다. 가장 먼저 뛰어간 건 자헌 박사였다. 우리가 릴리의 방에 도착했을 때, 자헌 박사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가만히 침대에 앉은 릴리를 지켜보았다. 릴리의 오른손에선 불그죽죽한 잎사귀가 손가락마다 피어나 있었다. 그리고 풍겨 오는 달달한 냄새. 자헌 박사는 두 손으로 성스러운 것을 만지듯 릴리의 잎사귀를 매만지면서 “너는 천사가 분명해!”라고 소리쳤다.]

더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 읽지 않은 문서가 줄을 이었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을 자신이 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켈리가 하긴 한 걸까? 일부러 읽으라고 권한을 빌려 준 건가? 여러 생각이 뒤얽혀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서천’이란 낯선 단어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잔인함을 뛰어넘은 박사들의 짓이었다. 연우는 아랫입술 위로 굳은 피딱지가 다시 터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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