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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98화 (98/202)

98화. 이것은 사실 꿈이 아니다

아주 큰 폭발음을 들었다.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가, 이명이 귀 깊은 곳부터 울리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질식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휘감다 못해 날려 보냈다. 나무 하나에 등이 부딪치고 하염없이 아래로 굴렀다. 입안으로 부서진 낙엽이 흘러 들어왔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곳까지 굴러왔을 때 눈을 떴다. 곁에 있던 지운은 보이지 않았다. 위쪽에서 불씨가 흩날렸다.

몸을 일으키니 구르며 이곳저곳이 긁힌 듯 따가웠다. 밤이는 잠시 주춤거렸다가 다리에 힘을 주어 완전히 일어섰다.

‘소리를 내도 괜찮을까?’

그때까지도 먹먹한 귓속을 파고드는 건 점차 번지기 시작하는 불길이 이빨을 가는 소리였다. 불이 붙기 쉬운 낙엽들에 옮겨 붙은 불씨는 아주 미약한 바람에 따라 더욱 몸집을 키워 나갔다.

‘고낙조는……, 피했나?’

혼자인 것이 워낙 익숙했고 자신의 성격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이렇게 처절해진 상황에 홀로 놓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낙조의 계획은 천지에 적을 두고서 폭죽을 쏘아 올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빤히 알았지만 말리진 못했다. 아무리 최악을 예상한다고 해도 스스로에게 배신을 당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을 ‘실패’라 부르는 건 인간들끼리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아무리 혼자인 생활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해도 갑작스럽게 곁을 내어 준 사람들을 잃는 건 쉽지 않았다. 탓을 돌릴 대상도 없는 상황에선 더욱 그랬다. 탓할 대상이 없다면 그 타겟은 자신이 된다. 죄책감과 자기모멸감을 듬뿍 껴안은 채로 스스로 동굴을 파 들어간다. 밤이는 낙엽을 뒤집어쓴 채 우두커니 서서 낙조와 차가 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길이 내뿜는 열기와 연기가 스멀스멀 밤이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밤이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운의 흔적이라도 찾아야 했다.

낙조는 습관적으로 ‘자신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건 모든 생명에게 통용되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 불사라도 된다는 듯 행동했다. 처음엔 철이 덜 들었나 생각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낙조가 스스로 무언가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지만, 감으로 느껴지는 추측은 웬만하면 무시하지 않는 편이 좋다. 얼추 반은 맞고 들어가니까. 밤이는 그때부터 낙조의 행동을 천천히 주시했다. 낙조에게도 여유가 조금씩 생기면서 여유와 반비례하듯 행동은 거침이 없어졌다. 상황을 이해하고 몸을 던지기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도 잇따라 생겨났다.

밤이는 낙조가 평소에 가진 성정에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의 의지를 뒤흔들 정도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게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큰 가능성은 낙조의 몸에 뿌리를 내린 식물이었다. 처음엔 식충식물이 낙조의 신경과 의식을 함께 공유한다는 가설로 시작했다. 그러나 낙조의 감정과 의지에 따라 형상이 변하는 것을 확인한 후엔 새로 조합됐다거나 공식적인 이름을 달지 않은 식물을 살폈다.

완벽한 결과를 도출하진 못했기에 낙조에게 얘기하진 않았다. 붕어섬을 떠나면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 무리에게 자료를 조금씩 빼앗긴 탓도 있었다. 그래도 밤이의 머릿속엔 음절 하나 떠나지 않은 채 얌전히 놓여 있었다.

「호흡기엔 가습식물이 달라붙었고, 팔엔 식충식물, 피부에도 식물의 세포가 섞여 화상도 쉽게 아물어. 회복력이 빠른 이유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마 최근에 발견된 수중식물의 일부가 섞여 들어간 것 같은데……. 가장 알아내기 힘든 부위는 뇌야. 뇌에 뿌리를 내렸는지 확인을 해야 추측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간단한 검사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고낙조의 감정을 자극해서 반응하는 걸로만 확인해야 해.」

켈리의 지휘에 통솔된 충직한 수하처럼 시간을 보냈던 며칠, 밤이는 모두가 잠든 사이 낙조가 건넸던 피에 매달렸다. 그곳에 갖춰진 기구들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빨리 이용해야 했다. 사용한 흔적까지 모두 지우고 나면 아침이 됐다. 피곤함이 몰려 올 법했지만 한 번도 낮에 졸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몰래 관찰하는 그 며칠 동안, 낙조의 피에서 관찰되는 세포분열은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패턴을 갖고 있었으니까. 켈리라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자백과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 문장으로 매듭지을 수 있는 결론은 이거였다. 고낙조의 몸엔 식충식물 하나만 들어간 게 아니다. 이미 폐를 비롯한 내장들에 각각 성능을 추가시키는 식물이 달라붙었다. 인간의 신장에 뿌리를 내리는 기생초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애초에 인간의 몸속에서 발아하는 씨앗이 있다는 가정 자체가 우스웠다. 게다가 낙조에게 붙은 식물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환경 자체가 까다로운 녀석들이다. 각자 필요한 영양분과 시간도 다르고, 계절을 타며 수명도 다르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몸 하나에 달라붙어 기생과 공생을 한꺼번에 이룬단 말인가.

「심장과 뇌……, 거기에도 붙었을 거야. 뿌리가 아니라면 씨앗이 아직 발아한 게 아닐 수도 있어.」

타박, 타다닥, 탓.

불씨 하나가 밤이 옆으로 툭 튀었다. 번개가 꽂힌 것처럼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 밤이는 급하게 숨을 돌리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낙조와 변종을 겹쳐 보았을 때, 의심을 품게 되는 접점이 있다. 심장과 머리. 낙조에게 어떤 식물이 붙어서 켈리가 지시한 것보다 많은 양의 마약류 식물을 섭취했음에도 스스로 환각을 깨뜨릴 수 있었을까. 낙조도 뇌나 심장에 구멍이 뚫리면 정말 완벽하게 죽을 수 있을까. 변종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극한의 치명상을 입으면 숨이 끊긴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고칠 수 있다는 여지가 남은 존재였다.

“밤이, 누나…….”

연기 때문에 눈가가 매워지면서 눈물이 차오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밤이의 팔을 쥐었다. 밤이는 놀란 기색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얼굴 여기저기가 다 까진 지운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래도 심하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는 연기에 숨이 막히는지 계속해서 기침을 내뱉으며 밤이를 끌어 당겼다.

우리가 올라왔던 산길이 이렇게 생겼었나. 밤이는 지운의 힘에 이끌려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정신없이 낙엽을 밟다가 미끄러져 또 구르기도 했다. 두 사람을 붙잡으려는 건지 땅 위로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진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산의 끝이자 텅 빈 공터가 보일 때쯤 둘은 서로를 부르지도 못하고 그저 잡히지 않으려 달릴 뿐이었다.

결승선을 뛰어넘은 것처럼 숨이 가빴다. 둘은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져 헉헉거렸다. 지운은 몇 번 헛구역질을 하더니 위액을 뱉어 냈다. 밤이는 주저앉은 채로 등 뒤의 산을 돌아보았다.

불이 번지는 속도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흙이 아닌, 나뭇가지와 나뭇잎, 낙엽을 중심으로 번져 가는 게 보였다. 낙조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지운 또한 밤이에게 낙조를 보았느냐 물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망과 좌절이 뒤섞인 지운의 얼굴 위로 결국 울음이 도졌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고낙조가 확신하면서 얘기하진 않았지?’

밤이는 스스로에게 묻는 것처럼 조금 전의 대화를 회상했다. 「죽진 않을 것 같으니까 괜찮아요.」 낙조에겐 괜찮은 것도 참 많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낙조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밤이의 눈엔 모든 게 다 걸렸다. 그래 봤자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볼 때마다 그 누구보다 연약해지던 사람.

사람이 가장 작아지고 연약해지며 쉽게 죽을 수 있는 건 자연 앞에 섰을 때다. 인간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지 못하던 생명 또한 자연이 뒤틀릴 땐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연은 공평하다. 인간의 잣대로 속일 수 없다.

“지운아.”

“흑, 끄윽, 흐어어엉……, 누나…….”

“죽었겠지?”

“흐억, 윽, 윽, 흑.”

“불이 저렇게 사나운데……, 바로 옆에 있던 애가 살았을 리가 없겠지?”

밤이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지운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해화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산 전체가 새빨갛게 뒤덮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밤이의 진한 밤갈색 눈동자 위로도 점차 불씨가 메뚜기 떼처럼 지나갔다.

이 불이 지나가고 나면 알 수 있을까? 산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면 흙에 도대체 어떤 것이 뒤섞여 있는지 알 수는 있을까. 홍해화는……, 버린 걸까?

눈앞의 풍경이 아득하게 번졌다. 산불의 열기에도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더 태울 것이 없어 불씨마저 사라지고 나면, 새까맣게 그을린 뼈대가 드러날까.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을까. 아무리 피부가 열에 강하다고 하더라도 저런 불길에 휩쓸렸다면 가망을 걸 수가 없다. 화재에 휘말린 시신은 눈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인데. 밤이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여러 생각을 걸쳤다.

툭.

툭.

투두둑.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스스로 산불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몸에 차가운 게 떨어지는지도 몰랐던 밤이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가 목을 졸랐다가 손을 떼어 낸 기분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밤이는 옆을 돌아보았다. 눈이 팅팅 부은 지운 또한 멍하니 고개를 든 채 젖기 시작하는 산을 보고 있었다.

장마철도 지난 이 시기에 이런 폭우라니.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빗물이 떨어지는 곳이 아릴 정도로 거센 비였다. 비구름이 언제 몰려들었을까. 분명히 나무 꼭대기가 타들어가는 걸 보았음에도 하늘을 보지 못한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드센 산불이라고 한들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을 감당할 리 없었다. 점차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밤이는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일어났다. 지운도 그녀를 따라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의 생각은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다시 산길을 오르려 했다. 최대한 나무가 몰리지 않는 길을 찾는 도중에 밤이는 문득 기묘함을 느꼈다.

“홍지운.”

“……누나도 느껴졌어요?”

“내가 아직 미치진 않았구나.”

두 발 밑에서 약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밤이와 지운은 걸음을 멈추고 산의 중심을 올려다보았다.

“…….”

“…….”

비안개가 어슴푸레 올라오고 있는 도중이었다.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로 땅이 흔들리는 건 아니었으나 분명히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밤이는 젖은 손으로 눈가를 닦아 내곤 작게 입을 벌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지금까지 들어온 설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나올 법했다.

천지개벽이 이런 것일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산이 갈라졌다. 정확히는, 전에 나눴던 대화에서 들먹인 큐브처럼 움직였다. 고열을 받다가 갑작스럽게 비를 맞은 탓인지 산 전체에 큰 영향이 돌았던 건 확실했다. 산은 몸부림을 치듯이 이곳저곳을 꿀렁거렸다. 자신들만의 규칙을 어길 정도의 온도 변화였는지, 이곳저곳의 길이 엉키면서 두꺼운 나무가 어린 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땅속에 처박혀 있던 바위가 고개를 들고, 절벽을 만들어 내고, 뒤엉킨 채 죽은 이름 모를 식물의 뿌리들이 들춰졌다.

밤이는 여전히 산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더 생각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뒤에서 지운이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산에 발을 들이니 더욱 거센 진동 때문에 한 번 휘청거렸다. 황급히 기울어진 나무를 붙잡은 밤이는 뒤돌아서서 지운에게 외쳤다. 폭우 때문에 목소리가 갇혀 잘 들리지 않았으나 힘껏 외쳤다.

“너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뭘, 자세히 뭐가요! 오늘 있었던 일 전부 다 꿈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꿈이면, 꿈인데 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거면,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무슨, 무슨 말이에요! 잘 안 들려요, 누나!”

“고낙조랑 홍해화 살리자고!”

목숨은 한 개고, 저장된 세이브 포인트도 없고, 소지한 물품이라곤 몸뚱아리가 전부였지만 밤이는 다시 미로처럼 얽힌 길을 올라가보기로 했다. 꿈속이라면 온전한 상태의 그들을 마지막으로라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꿈이 아니라면, 미약하게나마 남은 숨결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었던 흙은 강한 빗물에 짓눌려 진흙이 되어 있었다. 비에 쓸려 나간 흔적이 많았다.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경사가 가파라졌다. 밤이는 거의 기어가듯이 산을 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꾸덕한 진흙이 차올랐다.

“헉, 허억, 헉…….”

마침내 끝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랐을 때, 밤이는 희끄무레 시야에 잡히는 어떤 덩어리를 발견했다.

“……홍지운! 빨리 와!”

밤이는 혹여 시선이라도 떼면 사라질까 싶어 눈을 부릅 뜬 채 지운을 불렀다.

자신이 올라온 곳이 산의 정상은 아니겠지만, 분명히 비슷한 고도를 가진 산등에 그 덩어리가 꼼짝도 않고 엎어져 있었다. 빗줄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이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낙조다.

고낙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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