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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04화 (104/202)

104화. 서천꽃밭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방엔 달력도 없고, 시계도 없다. 창문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무흠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구해 오는 것 말고는 추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흠이 말한 치료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했고 처음엔 받기 직전까지 거부했다. 몸에서 독이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에 회복력 또한 약해진 것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었으나 독을 빼는 방법이 참으로 기상천외했다.

무흠의 제안에 이끌려 모두 붕어섬에 갔을 때. 밤이는 무흠의 피를 뽑고서 말했다. 피마자라는 식물이 가진 독 성분이 검출됐다고. 피를 독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무흠이 피를 흘리는 일이 되도록 없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살갗에 닿아도 문제가 되는 건지, 아니면 피가 섞였을 때 문제가 되는 건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새 독을 밀어 넣으면서 안에 고인 독을 빼내는 겁니다.」

낡다 못해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른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무흠이 한 말이었다. 쾨쾨한 냄새가 올라오는 좁은 방 안에서, 낙조는 그저 그가 독초를 이용하여 약을 만드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갖고 돌아온 물건은 낙조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게 뭐…….」

기가 차서 말이 끝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무흠은 여전한 얼굴로 한 손엔 큰 그릇, 반대쪽 손엔 주사기와 연결된 긴 줄을 쥐고 있었다. 그는 문을 잠근 후 낙조의 앞에 앉아 자신의 왼쪽 소매를 걷었다. 생각지도 못한 피멍과 주사 자국들이 피부 위를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주삿바늘을 꽂을 혈관마저 다 터진 것처럼 보이는 팔의 형태에 낙조는 조용히 눈동자만 굴려 무흠을 바라보았다.

「피를 얼리거나 냉장 보관할 수 있는 곳도 없고, 곧장 연결할 깨끗한 주사기도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장난 그만 하세요.」

「장난은 진작 끝났습니다. 낙조 씨에게 해드릴 말은 많으나 회복력을 되찾는 게 우선이니, 일단 피를 받으십시오.」

「미쳤어요? 무슨 굿하는 것도 아니고, 피를 왜……, 피를 어떻게 마셔요.」

정신이 혼미했다. 낙조는 무흠이 청주에 끌려갔을 때 사주라도 받고서 대놓고 작당을 벌이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정사각형의 좁은 방안에서, 전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라진 남자와 마주 본 채 상식에서 벗어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 자체가 낙조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아직 피를 뽑지 않았음에도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낙조는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조금씩 뒤로 뱄다. 직접 손가락으로 혈관을 찾던 무흠이 고개를 들고서 낙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드셔야 합니다.」

「차라리 내 피를 빼요. 독이 딸려 나올 거 아닙니까. 차라리, 제 피를 빼서 버려요. 예?」

「그 여자가 쓰는 독초는 피를 뺀다고 해서 빠지지 않습니다. 효능이 강한 약초를 쓰거나 다른 독으로 밀어내야 합니다. 대체되는 독은 낙조 씨 몸이 알아서 다시 배출해낼 겁니다.」

「독을 빼낼 줄 아는데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다른 독으로 자리 바꾸는 거잖아요. 그 정도로 밀릴 독이면 내 몸이 알아서―」

「당신의 몸이 지금 어떤 구조인지는 그 여자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어째서 그 독초와 결합이 됐는지, 그 이유는 내가 알고 있습니다.」

무흠은 완강했다.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어도 문 앞은 무흠이 지키고 있었고 나가 봤자 섬 안이었다. 평소 자신의 몸 상태였다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었겠지만 독에 취한 몸은 한없이 약했다. 겨우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오른팔마저 기운을 잃었다. 본래 자신이 가진 힘으로만 무흠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이유가 뭔데요.」

낙조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의심에 가득 찬 눈빛을 빤히 읽은 무흠은 주사기를 오른손에 쥐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낙조를 훑는 시선엔 귀찮음과 멸시가 뒤섞여 있었다.

「시간 없습니다.」

「왜 하필 중사님 피를 먹어야 하냐고요. 독을 먹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데.」

「애초에 나는 해독제로 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유일하게 독에 누출됐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켈리가 사용하는 여러 독초의 부작용을 배설시킬 수 있어서 그들이 살려 둔 거기도 합니다.」

무흠은 태연하고도 짧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낙조가 물었던 ‘왜 자신의 피를 먹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낙조가 조금이라도 더 발악한다면, 억지로라도 입을 벌려 피를 마시게 할 작정이었다. 시든 이파리와 같은 낙조는 꼼짝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흠은 30분에 걸쳐 뽑은 피를 그대로 그릇에 받았다. 낙조는 어쩐지 비린내보다 한약에서 오르는 쓴 냄새가 느껴져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점점 채워지는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낙조의 투정이 멈췄다고 생각했는지, 무흠은 주삿바늘을 팔뚝에 꽂고서 입을 열었다.

「낙조 씨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어떤 걸 책임져요.」

「상대를 특정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거나 생물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까?」

「중사님의 윤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 시험하지 마세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당신에게 정말 자격이 있는 건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사님이 나를 왜 판단하냐구요. 희생이나 자격 운운하면서 듣고 싶은 얘기가 뭔지, 나한테 조금이라도 알려 주고 대화를 하려고 하든가 하라고요.」

「……드십시오. 피가 따뜻할 때 드셔야 합니다.」

무흠이 팔뚝에서 바늘을 빼내며 말했다. 분명히 지금까지 감춘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알려 주지 않는 태도가 뻔뻔하고도 분했다. 낙조는 두 손으로 그릇을 들어 눈을 감고 무흠의 피를 마셨다. 코로 냄새를 들이마시지 않은 채 넘겼기에 피에서 나는 특유의 철 냄새 같은 것은 진하게 나지 않았으나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미지근하고 걸쭉한 덩어리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무흠은 빈 그릇을 내려놓는 낙조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챙겨 온 물건들을 정리한 후 그는 낙조가 사용하는 이부자리 위쪽에 이름 모를 약초가 수북이 쌓인 도자기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그 위에 불을 지폈다. 잎에 불이 붙으며 순식간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향이 방안을 맴돌았다. 낙조는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하지 못하고 이불 위에 풀썩 쓰러졌다.

몸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눈꺼풀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낙조는 무흠의 발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켈리에게 강제로 최면에 빠져들 때보다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

켈리의 연구실에 남자 하나가 조용히 들어섰다. 켈리는 의자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에 화상 흉터가 가득한 남자였다. 그는 켈리가 가장 믿는 용병이었으며 ‘악어와 새’에서 변종에게 싸였을 때도 켈리를 가장 먼저 탈출시킨 이였다.

“무언가를 봤나 보군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까웠죠?”

“본부 내부에 사람을 심어 둔 모양입니다. 자세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영향력이 없는 자는 아닌 듯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었군요. 하긴, 일머리가 아예 없는 양반들은 아니니까……,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이름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들 ‘도’라고 부르는 건 들었으나,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누가 들을 새라 켈리에게 바짝 붙어 대답했다. 켈리는 남자의 대답에 잠시 창밖을 응시하다가 짚이는 게 있는 듯 위쪽 송곳니로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기어코 귀도를 보냈다? ……아직까지도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면, 그쪽도 이제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았나 보지요.”

“그 자 이름이……, ‘귀도’입니까.”

“아무에게도 얘기해선 안 됩니다. 이름을 아는 자는 그 무리 안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여자를 잘 살피세요. 서연우에게 접근하지는 않나, 그걸 가장 중요하게 보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꾸벅 굽히고서 복도의 양옆을 살핀 후 밖으로 나섰다. 남자가 나가자, 켈리는 책상에 한쪽 손을 올리고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청주에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목적이 아닌가? 그동안 쫓아다닌 걸 보면 그럴 리 없는데. 고낙조 일행이 머무를 때부터 준비했나?’

아무리 켈리라고 한들 대적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적자이자 천적. 그녀 혼자서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동안 그들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던가. 이 자리까지 오느라고 애먼 고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쉽사리 붙잡혀 줄 생각은 없다. 켈리는 긴장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누군가 자신의 연구실 창문을 훔쳐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백무흠도……, 서천 영감들이 도왔나?”

켈리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저 자신에게 이미 속박된 백무흠이었기에 서연우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어 탈출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당장 저 문밖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켈리는 책상 위를 더듬거리다가 얇은 가위를 쥐고서 뒤를 돌았다.

똑똑.

순간에 맞추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켈리는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연우 연구원입니다.”

켈리는 연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황급히 가위를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어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세요.”

*

우스운 건 무흠의 피를 마시고서 보름이 지나니 열이 완전히 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보름 정도가 흐른 후에 낙조는 전과 같은 기운이 몸에 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흠 또한 낙조가 기력을 차린 걸 알아차렸는지 그때부턴 자신의 피를 먹이지 않았다.

거의 한 달 동안 방에만 갇혀 있었던 낙조는 겨울이 왔다는 걸, 밖에 나가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눈이 녹은 흔적이 보였고 차디찬 겨울바람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온몸을 꿰뚫듯 날카롭게 불었다. 입김이 수증기처럼 터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낙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리멍덩한 하늘은 꽤 무거워 보였다. 여관 앞에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자, 무흠이 낙조를 재촉했다.

무흠이 낙조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옆에 있는 통신국 회사 건물이었다. 맨 위층으로 올라간 낙조는 차의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낙조를 발견하자마자 어,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앞까지 후다닥 뛰어왔다. 그리곤 손을 내밀며 말했다.

“금수호입니다.”

“……예.”

앞에 내밀어진 손을 무시할 수 없어 가볍게 쥐었다. 낙조는 악수를 나눈 후에야 수호의 뒤에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컴퓨터, 스크린들,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여러 색깔의 전선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의 CCTV와 연결된 글로벌 스크린 구간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낙조의 시선이 그곳에 박힌 것을 알아챈 수호가 멋쩍어하며 소개했다.

“보시는 대로 다른 나라들 CCTV 중 큰 길가나 주로 움직임이 많이 포착된 것들 위주로 모아 놨어요. 외국은 아무래도 CCTV가 우리나라에 비해 많이 설치된 편이 아니기도 해서 다른 나라는 어떻게 변종을 대처하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아낸 건 없구요.”

“……공주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못 보셨어요?”

“……아아……, 그게. 그러니까. 원래 시골에 CCTV가 잘 설치된 편이긴 한데, 동네를 이미 다 꿰뚫고 계시는지 움직임이 잘 잡힌 모습이 없어요.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조차 없는 그림자 같은 것들밖에 못 봤어요.”

낙조는 말없이 텅 빈 거리를 비추는 스크린들을 둘러 보았다. 무흠의 말대로라면 거의 한 달 동안 자신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상태다. 그동안 밤이를 비롯한 이들이 안전히 지냈다면 다행이지만, 그들 또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움직임 없이 공주를 떠났다면 자신이 직접 그들을 찾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릴 게 빤했다.

“낙조 씨가 나왔던 집 계단에 이곳 주소를 적어 놨는데……, 아직 찾지 못한 건지, 아니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 주소를 줬다구요?”

“쪽지를 남겼습니다. 그런데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곳으로 전화를 할 수는 없나요?”

“본부의 감시를 피해서 전화를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길게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그곳에 연결된 모든 번호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는 곳이 없었습니다.”

낙조의 생각을 읽은 듯 무흠이 줄줄이 말했다. 적어도 아예 포기한 건 아니구나. 낙조는 쪽지를 남겼다는 말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거제도에서 충청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머리로는 알면서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찾아가면 안 돼요?”

“단독행동은 이제 할 수 없습니다. 엄격하게 보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움직이는 건 내가 알아서 해요. 내 몸이고, 결정하는 것도 내가 합니다! 지금까지 죽을 뻔한 적이 몇 번이었는데, 그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늘어놓지 말라고요.”

“죽을 뻔한 거지, 진짜 죽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죽지 않을 걸 알았기에 그런 것입니다.”

“……개소리 진짜 작작해. 당신 뒤든 위든 누가 있는 거야. 켈리는 어떻게 알고.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어째서 당신이 제일 잘 아냐고.”

낙조는 무흠의 멱살을 틀고서 벽으로 밀쳤다. 무흠은 순순히 낙조의 힘에 당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엔 낙조를 하찮게 보는 느낌이 가득했다. 수호는 둘의 옆에 멀찍이 서서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모든 건 서천꽃밭에서 시작됐다.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약초를 재배하는 곳이었어. 고국을 상관 않고 능력이 있거나 사람을 돌보는 데에 능숙한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시한부를 받은 환자도 멀쩡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약초들이 많았지. 언론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까지 발설하면 안 되는 단체로 활동했어. 그러나 그게 맘처럼 될 일이 있나. 처음엔 사실로 시작된 소문이 헛소문을 낳았고, 딴마음을 품은 이들이 서천에 도둑질을 하러 들기 시작했다.”

무흠은 낙조의 오른쪽 손목을 쥐고서 맥을 정확히 엄지로 짚었다. 심장 박동에 맞추어 맥박이 요동치는 것이 살갗 아래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켈리는 그곳에서 일하던 여자였다. 심성이 착하고 학습 능력도 빨라 큰심방尋訪의 눈에 들었지.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서천에서도 귀하디 귀한 약초를 모두 뽑아 도망갔다. 몇 년이 지난 후 켈리의 행적이 발견됐다. 켈리는 찾지 못했지만, 그 여자가 벌인 짓은 그곳에 남아있었지. 관리되지 않는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서천꽃밭의 약초를 쓴 게 확인된 거야.”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무흠의 입에서 빗발쳤다. 낙조는 인상을 찡그린 채 멱살을 조금 더 세게 틀었다. 무흠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확신이 담긴 말을 덧붙였다.

“이미 죽은 것에서부터 시작한 거다. 식물이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서천에 들어온 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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