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95화 (95/202)

95화. 산불 (2)

밤이는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정리해야겠다며 차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지운은 해화의 운동화를 꼭 쥐고 산길을 내려왔다. 정확히 이해한 것들은 없지만, 낙조와 밤이가 나눈 대화만 보더라도 당장 해화를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도 해화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지운은 확신했다. 여태까지 수많은 형태의 죽음을 봤지만, 해화가 죽는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고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 생각했다.

밤이는 겨우 챙긴 자료 가방에서 이면지 한 장을 꺼내 몽당연필을 쥐고서 낙조와 나눈 대화를 간략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입으로 단어를 웅얼거리기도 하고, 종종 낙조에게 일어났었던 상황을 묻기도 했다.

“장난감 블록처럼, 이게 숨기고 싶은 위치를 감춘다……. 뿌리가 바퀴의 역할을 하려면, 일정하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게 되나? 서로 엉키면 그냥 칼국수 이어폰 줄 되는 거 아니야?”

“지들만의 규칙이 있겠죠. 그런 일 없게끔.”

“돌았네……, 하아.”

밤이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쉴 새 없이 문장을 써 내려갔다.

“지금 이 움직임이랑 비슷한 것 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대륙이동설?”

“……너 공부를 아예 안 하진 않았나 보다?”

“누나 딱 보면 몰라요? 완전 공부만 하면서 산 얼굴인데.”

“너는 진짜 가끔 보면 사람을 일부러 맥이려고 하는 게 있어. 방금 그 말 기만하는 거야.”

“아니 나 진짜 공부만 했다니까?”

“니가 진짜 공부만 했으면 내가 이렇게 돌려 말하는데도 알아들으면 안 되지. 아, 이렇게 보면 진짜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밤이는 낙조의 말 한 마디도 져주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글을 적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지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요. 판구조론.”

“오.”

“뭐야, 반응. 나도 놀라는 척해 주면 안 되나.”

“니 수의학과라매. 그럼 공부 쫌 했겠지.”

“그럼 지금 산……, 저 산을, 지구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그러고 보니까 김도연 잡혔던 산에서……, 지진 비슷한 게 있었지. 그리고 내려와 보니까 산이 조금 무너져 있는 것 같았고. 아직은 증거가 너무 부족하긴 한데, 저 식물들이 모인 산 같은 곳마다 핵이 있다고 가정을 하면……, 연약권의 대류에 의해 판들이 움직인다, 라는 말을 적용해서…….”

“그럼 뿌리가 바퀴 역할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고, 일단 연약권을 맡은 게 뭔지 알아야 하는데. 아니, 흙 속에 부분 용융이 있을 수가 있어요?”

낙조는 가만히 핸들을 쥐고 밤이와 지운의 대화를 들었다.

‘그동안 홍지운 입장이 이랬나.’

괜히 자아성찰을 한 번 하고, 낙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분 용융이 뭐야.”

“암석인데, 일부만 녹은 거야. 약간 젤리 같은? 그런 거. 유동성 있는 고체라고 생각하면 편해.”

지운은 친절하게 비유까지 덧붙여 가며 설명해 주었다. 낙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밤이가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재개했다.

“어, 발상의 전환을 좀 해야 해. 산을 지구라고 생각하면, 흙은 바다고, 나무나 뿌리내린 식물들이 하나의 판인 거야.”

“흙이 바다면 맨틀이고, 그럼 연약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저 안에 있다는 거잖아요.”

“어떻게 해서든 저걸 파면, 찾을 수 있을까.”

밤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차창 너머 산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낙조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서 이마를 긁적거렸다.

“진짜 지구라고 생각하면, 크기가 작아진 만큼 움직이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진 거네요. 그래서 몇 시간 만에 모습을 바꿀 수 있었던 거고.”

“그럼 홍해화가 말한 겨울잠은 뭐지? 빙하기 같은 건가.”

밤이가 의문을 제시했다. 마침 낙조도 마음속으로 걸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산의 봉우리만 응시하고 있을 때, 지운이 슬쩍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 너무 과몰입했어요.”

“맞아.”

“동의.”

낙조와 밤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고개를 저어 가면서 숨을 다스렸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 봐야 한다. 그걸 믿어야 해. 가설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확신해선 안 된다. 낙조는 핸들을 꽉 쥐었다가 손에 힘을 풀고서 고개를 돌렸다.

“계절이나 온도에도 영향을 받긴 하는 걸까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 추워지고 있기 때문에 ‘겨울눈’이라는 비유도 덧대 본 거고. 근데 두 개의 가설 다 말도 안 되진 않아. 억측이라고 해도 맞아떨어지는 게 많긴 하니까.”

“두 개를 합해 보는 건 또 너무 과몰입인가?”

“무슨 생각 했는데.”

“일 년. 그러니까 사계절이요. 그 계절 하나하나가 어떤 시대를 담고 있는 것처럼 의미를 짚는다면요. 뭐, 백악기, 빙하기, 청동기, 이런…….”

“고낙조 아까 니가 말한 그런 거라면 가능하지. ‘지들만의 규칙.’ 그게 있다면……,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랑 비슷하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거야. 지구의 역사와 똑같진 않아도 계절마다 보이는 풍경의 특징이 다른 것처럼. 산마다 산맥이 있고, 그곳에서만 피어나는 식물이 있고…….”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머리를 뭉치니 쏟아지는 가설들이 줄을 이었다. 낙조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잠시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낙조는 산을 빤히 응시하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홍해화 말을 토대로 생각해 본 건데요. 진짜 겨울을 나기 위해 잠든 거면, 억지로 깨워 보는 건 어때요.”

“깨운다고? 뭘 어떻게.”

“춥다고 들어갔으니까 따뜻하게 해 줘야죠.”

“…….”

“…….”

“불장난을 하시겠다?”

“누나, 표현이 좀.”

“니가 먼저 그렇게 말했어.”

낙조는 창문을 반쯤 내렸다. 밤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정말 흙이 단단하게 얼어 있는 것이라면, 불로 데워서 녹여 보는 건 어떨까. 불에 타는 것은 타겠지만 저들끼리의 움직이는 규칙이 존재한다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영향에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일단 땅을 파 봐야 하는 건 맞잖아요. 그러면 어떻게든 저걸 깰 생각을 해야죠.”

“불은, 낙엽 모아서 라이터로 지지냐?”

“그렇게 해도 되고……, 최대한 많은 곳에 불씨를 퍼뜨려야죠.”

낙조는 그렇게 말하고서 시동을 켰다. 차를 움직일 생각은 아니었다.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눈으로 대충 확인한 낙조는 시동을 다시 끄고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차 대피소 근처에 많던데. 아마 키 꽂힌 채 방치된 차 한 대쯤은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미친놈인가 진짜. 너 차 터뜨리는 거 영화에서만 봤지. 그게 그렇게 쉽게 터지는 줄 알아?”

“불씨를……, 주유구에 넣으면 안 되나? 바로 꺼지진 않을 거 아니에요.”

“미친 새끼…….”

밤이의 필터링 없는 비난이 날아왔지만 지운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낙조는 밤이를 불러 담배가 몇 개비 남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오만 인상을 찌푸리면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 미친 방법 말고도 불 지피는 방법은 많아.”

“폭발만큼 빠르고 크게 불을 지필 방법은 없잖아요.”

“폭발은 예술이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폭발하면 불나는 거지, 왜 예술이에요. 누가 그래?”

“아오 썅! 그래 써라 써!”

밤이는 질린다는 듯 대답하면서 남은 담배 개비를 낙조의 손에 넘겨 주었다. 총 네 개. 낙조는 수를 세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하나씩 넣을게요. 그러니까 나는 두 대 피울 수 있게 해 주기.”

“너새끼 씨발 그게 목표였지.”

“위험을 부담하는 만큼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캬, 고낙조 진짜 존나 뻔뻔해졌다. 처음에 눈치 존나 보면서 말도 못할 때가 귀여웠는데.”

“자, 자. 차 올라갈 수 있는 길 찾읍시다.”

낙조는 밤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라이터를 챙기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지운은 조용히 있다가 낙조가 시동을 걸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아저씨, 우리 누나도 불에 타면 어떡해?”

“절대 그럴 일 없어. 쟤네가 왜 홍해화를 데려갔겠어.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을 붙잡아 두고 같이 죽으려고 하진 않을걸. 입이 있는데 비명이라도 질러야지.”

“……누나를 포기할 수도 있잖아, 쟤들이.”

“홍해화가 일부러 쟤들한테 잡혀간 이유가 있을 거야. 지금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

“나무들이 누나 협박하면 어떡해? 막 아프게 해서……, 도연이처럼 만들면…….”

“홍해화 그렇게 순순히 당해 줄 사람 아니다.”

지운의 걱정이 과하다는 생각은 절대 없었다. 낙조도 걱정하는 부분 중 하나이긴 했지만 해화를 절대적으로 믿고서 벌이는 짓이었다. 천천히 악셀을 누르면서 지운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남자들이 빨리 죽는 이유 이거 진짜 내가 나중에 논문으로 쓰거나 해야지. 니네 둘은 그때까지 살아 있어라. 살아서 내 논문 보고 죽어.”

“누나 논문 보고 죽으면……, 논문 읽다 죽은 사람 되는 거죠.”

“아 개새끼 진짜 존나 능구렁이 됐어. 붕어섬에 콱 걍 가둬 놓을걸.”

밤이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 곧이어 낙조가 브레이크를 서서히 밟았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길목이 보였다. 단 몇 시간 만에 이곳저곳이 바뀐 산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 산이 자신들을 잡으려고 모르는 척 만들어 놓은 길 같기도 했다.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상황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차는 쉬지 않고 덜컹거렸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며 만들어진 길 같진 않았다. 이 길도 다 다른 길들이었을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둠과 동시에 의심을 놓쳐선 안 됐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오랜 시간 동안 매달려 있으려니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밤이와 지운 둘 모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당장 모든 것을 알아내기엔 가진 정보가 하나 같이 추측에 기댄 것들뿐이라 사실과 정반대일 수도 있었다.

‘이쯤이면 될 것 같은데.’

더 이상 올라가면 가파른 경사 때문에 오히려 차를 붙잡고 있는 것도 힘들 듯했다. 낙조는 핸들을 틀어 기둥이 꽤 두꺼워 보이는 나무에 차를 기대어 두고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밤이가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렸고, 지운이 남은 짐을 챙기곤 밤이를 따라 내렸다. 운전석 문이 나무에 걸쳐져 있었기에 낙조는 조수석으로 건너 내려야 했다.

“주유구 열었어?”

“네.”

아무리 장난스럽게 대화를 했다고 해도 당장 벌일 짓은 웃을 정도가 아니었다. 낙조는 밤이와 지운에게 담배를 한 개비씩 건넸다. 자신의 마지막 돛대는 주머니에 꽂아 두고서, 낙조는 둘의 담배에 불을 나란히 붙여 주었다.

“근데 너는 어떻게 피할 거야.”

한참 말도 없이 각자 담배를 물고 있을 때 밤이가 입을 열었다. 낙조를 향한 질문이었다. 낙조는 안개처럼 시야를 가린 나무들을 보면서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죽진 않을 것 같으니까 괜찮아요.”

“지랄도 풍년이다. 간이 커진 거야, 아니면 폼 잡는 거야?”

“아, 백 중사님이었으면 막 또 ‘제가 목숨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걱정해 줬을 텐데.”

“……갑자기 그 사람 얘기는 왜 한대.”

“몰라요. 무뎌졌나 이제? 무뎌질 만한 그런 게 있긴 했나 봐요, 뭐.”

낙조의 담배가 가장 빨리 타들어 갔다. 괜히 다급해진 밤이와 지운은 빠르게 꽁초를 만들어 낙조에게 건넸다. 낙조는 서로가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기 위해 계속해서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을 때, 호흡을 잘게 다졌다.

시동이 잘 켜져 있는지 확인한 후,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에 넣어 둔 마지막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일 손이 없어 자작자작 타들어 가고 있던 누군가의 담뱃불을 맞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불씨가 낙조가 문 담배로 옮겨 오면서 조금씩 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작은 불씨다. 눈 한 번 깜박이는데 반짝, 하고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작다. 낙조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손을 느끼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해 가뭄이 심했었나. 여름에 비가 많이 왔던가. 태풍의 이름이 뭐였더라.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건조해지는 시기마다 항상 들이닥쳤던 ‘산불 피해’ 뉴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산맥의 방향과 바람까지 흐름에 맞게 움직여 준다면, 아마 우주에 가서도 보일 만큼 불은 크게 퍼질 테다.

숨이 가빠졌다. 담배 냄새 가득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흡연을 했다고 하기엔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줄담배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숫자였다.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두통이 오는 건 당연했다. 숙취 가득한 상태로 깨어나 빈속에 담배부터 꺼내 문 기분이었다. 낙조는 꽁초들을 쥔 손으로 자신이 문 것까지 쥐고서 기침을 토해 냈다.

‘이것들이 쇼를 하네.’

낙조는 귓속이 먹먹해지며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웃을 수 있었다. 팔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으나 알 법 했다. 위험을 감지한 무언가가 산에 뿌리내린 것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마치 집을 지키려는 경비병 벌처럼, 사납게 낙조를 위협하면서 집 안에 있는 이들에게 신호를 주는 것이다.

“아래로 뛰어!”

낙조는 밤이와 지운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힘껏 외쳤다. 그들이 듣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낙조는 꽁초를 주유구 안으로 던져 넣었다. 꽁초를 던지는 순간 알았다. 자신이 도망칠 힘은 없다는 걸. 보이지 않는 손과 갈퀴, 나뭇가지들이 자신의 두 발을 꽉 붙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 씨발. 안경 또 고쳐 달라고 해야겠네.’

낙조는 두 눈을 감으면서 설핏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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