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대리자
통조림 식사를 마치자마자 무흠은 일 층짜리 보건진료소를 들쑤시고 다니며 약이란 약을 다 쓸어담았다. 수호는 이불에 가만히 앉아서 그가 움직이는 걸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고낙조를 찾으러 간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정작 그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무흠의 기에 눌려서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묻지는 못했다. 정황 상 자신을 이곳에 내버려 두고 가진 않을 것 같긴 했으나 낙조를 무슨 목적으로 만나고, 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는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인가?’
그렇게 물끄러미 무흠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낀 무흠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용케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무흠은 작게 한숨을 쉬고서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어?”
“물어봐도 돼요?”
“사람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말고 얘기를 해.”
“고낙조 잡으러 가는 거예요?”
“…….”
항상 수호를 볼 때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던 무흠이 조용해졌다.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은 온화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인상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표정. 무표정에 가까우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 수호가 읽을 수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근데, 잡으면 어떻게 하게요? 청주로 다시 갈 거 아니잖아요.”
“‘잡는다’라……. 그 표현은 무례하네.”
“말투 진짜 영감탱이 같네…….”
“뭐?”
“속마음인데 말해 버렸어요. 죄송함다.”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면 간이 두세 배는 커지나? 수호는 친구들에게 굴었던 것처럼 편한 어투로 대답했다. 무흠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을 이유 없이 때리거나 못된 놈들에게 팔아넘길 것 같진 않아서, 라는 게 수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너는 청주에서 무슨 일을 했지?”
“정보원이었다니까요.”
“나에 대해 알아보라고 누가 시켰나?”
“……그건, 제가 말했잖아요. 몰래 해킹해서 본 거라고.”
“또 몰래 한 짓은.”
“선생님이에요? 꼬치꼬치 캐묻게.”
“있냐고 물었다.”
“……고낙조 임상시험 프로필도 봤고, 그 일행들을…….”
‘도와줬다’라고 얘기하려던 수호는 말을 멈췄다. 도와준 게 맞긴 한가? 아직 ‘악어와 새’의 리더가 켈리인 것을 모르는 수호는 그저 ‘더 위험한 곳’에 낙조와 일행을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껄끄러웠다.
“일행들을?”
“동선을 좀 봤어요. 어디에 있는지는 다 알았는데, 보고는 한 번도 안 했어요.”
“왜 그랬지? 명령 불복종 아닌가.”
“나는 청주에 끌려온 거예요. 부모님 안전한 곳에 옮겨 준다는 말만 듣고 따라왔어요.”
“본부가 너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쥐어 줬으면 일을 했어야지.”
“……완전 꼰대네. 처음엔 나도 이것저것 알아봤죠. 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근데 알아볼수록 가관이던데요. 아무리 똑똑해도 그런 식으로 머리 굴리는 사람들 돕는 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마 처음일 테다. 재앙이 시작되고서 자신의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청주에 그래도 꽤 오래 묵었던 만큼 그 안의 사람들과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이는 가장 어렸으나 연우의 제안으로 스카웃 됐다는 소문은 본부에 꽤 빨리 퍼졌다. 정보실 출입 권한을 연우가 조정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게 무흠과 탈출할 수 있으리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음에도 지운의 진짜 마음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라미에게는 어느 정도 털어놓았지만 그녀는 그저 귀만 열어 뒀을 뿐, 캄캄한 목적은 따로 가진 채 지운에게 접근했으니 있는 것만도 못했다.
“그럼 나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아냈지?”
“……당신이랑 내가 아는 게 다를 수도 있는데 뭘 말하든 내가 이상한 사람 되는 질문이네요.”
“생각보다 헛똑똑이는 아니군.”
“나는 무식하게 싸우진 않거든요!”
“나이가 어떻게 되지?”
“……왜요. 군대 안 갔다 왔으면 입 다물라고 하게?”
“흠, 헛똑똑이가 아니긴 하군.”
‘존나 짜증나 진짜.’
나름 중대 개원으로―행정병으로 불리긴 했지만 어쨌든―군 복무 기간 꽉 채웠는데. 수호는 ‘무식하게 싸운다’라는 표현을 너무나 직설적으로 받아들인 무흠의 반응에 한 마디를 더 얹고 싶었으나 꾹 참아 냈다.
사실 수호는 낙조보다 무흠에 대해 더 궁금한 게 많았다. 낙조야 어디서 임상시험을 당했고, 몸 상태는 어떻고, 혈액형은 무엇이고……, 기타 등등의 정보들이 프로필에 적혀 있었기에 그의 인생이 어땠을지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흥미를 돋우는 건 무흠의 행적이었다. 특히 무흠이 빼앗긴 붕어섬에서의 5년이란 시간은, 그저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이 재앙의 시작이 어디부터였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게 당연했다.
“고낙조를 잡은 후엔 뭐, 어디로 갈 건지, 뭘 할 건지는 생각했어요?”
“……계속 따라다닐 생각인가? 염치도 없군.”
“그쪽이 먼저 나 먹으라고 통조림 따 줬잖아요!”
“청주에선 조금 멀어졌지만 여기도 안전하진 않아. 그리고 네 안전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다.”
“아니 그럼 왜 구해 준 거예요?”
“용케 그 여자의 수하인 걸 눈치채고 탈출을 도와줬으니까. 딱 그 정도만 도와준 거다.”
“…….”
“부모님 걱정이 슬슬 될 텐데. 그 여자는 지금쯤 도착했을 거고, 네가 내 탈출을 도왔다는 정황은 CCTV만 봐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으니. 그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
무흠은 지나치게 이성적이었지만 그 상황에 항상 필요한 이야기였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수호는 조금 자란 손톱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어디 계시는지 정확히 몰라요. 내가 먼저 청주로 왔으니까.”
“본부 근처에 있는 지하 벙커에 계실 수도 있다. 본부 사람들의 가족은 다 거기에 있을 거야.”
“……내가 도망쳤다는 걸 알고, 고문, 고문했다거나, 그러진 않았겠죠?”
“본부 입장으론 뒤통수 얻어맞다 못해 빚지고 땅 빼앗긴 셈이니 모르지. 안 그래도 난리일 텐데, 네 호구조사 끝내고 시간까지 들여가며 고문할 정신은 없을 거다.”
“추측이죠?”
“넌 눈알을 뺐다 꼈다 하고 다니냐?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눈알 하나는 도로에 버려뒀겠지.”
무흠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그래도 수호의 걱정에 완전히 동요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위치 파악과 본부의 분위기까지 그는 대충 알 것 같다고 했다.
“근데 고낙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가요.”
“냄새가 나.”
“…….”
서연우한테 실험 받다가 미쳤나? 물론 그녀가 평소에 무흠을 ‘사냥개’처럼 다루고, 부르긴 했으나 무흠이 스스로 사냥개처럼 구는 모습에 수호는 입이 얼어붙었다.
“서연우가 나한테 고낙조 냄새를 각인시켜 뒀거든. 산에 개를 풀기 전에 사냥감 냄새를 먼저 맡게 하는 것처럼 말이야.”
“…….”
생각보다 무지막지한 실험을 당했구나. 수호는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안에 있는 집으로 가는 것도, 다시 청주로 돌아가 부모님이 무사하신지 확인하는 것도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것이 정답일지 무흠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양심과 정의, 두 가지 사이에서 수호는 선택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는데, 그 영웅은 어떤 마음에서 태어났을까. 영웅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영웅은 무엇 앞에서든 떳떳한가.
*
켈리와 면담을 끝낸 연우는 거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뭔가에 홀린 것 같기도 했다. 건물 안에서 비척거리며 걷는 연우를 곁눈질로 힐끔거리던 직원들이 종종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입도 열지 않았다. 그대로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가서, 연우는 텅 빈 무흠의 방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켈리는 연우에게 삼십 분 후 회의실에서 열릴 긴급회의에 꼭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엔 촉박한 시간이었다. 연우는 공허한 눈으로 바닥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만 돌리면 보였던 고통의 결과물. 내 연구의 산 증인. 그것이 없다. 연우는 그림자조차 들지 않는 무흠의 방을 힐끗 쳐다봤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가 바득 갈릴 정도로 화가 돋구쳤지만 당장 자신이 손 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거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힘과 지위, 모든 것을 가로챌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기도 전에.
금수호는 왜 백무흠을 따라갔을까. 평소 수호와 가까이 지내던 몇몇 직원들이 증언하기론, 그가 ‘절대 무흠을 도울 리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정보실에서 머리가 깨진 채 발견된 소장의 비서가 깨어나기 전까진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백무흠과 만난 적이 있을 리가 없잖아.’
연우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을 것처럼 꽉 붙잡고 손을 덜덜 떨었다. 자신이 어디부터 무엇을 놓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켈리라는 여자가 내민 호기심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와 동행하기로 한다면, 자신의 연구보다 그녀의 맹렬한 계획을 위해 노동하는 일개미가 될 게 빤했다. 이미 완벽에 가까운 백신 샘플을 만든 사람이, 왜 그동안 본부에도 오지 않고, 백무흠을 포기하고, 고낙조에게 목을 걸까……. 어째서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샘플을 확보하고, 고낙조를 길들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은 하지 못했던 모든 업적들이 켈리의 목에 걸려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연우는 충분히 괴로웠다.
‘목이 베이는 것보단 적장의 손을 잡는 게 나아. 나는 여기서 포기 못 해. 끝낼 수 없어.’
연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반복하며 눈을 부릅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리멍덩하던 눈동자는 다시 광기가 가득한 열기를 내뿜으며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그 여자가 날 믿을 때까지 모든 것을 서서히 빼앗고, 나랑 똑같은 처지를 맛 보게 해 준 다음, 없애 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여자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증명되면 내가 죽였다는 걸 알아도 날 쫓아내진 못할 거 아니야. 당연하지. 날 어떻게 쫓아내. 지들이 살려면 내가 필요한데.’
연우는 마침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오른쪽 눈에서 환희와 착각 사이에서 만들어진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고서 연구실을 나왔다. 회의실은 연구실에서 그리 멀지 않다. 회의실 근처까지 오니, 회의에서 자주 보던 간부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우를 보고서도 헛기침을 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는 회의실에 들어가 보란 듯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간부들이 놀란 눈치로 연우를 흘낏거렸으나 말은 걸지 못했다. 벌겋게 충혈 된 눈, 생기 없는 피부, 얼마나 물어 뜯었는지 피딱지가 뭉친 입술, 부러지고 갈라진 손톱……. 무흠에게 모든 시간을 쏟은 연우는 스스로를 한 번도 돌아본 적이 없었다. 그 누가 보기에도 그녀는 그저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지각한 분은 안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모두 간밤에 일어난 소동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곧 켈리가 그녀의 용병 한 명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목폴라 위에 가벼운 정장 자켓을 걸친 채 나타났다. 켈리는 소장의 옆에 앉았다가 연우와 눈을 마주했다. 일부러 연우가 왔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연우는 지지않고 그녀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 냈다. 켈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죠. 백무흠이 도망쳤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 엮인 인연은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죽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게 인연이고, 죄목이고, 그 이름과 함께 쓰인 시간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사라진다……, 얼마나 거창하고 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말입니까.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죠. 먹고 살기 바쁜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에 전전긍긍하게 된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제가 좋아하는 한국 사자성어가 있어요. 소탐대실. 그걸 깨달을 땐 이미 내가 내 인생에서 한 번 졌을 때였죠. 그래서 그렇게 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연민이 먼저 듭니다.”
켈리는 유창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녀의 말은 빠르지 않고 발음도 정확했으며 비틀린 방향으로 꺾이지도 않았다.
“소장님께선 서연우 씨에게서 팀장직을 파직하겠다고 하셨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에요. 백무흠을 저렇게까지 만든 게 누구예요, 서연우 씨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저렇게 열심히 하셨는데, 그런 사람을 저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저에겐 서연우 씨가 필요합니다. 서연우 씨를 제 팀으로 넣어 주신다면, 백신 샘플 제조 방법을 공유하겠습니다. 저와 서연우 씨는 얘기가 다 끝났으니까요. 그렇죠, 연우 씨?”
흙탕물에서도 무언가를 심을 수 있을까. 아스팔트에 뿌리를 내리려면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할까. 폭풍에도 꺾이지 않으려면 얼마나 단단해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