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것은 사실 현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붉은 세상이었던 그 찰나의 환각 속에서 낙조는 무기력했다. 뻔뻔하게 낯짝을 드러내놓고 차를 마시는 켈리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죽은 이들을 보고 용서를 빌거나 구슬프게 울어 주지도 않았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바뀌어가는 순간마다 부정하기 바빴다. 자신이 내린 선택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그럴 수 없다고……, 믿고 싶었다.
낙조의 왼쪽 손목엔 아주 희미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화상 흉터가 하나 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 어른들 몰래 식당 정수기로 가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레버를 눌렀다가 데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필 겨울이라 두텁고 긴 옷을 입고 있어서, 엉엉 우는 낙조에게 식당에서 시끄럽게 운다고 호통을 쳤다며 엄마는 몇 번이고 그 흉터를 보면서 사과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사과할 일이었을까. 엄마도 몰랐던 건데, 소매를 걷어 볼 생각을 못할 수도 있는 건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교복 입을 나이가 되었을 때까지 사과를 했을까. 낙조는 항상 의문이었다. 그러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누군가 낙조의 화상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낙조는 엄마에게 들은 그대로를 얘기했다. ‘엄마가 항상 미안해 했어.’ 이야기의 끝은 항상 그 말이었는데, 처음 그 얘기를 남에게 했을 때의 기분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부모님은 고속도로에서 4중 추돌 사고로 크게 다치셨고, 중환자실에만 누워 있다가 이틀도 버티지 못하고 같은 날 돌아가셨다. 학교에선 항상 아침에 휴대폰을 걷었기 때문에 낙조는 수업을 듣던 도중 뛰어온 선생님의 손에 붙들려 병원에 갔다. 정확히는, 시신이 미리 옮겨진 안치실로 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부모님의 얼굴엔 작은 생채기뿐이라 알아볼 수 있었다. 낙조의 눈에 보이는 건 그 작은 생채기들뿐이었기에, 왜 그들이 죽었는지 단박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명 중환자실에서 나온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라고 얘기했지만, 정말 죽을지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까…….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부모님의 지갑과 옷 같은 것들은 장례식이 끝난 후 전달받았다. 학생이었던 낙조 대신 장례 절차를 밟은 이는 얼굴도 잘 모르는 먼 친척이었다. 그는 종이 쇼핑백에 낙조 부모님의 사고 물건들을 담아 건네 주었다. 마른 핏자국이 번진 신분증과 지폐, 찢어진 와이셔츠 소매, 피범벅이 됐는데도 남은 부모님의 냄새가 낙조를 그제야 울렸다. 장례 내내 멍하니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인부들이 땅을 팔 때도, 관 위로 흙이 채워질 때도 울지 않았던 낙조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울었다.
정말 혼자가 될 줄 몰랐으니까.
낙조의 이름 앞으로 배상된 보험금은 꽤 큰 금액이었고 명절에도 연락 한 번 않던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를 걸어왔다. 집을 찾아오기도 했다. 낙조는 등교하지 않고 모든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근 채 종이 쇼핑백을 끌어안고 시간을 보냈다. 결국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억지로 문을 따고 낙조의 집안으로 들어왔다.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어 낙조는 종이 쇼핑백을 빼앗긴 채 응급실에 실려 갔다. 새하얀 것들로 가득 찬 공간에선 저마다 깊이가 다른 고통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액을 맞으며 응급실에 누워있던 낙조에게 누군가 찾아왔었다. 그는 낙조의 통장 비밀번호를 물었다. 낙조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기에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냐며, 자신이 낙조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 줄 것이니 걱정 말고 말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낙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숫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복할 뿐이었다. 모른다. 남자는 결국 역정을 냈다. 어린 놈이 부모가 죽었는데 돈에 눈이 돌아갔다고, 미친 척을 하는 거라면서 소란을 피웠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나마 종종 연락하고 지냈던 사촌누나가 낙조가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집을 알아봐 주었다. 그녀는 낙조와 나이 차이가 꽤 났으나 어렸을 적부터 낙조를 잘 돌봐 주었고 유일하게 장례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낙조의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었다. 도를 넘는다시피 하는 어른들에게 큰소리를 내주기도 했다. 받은 보험금으로 월세 보증금을 냈다. 그렇게 큰 돈을 써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 집은 혼자 살기 편하고 조용했다. 대입은 포기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물한 살 생일을 맞이한 날이었다. 그녀가 찾아왔다.
남자친구와 결혼을 할 예정이라면서, 그녀는 청첩장을 낙조에게 건넸다. 화사하고 두툼한 종이 위에 인쇄된 누나의 이름이 어색했다. ‘매형이 너 보고 싶어 해.’ 누나는 쑥스러워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며칠 뒤, 누나와 매형 될 남자가 낙조의 집을 두드렸다. 남자는 소주와 음료수가 가득 든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어차피 너 성인이잖아.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해!’ 누나는 웃으면서 낙조의 소주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낙조는 입 한 번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남자는 넉살이 좋았다. 왜 그렇게 누나가 자신을 챙겨 주는지 알 것 같다며, 앞으로는 자신이 형 같은 사람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간이 팔팔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낙조는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취하지 않았다. 낙조의 기억에 남은 부모님은 소주를 싫어했다. 낙조 앞에선 기분 좋을 때만 맥주 작은 캔 하나를 나눠 마실 정도였다. 어른이 취한 모습은 매스컴에서나 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촌누나와 그녀의 남자친구의 취한 모습이었으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낙쪼야아, 어이구우우, 귀여운 내 새끼이이.」
「누나, 집에 가야지. 매형이랑 택시 타구 가.」
「태액시이? 히끅. 끅, 후아……. 아니! 누나 여기서 잘 건데!」
불규칙적으로 딸꾹질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던 그녀는 곧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었다. 남자와 단 둘만 대치하게 된 상황에서, 낙조는 다 떨어진 술 때문에 강제로 입을 다물고 주위만 둘러보았다.
「처남, 지내는 데 뭐 불편하진 않아?」
남자는 이미 서로 이름을 알리며 나눴던 안부를 뜬금없이 물었다. 낙조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시 정적이 돌았고, 보리가 종종 잠꼬대를 하듯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남자도 취기에 많이 휩쓸린 상태였다. 그는 길게 운을 띄우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웃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보리가 말한다고 하더니 결국 말을 못했네.」
「어, 편하게……, 편히 말씀하세요.」
「다른 건 아니고……, 우리가 다음 주에 집 계약을 하거든. 매매는 아니고 전세로. 근데 요즘 집값이 엄청 올랐잖아, 처남도 뉴스 보지? 부동산 값이 장난이 아니야. 나도 처남 나이 때부터 죽어라 일만 해서 돈 모았는데, 보리랑 대출까지 끌어도 좀 힘들더라. 은행에서 대출 받으면 신용점수 떨어지거든. 처남은 아직 그래도 회사를 안 다니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그 신용점수라는 게 말이야, 올리는 건 진짜 힘든데 떨어질 땐 말도 안 되게 떨어져. 뭐, 빚이야 갚으면 되는 거지만…….」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어? 어……, 음, 보리가 얼마랬더라, 한 5천, 아니다, 4천이랬나……?」
「내일 아침에 은행 가서 보내드릴게요. 제가 누나 계좌 아니까 누나한테 보낼게요.」
「내일? 아 내일 바로? 이야, 우리 처남 진짜 남자답다. 보리가 처남한테 얘기해 보자는 이유가 있었네.」
「그리고 어차피 안 갚으실 거 알긴 하는데, 양심에 찔리시면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남자는 얘기가 끝나자 술상도 정리하지 않고 취한 보리를 데리고 나갔다. 술병이 뒹구는 방바닥과 너저분한 테이블, 낙조는 부엌 형광등 아래서 새벽을 꼬박 지새웠다. 휴대폰 메모장 어플에 적어 둔 보리의 계좌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아홉 시가 되자마자 집을 나섰다. 출근을 준비하는지 아침 일곱 시부터 보리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계속 쏟아졌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송금을 마친 후 낙조는 보리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은행을 나오고 간 곳은 부동산이었다. 당시에 알바를 뛰던 동네가 버스로 한 시간 거리였기에 그 근처 원룸을 구했다. 우습게도 원래 살던 집 계약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4년을 넘게 살았으니 보리가 재계약할 수 있는 기간이란 걸 모를 린 없었다. 낙조는 방이 조금 더 작아진 대신 한 명이라도 서 있을 발코니가 있는 원룸을 선택했다. 집 가까운 곳에 편의 시설이 많아 보증금은 평수에 비해 비쌌지만 월세는 보다 덜 부담할 수 있었다. 이삿짐은 간단했다. 법적으로 나이도 성인이 되었으니 귀찮은 보호자 절차를 밟는 것들도 사라졌다.
낡아빠진 가구 몇 개는 포터 트럭에 태웠다. 모두가 일을 하러 집을 비우는 평일 오전, 낙조는 조용히 집을 떠났다. 돌아가며 그 동네에 머무는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던 옆집 문앞에 남은 고양이 사료와 간식, 그리고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라고 적은 메모를 남겼다. 혹시 몰라 그 지역 유기동물보호센터에 찾아가 동네 고양이들의 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같은 사람도 쫓아내지 못하는 사람을 돈은 쫓아낼 수 있다. 낙조는 그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같은 시간에 일하던 두 살 위의 형이 대부업체를 소개해 주었다. 일하는 시간은 비슷했으나 수당금이 붙으니 몇 달은 할 만 했다. 먼저 걸려 오는 전화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가끔 큰 액수를 빌리는 사람들이 연락하면 서류를 챙겨 그들의 동네를 방문했다. 이름, 생년월일, 휴대폰 번호, 통신사, 원하는 금액, 소득유무 등등. 하루에도 몇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신용정보를 확인하고, 전화하고, 문자를 돌리고, 출장을 나갔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원래 땅문서가 몇 개였는데, 자식 놈들이 다 쏙 빼먹었다면서, 이럴 거면 부모가 날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면서……, 출장을 나가거나 길게 통화를 할 때 종종 듣는 래퍼토리가 있었다. 빚에 짓눌린 상태에서 코앞에 놓인 독촉 당하기가 두려워 대부업체를 찾는 이들은 많았다. 나이, 성별, 직업 상관없이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며, 어떤 방법이든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안녕하세요, 저……, 현금이 좀 필요해서요. 카드 연체 기록이 있긴 한데, 신용점수가 그렇게 낮지는 않구요, 어, 그, 이혼소송……, 때문에 변호사를 좀 구해야 하는데 돈이 필요해요. 직장인이에요. 사대보험은 있어요. 국민연금도 몇 달 전까진 냈어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낙조는 가만히 전화를 듣다가 쎄한 기분에 ‘지금 급하게 전화할 곳이 있으니 이 번호로 양식에 맞춰 개인정보를 문자로 보내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여자의 문자가 도착했다. 사무실 팩스가 웅웅거리며 종이 몇 장을 토해 냈다. 낙조는 휴대폰 액정에 눈을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도착한 팩스를 확인했다.
고보리. 37살. 기혼.
낙조는 그때까지 함께 일하고 있던 형에게 보리의 정보를 넘겼다. 그가 출장을 나갈 때 낙조에게 같이 가겠느냐 물었으나 낙조는 가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 무슨 사연이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는 혀를 쯔쯔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편이 룸싸롱 여자랑 두집살림을 했대. 애도 둘이나 있는데. 뭐 여기까진 뻔하잖아. 근데 이 여자도 호빠를 들락날락한 거야. 사랑받는 기분을 느낀 지 너무 오래돼서 어쩔 수가 없었다나 뭐라나. 기가 막히는 건 남자가 먼저 소송을 했단다. 아내가 호빠 새끼랑 바람 났다고. 친정이랑 시댁에 다 불고 난리 쳐서 양육권 때문에 재판 간대. 애들만 불쌍하지, 애들만. 허이구.」
사람의 정이라는 게 참 각박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낙조는 보리에게 원망보다 연민이 먼저 들었다. 새벽 늦게 퇴근한 후 네 시간 눈을 감았다가 뜨고서 은행이 문을 닫을 쯤 집을 나섰다. 마지막 번호표를 쥐고서도 끝까지 고민했다. 띵동, 자신의 번호가 울렸다. 낙조는 보내는 이의 이름을 대부업체 대표 이름으로 바꾸어 보리에게 돈을 송금했다.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것은 길을 가다 작은 돌멩이 하나 찰 정도로 쉽다. 자신의 인생임에도 스스로가 절벽에 몰린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은 행복하다가도 느껴진다. 사람은 자신의 이상에 완벽한 삶을 살아도 영원히 해소하지 못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정확하게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그 애매한 감정 덩어리를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조차 두려워질 때쯤 사람은 가장 나약해지고 충동적으로 변한다.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저지른 후에 사람은 깨닫는다.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 후회한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이기에 탓할 사람은 또다시 자신밖에 없다. 더 이상 자신의 나약함을 견딜 수 없을 때 선택지는 점점 단호하고, 졸렬해지고, 가엾어지고, 잔인해진다. 인생의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바닥은 없다. 애초부터 없었다.
‘왜 그때 생각이 나지?’
낙조는 자신의 키보다 커진 불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낙엽과 나무 기둥을 갉아먹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낙조란 뜻이 뭔지 낙조는 알아?」
「엄마! 그 질문 이제 천 번째야.」
「그니까 뭐냐구.」
「떨어질 낙落, 비칠 조照! 저녁에 지는 햇빛! 노을!」
「‘떨어지다’라는 뜻도 있는데, ‘이루다’라는 뜻도 있어.」
「그럼 말이 안 되잖아. 비추는 것을 이뤄라? 빛을 이뤄라? 이상해.」
「엄마가 말했던 거 기억나? 빛은 꿈속에서만 볼 수 있다고. 너무 눈부셔서. 하지만 낙조가 정말 노력한다면, 보려고 한다면 현실에서도 볼 수 있어. 빛을 보게 되면 해도 볼 수 있을 거야.」
「과학 선생님이 사람 눈으로 태양은 볼 수 없댔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어. 신기하게도 사람은 그럴 수 있단다, 낙조야.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걸 너는 할 수 있고, 아무도 모르던 곳을 너는 찾아낼 수 있어. 꿈꾸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루면서 살아, 낙조야.」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사방이 불에 휩싸여 있었지만 낙조는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끔찍한 고통 중 하나가 불에 타들어 갈 때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통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조용해서 잊고 있었던 감각만이 요동칠 뿐이었다. 처음 병우와 방에 갇혀 팔이 변했을 때, 자꾸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홀렸을 때와 비슷했다.
낙조는 터덜거리며 겹겹이 쌓인 바위더미로 걸어갔다. 유일하게 불이 옮겨 붙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해화의 운동화를 찾았던 그 틈. 왜인지 자꾸만 눈길이 갔던 저 틈. 아무리 구겨 넣는다 한들 해화의 한쪽 발목만 겨우 들어갈 법한 그 조그만 틈이 신경 쓰였다.
오른손으로 가장 위에 있는 바위의 모서리를 짚고 위로 끌어 당겼다. 크기가 작은 편이긴 했으나 두께가 조금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단번에 들썩거리진 않았지만 아주 느리게, 낙조의 힘을 따라 들어 올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위를 조금씩 들춰낼수록 희미했던 목소리와 기운이 점차 선명해졌다.
“윽, 흐윽, 으아아아……!”
팔의 변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굵은 뿌리들이 튀어나와 함께 바위를 받쳤다. 부푼 혈관은 심장과 함께 요동쳤다. 변한 팔의 힘을 완전히 끌어모은다 해도 바위의 무게를 계속 지탱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낙조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툭, 투둑, 툭.
갑작스럽게 차가운 물이 몸 위로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낙조는 물기 때문에 미끄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호흡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빴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바위는 놓지 않았다. 낙조는 한 번 숨을 가다듬고서 다시 온힘을 다해 바위를 들어올렸다.
쿠구궁, 우드드드득, 쿵.
바위의 뒤에 있던 어린 나무를 밀어내고, 마침내 기둥을 꺾으며 바위가 뒤로 넘어갔다. 낙조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숨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쏴아-
나무의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간 불씨 위로 소나기가 내렸다. 첫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11월 중순이었다. 더운 지방은 아니었지만 온도가 낮은 산이라면 그럴 법 했다. 낙조는 눈을 못 뜰 정도로 거세게 내리는 폭우 사이에서 바위 아래에 깔려 있던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왼쪽 발에만 신겨진 와인색 운동화였다.
창백한 낯빛을 한 해화의 몸을 온갖 식물의 뿌리가 덮고 있었다. 뿌리들은 쏟아지는 빗물에 질색하며 꿈틀거렸다. 불길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려 하던 땅이 미약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낙조는 느린 속도로 바위 위를 천천히 기어서 해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물러나지 않고 해화의 몸을 꽉 얽매고 있는 뿌리는 오른손으로 잡아 꺾었다. 뿌리가 땅에서 뽑혀 나올 때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비명이 들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느 정도 해화를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헐거워지자, 낙조는 해화의 팔을 잡아 바위 아래 깊게 파여 있던 구멍에서 그녀를 들어 올렸다. 당장 스스로 산을 내려가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지쳤으나, 낙조는 해화를 등에 업고서 밤이와 지운이 사라졌던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홍해화가……, 눈을 감고 있었나?’
낙엽과 나무에 남은 불길이 낙조의 발걸음을 막아 세웠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물에 그마저도 제압당했다. 여진처럼 계속해서 흔들리는 땅 때문에 몇 번이고 중심을 잃을 뻔했으나 낙조는 넘어지지 않았다.
“헉, 하, 하아, 하…….”
빗물에 점차 사그라드는 불길 속에서 낙조는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꽤 걸었다고 생각했으나 밤이와 지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부를 기운조차 다 써 버렸다. 낙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올라왔던 산길을 바라보았다. 산불의 연기와 끝없이 대각선으로 그어지는 빗줄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낙조는 힘겹게 걸음을 떼어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 걸음도 오래 가지 못했다. 너무나 낯선 길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작은 진동이었기에 그 짧은 순간 동안 길을 바꿔 놓으리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낙조는 뜬금없이 나타난 오르막길을 앞에 두고서 숨을 몰아 쉬었다.
소나기는 반드시 지나간다. 오히려 불길이 빠르게 잡힌다면, 저 뿌리들이 해화를 되찾으려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수도 있었다. 낙조는 해화를 한 번 고쳐 업고서 오르막길에 발을 디뎠다. 축 늘어진 해화의 팔다리가 유독 차갑고, 등에서 아주 미약한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낙조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