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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05화 (105/202)

105화. 삼천 삼백오십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지운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변종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숨을 죽였다. 배고픔에 미쳐서 사람까지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지운은 열린 가방에서 작은 망치를 빼내 조용히 손에 쥐었다.

문이 닫히고, 저벅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장 자신과 해화가 있는 방으로 오는 걸음에 지운은 망치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곧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었다. 헐렁거리는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면서 문이 열렸다. 집안의 불은 켜지지 않았기에 문이 열렸음에도 여전히 어두웠다. 환기를 위해 잠깐 열어둔 방안의 창문에서 미미하게 흘러들어오는 햇빛 한 줌이 전부였다. 지운은 뒤에 해화를 두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곧 문을 연 이의 형상이 눈앞에 완전히 드러났다.

“…….”

“…….”

“밤이 누나.”

“홍해화는?”

“…….”

“너 이 근처에서 차 본 적 있어?”

밤이는 집을 뛰쳐나갔을 때보다 훨씬 선명한 눈동자로 지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마음을 놓을 순 없어 지운은 망치를 든 채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밤이는 지운의 어깨너머로 간간이 숨을 내쉬는 해화를 바라보다가 입을 다시 열었다.

“차가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 있어. 고낙조 있을 때만 해도 못 보던 자국이야.”

“……그냥 몰랐던 건 아니야?”

“음식 가지러 가던 슈퍼 근처에서 본 거야. 분명히 고낙조 있을 땐 없었어.”

“…….”

지운은 머뭇거리다가 망치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자신의 주머니에서 구긴 채 넣어둔 종이를 꺼냈다.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다시피 했던 것을 꺼내니 기분이 이상했다. 밤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구겨진 종이를 보고서 다시 지운을 바라보았다.

“뭐야?”

“……집 근처에서 주웠어. 누나, 우리 누나 때문에 그땐 정신이 없어서……, 누나한테도 말한다는 걸 까먹었어.”

밤이는 잠시 무시무시하게 지운을 노려보다가 종이를 빼앗아 갔다. 그리곤 안에 적힌 주소를 한눈에 읽었다.

“장승포?”

“여기서 너무 먼 곳이기도 하고, 인터넷이 안 되니까 거기가 무슨 곳인지도 몰라서…….”

“하, 홍지운.”

“어, 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겠어? 차라리 여기 근처에 적힌 주소였다면 의심했겠지. 아무 내용도 없이 섬 주소가 떡하니 쓰여 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고낙조가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게 생겼는데 그게 이상하지가 않았다고? 청주에서 군인을 보낸 거라면 홍해화도 진작 잡아갔겠지. 그렇게 소리도 없이 오지도 않았을 거고. 거기에 이 펜 잉크 지워진 자국. 주소만 적고 바로 종이 접었다는 흔적. 누군가 밟았다거나 낙서를 하지도 않은 종이라고. 일부러 둔 거지. 누구 보라고 흘렸겠어?”

“……트릭일 수도 있잖아.”

“우리까지 잡으려고 일부러 가장 중요 인물인 고낙조만 잡는다? 거기부터 말이 안 되지. 그럼 홍해화는 왜 안 데려갔고, 우리는 왜 굳이 끌어들이려고 해? 우리가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살아왔다지만 다른 생존자들도 똑같아. 변종의 패턴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산이나 변종을 끌어들이는 식물을 모를 확률이 아예 없어? 모르면 죽는 세상이야.”

밤이는 빠르게 말을 뱉었다. 지운은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해화가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것에만 눈이 돌아가 자신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그제야 생각났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밤이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녔고 해화의 호흡이 가빠지면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잠을 지켜 주었고 낙조의 행방도 알아보려 애썼다. 그동안 자신은 무얼 했나. 스스로가 만든 자괴감에 빠져 어린애처럼 해화가 일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멍청했어.”

“사과 받을 생각은 없고. 홍해화 업어. 마을회관 앞에 있는 차로 어떻게 해서든 가 보게.”

“……응.”

밤이는 지운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자신의 짐을 다시 정리했다. 혹여 놓고 간 것은 없나, 낙조의 방까지 뒤졌다. 먼저 정리를 끝내고 나오자 지운이 해화를 업고서 한 손엔 자신의 가방을 든 채 나왔다. 밤이는 말없이 지운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선 계단을 내려갔다.

마을회관까지는 꽤 걸어야 했다. 밤이가 겨우 손을 댄 차는 소형차였다. 해화를 겨우 싣고서 트렁크엔 가방을 실었다. 운전석에 오른 밤이는 곧장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로 핸들을 돌렸다. 눈이 왔던 만큼 길은 미끄러웠고 어느 것 하나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밤이만큼 마을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는 지운은 새삼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넋을 잃고서 눈만 깜박였다.

지운에게 그리 모질게 타박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속에 쌓인 화를 풀어내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밤이는 속력을 내면서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자신 또한 그랬듯이 지운도 의욕을 잃은 것이다. 살아갈 희망 같은 건 생각보다 더 희박하고,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스스로를 혹사시켰을 테다.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당장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 종이 한 장만 자신이 먼저 발견했더라면, 그랬다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실 밤이라고 그 종이에 적힌 주소에 낙조가 정말 있으리라고 확신은 하지 못했다. 지운에게 늘어놓은 이야기도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한 감각이라도 메마르면 어떤 것이라도 쥐고 싶어 안달이 난다. 거의 한 달 동안 잠들어 있었던 자신의 감각이 종이에 적힌 주소 한 줄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장난으로 벌인 추격이라고 하더라도 종이에 적힌 주소에 간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조금의 시간이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꼭 저승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살아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 이승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모두 죽기 위해 겪은 시간이다. 정말 저승에 가는 길이라면,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밤이는 가드레일에 처박힌 차를 피하면서 운전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그와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있다.

혹시 산이 너를 불렀느냐고. 나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네가 죽고서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네가 미리 알아챈 게 문제가 된 건 아닌지……, 그런 설화 속에서나 들을 법한 말들을 하고 싶었다. 여전히 옛 연인의 죽음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고 자신조차 그 끝을 파헤치지 못했으니까.

만날 수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돌다리 삼천 삼백오십팔 간을 건너, 또 나무다리 삼천 삼백오십팔 간을 건너면 나타난다는 세 갈래길 앞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다. 그가 어느 길로 갔는지, 저승의 입구까지 들릴 정도로 대답해 주기만 한다면 못 할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밤이는 운전석 창문만 살짝 내린 채 젖은 숨을 들이마셨다. 지운은 밤이의 울음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모두가 다른 곳을 본 채, 차는 앞으로만 움직였다.

*

한순간에 팀장에서 연구원이 된 연우는 다른 이들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신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켈리가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연우는 온몸이 굳어 가는 걸 느꼈다. 그 말 한 마디가 뭐라고, 그녀의 목소리에 완전히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게 타들어 갈 때쯤 그녀가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시에 막혔던 숨이 트였고 연우는 급히 숨을 몰아쉬면서 켈리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무신론자였다. 어릴 적 친구를 따라 여름성경학교에 가거나 친구의 세례식을 구경하러 성당에 가고,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에서 불국사를 구경했던 게 종교와 관련된 시간 전부였다. 여느 과학자들이 그렇듯 ‘신’이라는 건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단어였다. 모든 종교의 시작을 가리키는 신을 설명하라고 해도 어느 종교냐에 따라 설명은 달라진다. 같은 신을 표현한다고 해도 개개인의 종교관에 따라서도 말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켈리가 말하는 ‘신’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였다. 너무나도 작은 인간의 힘으론 다룰 수 없는 자연을 속이려 들고, 법칙을 새로 정립하고, 생태계를 정리하는 등의 짓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법조차 인간 앞에선 평등하지 못한데, 신의 앞에선 얼마나 쓸모없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존재라면 아직 완벽하진 않다는 소리인가.’

연우는 현미경 앞에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그녀가 말한 말이 머릿속에 남아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신과는 전혀 다른 범위에 속한 켈리의 모습은 존재하는 것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째서 이 재앙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왜 백무흠은 실패했다고 하는지……. 연우의 앞에서 그녀는 마치 자신이 설계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건물에서 동물을 키우고 농사를 지었다는 게, 그것도 몇 년이나 걸쳐서 그랬는데도 처음 들어보는 단체 이름이었어. 그저……, 다문화 가정 복지를 위해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었다는 정보밖에 없었는데.’

수호를 통해 그녀에 대해 조사했을 때 나온 정보들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선한 영향력’, ‘화합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 등등. 국내에 퍼진 기사들은 연우에게 전혀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외신 보도까지 찾고 찾아 발견한 건 불법 마약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국내에 난 기사들과는 정반대의 곳에 선 얼굴이었다.

‘뭘 더 알아야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우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켈리에게서 직접 받아온 백신 샘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받아온 직후 한 번도 자세히 관찰한 적이 없었다. 그날, 사람의 기에 짓눌린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너무나 자세히 알 것만 같아 후유증 비슷한 것에 시달린 탓이었다. 지금까지도 멍하니 그날 생각만 하고 있었던지라 켈리가 만들었다는 백신은 살피지 못했다.

피펫으로 아주 소량의 백신을 슬라이드 위에 옮긴 연우는 현미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조금씩 슬라이드에 떨어진 액체를 확대했다. 연우의 눈동자에 들어찬 광경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 아주 달랐다. 자신이 발표한 백신 샘플과는 조금도 맞닿는 지점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움직임이……, 애초에 무슨 세포를 배양해서 시작한 건지 감도 안 잡혀.’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현미경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라텍스 장갑을 낀 상태라 팔꿈치 쪽에 눈가를 아무리 비벼 봐도 현미경을 들여다 봤을 때 보이는 모습은 같았다. 엄청난 속도로 분열하는 세포는 처음 보는 형태였다. 비슷한 모양새를 찾을 수 있었다면 모를까, 추측조차 할 수 없는 형태는 연우의 예상을 벗어나다 못해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힘부터 달라.’

연우는 황급히 소형 약품 냉장고에서 변종의 피가 담긴 메스실린더 하나를 꺼냈다. 세척된 다른 피펫으로 피를 뽑아 켈리의 백신에 떨어뜨리니, 곧장 세포들의 움직임이 재빨라졌다. 변종의 피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 바이러스는 백신 세포와 맞닿자마자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빛을 발산하며 사라졌다. 깜박이는 순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연우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이게 뭐야?’

연우는 조용히 상체를 세웠다. 그리곤 잠시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세포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흰 벽 위로 괴이하게 생긴 세포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듯했다. 연우는 멍하니 눈만 깜박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실을 나오기 직전 시계를 확인해 보니 막 저녁 식사가 끝날 때였다. 연우는 켈리의 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다른 연구원들이 연우를 보고 몸을 피해줄 정도로, 연우는 숨을 헉헉대면서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 올라갔다.

“헉, 허억, 헉…….”

숨을 급하게 몰아쉬던 연우는 켈리의 방문 앞에서 호흡을 다스렸다. ‘Kelly’라는 이름이 적힌 방문 앞에서 이렇게 심장이 크게 뛴 적이 없었다. 연우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이내 켈리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같이 저녁 먹으려고 온 거면 미안해요, 내가 저녁은 잘 안 먹어서.”

켈리는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부으며 말했다. 연우는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다가 산발이던 머리카락을 급하게 정리했다. 더 이상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호흡이 완전히 정리되길 기다린 연우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백신……, 무슨, 어떤 걸로, 도대체 무슨 생명체로 만들어진 겁니까?”

“이제 봤어요? 내가 준 게 언제인데, 어쩐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하도 안 온다 했더니, 확인을 안 해서 그런 거였구나.”

“죄송합니다. 그런데……, 백신, 이거, 저한테만 주신 거 맞나요?”

“그렇죠. 내가 직접 준 거니까?”

“……왜요?”

“연우 씨는 보통 사람들보다 겁이 없으니까요. 그 정도는 돼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를 찾아오기도 하고, 다짜고짜 뭐냐고 물어보기도 할 수 있잖아요.”

“장난치지 마세요. 왜 저한테만 주셨어요. 도대체 저런 건 어떻게 만든 거예요.”

“그걸 알아내는 게 서연우 씨가 할 일입니다.”

“네?”

연우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미 완성돼서 결과까지 완벽하게 내는 것을 연구하라니.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켈리가 자신에게만 백신을 내어 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회의 때 제안한 것처럼, 연우가 켈리의 연구원이 됨으로써 켈리는 백신 개발 제조법을 공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달이 지나도록 제조법을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저 완성된 것을 연우에게 건네 준 것뿐이었다. 켈리의 말 한 마디로 상황이 역전될 수 있는 걸 아는 소장은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하고 보챌 수도 없었다.

“일주일. 일주일 안에 알아낸다면 서연우 씨에게 자격이 있다는 걸 내가 인정하고, 정말 중요한 일을 줄 겁니다. 우리끼리만 아는 하나의 역할을 맡는 거죠.”

켈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연속해서 내뱉었다. 그녀는 티백에서 우러나오는 찻물을 내려다보다가 찻잔을 든 채 연우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작은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켈리는 연우를 두고 세 바퀴 정도를 느리게 걸으며 돌다가 연우를 등진 채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신의 대리자. 어딘가 웃길 수도 있겠지만 그럴싸하죠. 신은 인간과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해요. 항상 신의 언어를 해석해 주는 대리자가 있어야 하죠.”

“…….”

“그걸 서연우 씨가 할 수 있게 해 줄게요. 그럼, 이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연우 씨에게 달려들겠죠. 당신의 능력을 보고 싶어서, 신에게서 인정받은 사람을 따르고 싶어서. 추종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당신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것뿐인데. 신의 대리자라니. 사실 신이 점지해 둔 것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당신에게 능력을 주었을 수도 있죠.”

“그 신이……, 당신, 이란 말이죠.”

“글쎄요. 아직 신과 가까운 인간이 아닌 당신에게 그것까진 얘기해 줄 수가 없답니다.”

켈리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으나 연우는 끝까지 그 파란 눈을 마주하고서도 설 수 있게 되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가 갈릴 정도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오한이 들었으나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가 신의 대리자가 된다.

그 하나의 문장 자체로 연우는 황홀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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