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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10화 (110/202)

110화. 파도귀

심한 갈증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창문을 열어 두지 않았는지 공기마저 텁텁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물,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차가운 물이 필요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뜬 낙조는 곰팡이가 작게 핀 천장을 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밤이 누나?’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칼날이 박힌 부분은 뻐근하긴 했으나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잃어버렸던 회복력이 돌아온 건 확실했다.

‘이렇게 빨리 나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아직 날이 밝은 걸로 보아선 시간이 그리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 들었기에 하루 동안 잠들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회복 속도는 전보다 더 빨라진 듯했다.

“……어딜 간 거야.”

막상 몸을 일으키니 조금 어지럽긴 했다. 낙조는 이마를 잠깐 짚었다가 방을 나섰다. 방문 앞 바닥과 벽에 남은 핏자국이 눈에 선히 보였다. 괜히 보지 않은 척 복도를 벗어나 계단을 한 층씩 내려갔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1층까지 내려왔을 때, 낙조는 이상하게 꼬인 시선들의 타래를 목격했다.

“누나?”

“어, 좀 괜찮아?”

“보시다시피.”

“아까는, 정말 미안하다. 내가 미쳤었나 봐.”

“무슨 소리예요. 이제 영영 못 만나는 줄 알았는데, 고생 많이 했죠.”

자신이 없는 사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보다 덜 고통스러웠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단한 사람이라고 해서 깨지지 않는 법은 없다. 영원하다는 건 인간이 가진 짧은 생 중에 증명해내기 힘드니까.

“그거 갖고 내가 죽었으면 진작 죽었겠지. 그리고 말도 없이 사라진 애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는데 안 놀랄 수가 있나―”

“―그만해. 어찌 됐든 내가 잘못한 건 맞아. 억지로 그렇게 포장하려고 하지 마. 넌 애가 무슨 자존심도 없냐?”

“말없이 사라진 건 나잖아요.”

“착한 척인지 진짜 착해 빠진 건진 모르겠는데 그냥 그 짓 좀 그만하라고. 니 몸만 믿지 말고 니 주위를 좀 봐! 다 미쳐 돌아가는 중인데, 미쳤구나, 하고 다 용서해 줄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이러는 거 알잖아요. 나는 지금 나 자신도 못 미더워요. 그런 나 어떻게든 살려 놓은 사람한테 내가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야. 나 진짜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너 정말로,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다른 사람 생각해서 화를 내지 말고, 니가 화가 나면 화를 내. 죽이고 싶으면 죽여. 그래야 너가 살아. 어? 고낙조, 제발…….”

밤이는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얼굴을 감쌌다. 낙조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많이 답답했나 보네요, 그동안.”

“…….”

“뭐 어떡해, 내가 그런 사람인데. 내 팔자가 그런 거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낙조에게 익숙했다. 괜찮은 사람은 항상 자신이었고 괜찮지 않은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구조는 어떤 인간관계를 만들든 무조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챙김을 받는다는 것이 사치스러웠다. 가진 것도 없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정 같은 것을 품는 것조차 과분했다. 조용히 자신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게 삶의 목표였다.

“나는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건강했어요. 완전 애기 때 열 심하게 오른 것 빼고는 뭐, 병원 가 본 적이 없어요. 아, 충치 났을 때 빼고. 그래서 일도 몸 쓰는 일을 주로 했어요. 그래도 잘 안 망가지더라고. 군대에서 한 번은 보급창고에서 존나 맞았는데 뼈 하나 부러지지가 않아서 이틀 뒤에 유격 갔잖아요. 서른쯤 되면 어디 하나 망가지겠지, 싶어서 임상시험 같은 것도 자주 갔어요. 돈 많이 주니까. 그러다 이렇게 된 거예요. 더 건강해져서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몸이 됐잖아. 그게 내 팔자인데?”

고개를 푹 수그린 밤이는 낙조가 말하는 내내 조용했다. 낙조는 조금 멀찍이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흠을 잠시 바라봤다가 아예 주차장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내 옆에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있어 준 사람들이 없어서 그래요.”

밤이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질 테지만, 이건 낙조의 독백에 가까웠다. 자신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듣는 사람에겐 항상 처음인 이야기. 완전 날것의 욕지거리 같은 것이 아닌, 낙조가 한순간도 잊지 않고 내내 갖고 있던 한恨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건 낙조 스스로도 처음이었다.

잠깐이라도 감정에 한눈을 팔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산처럼 쌓였다. 사람과 멀어지기로 선택한 건 낙조였다.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을 만큼의 선만 지키면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건 사촌누나와 연을 끊으면서부터 쉬워졌다. 누군가 자신을 탓하지 않게, 자신도 누구를 탓하지 않는 삶은 그 누구도 서로를 침범할 수 없기에 평화로웠다.

그렇게 나름 완벽하게 죽을 수 있었던 낙조의 삶이 뒤바뀐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누구를 살리고 죽이겠다는 마음은 낙조의 선택이었다. 아무리 켈리에게 순간 지배당했던 적이 있었다 한들 낙조는 끝까지 켈리를 죽이지 않았다. 살려 봤자 득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낙조는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걸 잃는 게 가장 덜 고통스러운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복수는 죽음으로 짓밟는 게 끝이 아니다.

죽음 뒤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르는 인간이기에, 알고 있는 삶 안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복수를 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 있는 한.

*

다 식은 차를 내려다보던 켈리는 조용히 각설탕 하나를 넣어 천천히 녹였다. 점심 식사를 끝내자마자 들은 소식이 입맛을 뚝 떨어뜨렸다.

「귀도 그 여자가 서연우와 접촉한 것 같습니다.」

「직접 봤나요?」

「서연우가……, 그 여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니는 걸 들었습니다.」

「말해 준 이가 있던가요?」

「본부 안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파도’라는 것뿐,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아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수고했어요.」

켈리는 서랍에 넣어 두었던 작은 봉투 하나를 용병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봉투를 보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려들어 봉투를 낚아챘다. 곧장 봉투가 묶인 틈 사이로 코를 박던 남자에게, 켈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나가라고 소리쳤다. 용병은 그제야 켈리의 눈치를 보면서 밖으로 나갔다.

‘파도……, 아예 숨기고 다닐 생각이 없다 이거지.’

서천에서 일했던 십여 년 동안 ‘귀도’의 자리는 자주 바뀌었다. 귀도의 자리에 오른 자는 서천에서 개발한 새 품종의 약초를 직접 먹어 보는 일을 맡아야 했다. 몸이 아주 건강해야 하는 건 기본이었고 웬만한 독에도 버틸 만한 내성을 키우는 것도 일의 일부분이었다. 목숨이 걸린 만큼 대가도 후하다. 항간엔 돈을 억 소리가 날 만큼 받는다는 얘기도 돌았으나 귀도는 돈이 아닌 다른 것을 받는다고 했다.

서천에서 일하는 누구든 간부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진다. 그러나 간부들은 웬만하면 죽을 때까지 서천을 지키려 했고, 자주 죽어 나가는 자리인 귀도만 자주 바뀔 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해를 넘기지 못하는 수가 많게 되니 서천의 대모인 삼승이 직접 귀도에 적합한 자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파도는 켈리가 서천에서 도망 나온 이후 귀도의 자리에 오른 자다. 서천에서 나오며 켈리의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 중 몇 명은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서천에 남았다. ‘악어와 새’ 운영이 자리를 잡을 때쯤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켈리는 수면제를 과하게 먹었음에도 잠이 오지 않아 창밖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서로 교대 근무를 하면서 자신을 지키는 용병들이 있었으나 서천에 있던 이들의 소식이 갑작스럽게 끊기면서 한층 불안이 거세졌을 때였다.

그녀는 귀신의 발이라도 단 것처럼 소리 없이 걸었다. 모든 움직임에 소리가 없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파도는 켈리의 뒤에 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등 뒤에서 느껴지던 그 축축한 목소리. 이제 막 뭍으로 건져 올린 것 같은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적막한 방에선 소름 끼치는 소리일 뿐이었다.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파도는 켈리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띄워진 초승달 같은 입술이 그리도 무서울 수 없었다.

「제 얘기는 들으셨죠. 새 귀도입니다. 이름은 파도예요. 잘 어울리죠.」

「어떻, 어떻게, 여기를…….」

「저 혼자 온 건 아니에요. 저 많은 수를 어떻게 저 혼자 감당할까요. 그저 삼승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아시겠지만……, 삼승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많이 쇠해지셨거든요.」

서천에서 전해온 마지막 이야기는 파도와 간부들에 대한 것이었다. 새 귀도가 왔는데, 생각보다 아주 어린 여자이고 굉장히 말이 없다. 간부들은 끼니마다 자신들이 몰래 섞은 독을 먹어 가며 천천히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켈리는 파도의 말을 듣고 어렵사리 입을 떼어 냈다.

「삼승……, 삼승님을 제외하고?」

「아……, 삼승님의 식사에도 독을 타라 이르셨지요. 다행히 삼승님은 무사하십니다. 삼승님의 식사는 항상 귀도가 먼저 맛을 봅니다. 혹시나 알까요. 서천에서 도망간 이가 독초를 심고 갔을지…….」

파도는 밤바다와 잘 어울리는 어투를 갖고 있었다. 새카만 수평선에서 천천히 밀려 들어오는 목소리는 여유로웠고, 누군가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딘가는 포근했다. 다른 이가 하면 가시가 돋친 말임이 분명함에도 파도가 말하니 그저 다른 이에게서 들은 얘기를 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당신이 몰래 심어두고 간 독초들은 제가 다 찾아냈습니다. 밖이 그리도 좋으면 따라나서지, 왜 하기 싫은 일을 지금까지 붙잡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시지요? 서천과의 약속.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짓을 했으니 시간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피를 모두 빼내 뼈와 껍데기만 남겨 왔습니다.」

「……남겨 왔다고?」

서천과의 약속.

하나, 서천은 병든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 서천에선 새 삶을 심는다.

하나, 서천의 모든 목숨을 보호하지 않을 시 박탈당한다.

파도의 ‘남겨 왔다’라는 말에 켈리의 낯빛이 차갑게 식었다. 파도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서천에서 박탈당한 자들이고, 당신을 따랐으니 당신 근처에 묻어야죠. 그게 그들을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 아닐까요?」

「어린 계집애가 입이 무겁다더니, 다 헛소리였구나. 여기까지 오면서 본 게 다인 줄 아니? 서천에서 나오며 내가 그 정도까지 생각을 못 했을까 봐?」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는 삼승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서천의 약속을 가장 먼저 어기고, 서천을 가뭄에 들게 한 사람이니 저는 당장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다만 삼승님께서 그러지 말라 하셨으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 같은 어린 애한테 죽을 만큼 내가 만만한 사람이었다면 네가 오기도 전에 나는 죽었겠지. 내가 살아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란다, 알겠니?」

켈리는 두 주먹이 떨리도록 꽉 힘을 주어 쥐면서도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아직 남은 용병들까지 모조리 잃을 순 없었다. 말은 뻔뻔스럽게 했으나 파도가 서천에서 수하를 얼마나 많이 데려왔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니.

켈리의 대답에 파도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미소마저 거두고서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켈리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켈리도 읽을 수 없을 만큼 새카맸다. 정말 밤바다 같았다. 시리도록 차갑고, 어두워서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밤바다.

「삼승님께서 이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을 병들게 하지 말아라. 너 하나 때문에 이유 없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라고요.」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시는구나. 나는 그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어. 돈도 받지 않고 그들이 자유롭게 먹고, 자고, 일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어. 가서 삼승님께 똑바로 전해라. 나는 서천의 품위가 답답해서 나온 거라고.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면서……, 다 늙어서 죽어가는 노인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너도 조심해. 너가 제일 조심해야 할 자리 아니니?」

켈리는 말하면서 겨우 웃어 보였다. 말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꽉 막혔던 속이 점점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이곳이 자신의 영역이라 해도 서천에 속해 있는 자다. 더 이상 입을 함부로 놀려선 안 된다는 걸 머리론 이해하면서 감정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말을 내뱉고 싶었다.

「네, 알아요.」

파도는 켈리가 짓궂게 비꼬아 말한 말에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곧장 켈리의 말끝을 붙잡고 따라 나왔다.

「저도 잘못하면 죽겠죠. 잘못하지 않으면, 살 테고.」

그녀는 켈리에게 엄포하듯 말했다.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커진 탓에 켈리가 스스로 당황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파도는 잠시 몸을 움직였다. 정말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열더니 복도에 놓여 있던 큰 자루 두 개를 끌고 켈리의 앞에 내려놓았다.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 삼승님의 말씀도 자주 새기시고……, 혹시 알까요,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창백한 얼굴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얘기했다. 그녀는 기척도 없이 들어왔던 것처럼,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켈리는 쿱쿱한 냄새가 나는 자루 두 개 앞에 그제야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왜 삼승은 그때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까.

켈리는 각설탕이 다 녹은 차를 내려다보면서 한참 생각했다. 티스푼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왜……, 서연우를 만났을까.

켈리의 공허하고 파란 두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자신과 서연우는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이어져 있다. 비슷한 크기의 권력욕, 야망……. 그것을 잘 조종한다면 무리 없이 속도를 더 빨리해 자신의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은 그녀보다 똑똑하니까, 자신이 청주에 온 이상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땡강.

티스푼이 테이블에서 바닥으로 추락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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