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선악과
“이게 전부예요?”
“……네.”
“그것도 참 놀랍네요. 고낙조, 홍해화, 백무흠까지 잡아 놓고서 성과를 이 정도밖에 못 내다니.”
켈리는 별 감정 없이 말을 내뱉었다. 연우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입안으로 혀를 말아 물었다.
“게다가 백무흠은 스스로 탈출하기까지 했다……, 해커까지 데리고.”
“당신이 본부에 사람을 심어 놨다는 걸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죠?”
“설마 백무흠 놓친 이유를 나한테서 찾는 건가? 서연우 씨에겐 연구원의 양심이란 것도 없나요?”
“양심이고 뭐고! 우리까지 속여서 대체 뭘 하려고 했는데!”
“속인 게 아니라 당신들이 너무 안일했던 거지. 자기들끼리 벽 하나 세워 놓고 안전하다면서 연구 게을리한 게 왜 내 탓인지 모르겠네요?”
켈리는 목을 완전히 덮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낙조에게서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연우가 반강제로 보여 주게 된 그동안의 연구 일지를 뒤적이면서 속이 빤히 보일 정도로 웃었다. 켈리가 ‘악어와 새’에서 가져온 백신 샘플은 연우가 그간 일구어 낸 백신보다 훨씬 더 효과가 빨랐고 유지력도 대단했다. 그녀를 따라온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켈리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이 낙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나마 켈리의 백신을 접종한 용병들과 겨우 살아남은 몇 명이 전부라고.
“소장님께서 서연우 씨한테 내 얘기를 안 한 것도 아니라면서. 다 들었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게을렀지? 그 군인 하나 잡았다고 어깨가 들썩거리든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껄이지 마. 당신은 백무흠을 그저 실험체로 쓰다 버린 거였잖아. 나는 그 사람을 정말 가치 있게 만들어 놨다고.”
“주인 배신하는 버릇도 서연우 씨가 들였겠네요.”
쾅!
켈리의 목소리는 겉으로 듣기엔 다정했지만 뾰족한 칼날이 무수하게 뻗쳐 있었다. 듣다 못한 연우가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미 자신의 능력을 폄하하다 못해 농락까지 하는 그녀의 말에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몇 날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기록해 둔 종이들이 켈리의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왜 백무흠을 버렸겠어……, 그 남자는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고낙조는 아니란 말이죠. 백무흠한테 서연우 씨가 그동안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까워 죽겠어.”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고낙조한테 당했잖아. 나한테 그런 얘기 하는 거 안 부끄러워요?”
“네. 나는 놓치긴 했어도 고낙조에게 제대로 각인은 시켜 줬거든. 주인이 누군지. 다시 만날 때쯤엔 날 보자마자 무릎을 꿇을 거예요.”
“뭐 때문에 그렇게 당당해요?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실험들, 야만적인데다가 불법이고―”
“―하하하, 이렇게 멍청한 연구원이 있나. 안타깝네요. 말이라도 잘 통하면 잘 가르쳐 주려고 했더니.”
“당신한테 배울 거 없습니다.”
“또, 또 그런 말……. 똑똑해 보이려는 인간의 특징인가? 열등감이 비쳤을 때, 인정하지 못하고 발악하는 게.”
켈리는 마지막 종이를 펄럭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우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저들을 내쫓아 버리라고 소장에게 항의하고 싶었으나 더 이상 자신에게 그런 힘은 없다는 걸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
‘다 비정상이야. 모든 게 다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이미 다 짜 놓은 것처럼 움직이잖아. 애초에 계획된 거 아니야? 이런 상황까지 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우는 몸을 굳혔다. 무흠이 수호를 데리고 탈출함과 동시에 연우의 모든 연구 결과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부에서 흘렸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잃을 것조차 없었다. 낭떠러지에 가까스로 두 발을 걸친 마음은 위태롭게 흔들렸고,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의 울음마저 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흠이 탈출하고 곧장 수색대가 나뉘어 언덕 근처를 뒤졌고 스키드마크를 따라 쫓아가기도 했지만 결국 찾진 못했다. 매캐한 매연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수호의 정보실엔 소장의 비서였던 여자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머리가 꽤 크게 찢어져 오랜 수술을 했다.
여자의 수술이 거의 끝나갈 무렵 켈리가 청주 본부에 도착했다. 그녀도 오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는지 입고 있던 옷이 조금 더러워져 있었으나 꼿꼿한 태도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장의 안내대로 좋은 숙소를 배정받은 후 그녀는 곧장 연우와 그녀의 연구일지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끌려오다시피 한 연우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일지를 켈리에게 내밀 수밖에 없었다. 켈리는 작정이라도 한 듯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는 단번에 알았다.
가학적이고 징그러운 사람이다. 그게 켈리를 향한 연우의 첫인상이었다.
“당신 수하라던 여자는 왜 백무흠을 풀어 줬죠? 그것도 당신이 시킨 거. 맞죠?”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나 보네요.”
켈리는 다리를 꼬고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연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갑고 소름끼쳤으나 그런 시선에 주눅이 들 연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테이블 위로 조금 더 상체를 기울였다.
“왜. 왜 그랬어요?”
“아까 내가 말했잖아요? 백무흠은 한계가 너무 잘 보이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 갖고서 뭘 하겠다고……. 고낙조 잡으려고 그런 돈을 들였어요? 덫에 안 꼬이면 덫의 위치나 주변 환경을 살펴야지, 왜 덫만 늘리는지, 참. 서연우 씨, 이제 정신 좀 차리셔야 하지 않겠어요. 고낙조랑 그 붙어 다니던 여자 둘로 백신 만드는 게 목표라면, 그냥 여기서 나가세요.”
“자꾸 그렇게 빙빙 얘기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얘기하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목표가 뭔데!”
“시끄럽네, 정말…….”
켈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가 눈을 치켜떴다. 새파란 눈동자가 거침없이 연우를 갉아먹었다. 그녀는 연구일지 폴더를 완전히 덮고서 연우에게 도로 내밀곤 입을 열었다.
“이 멍청한 여자야, 잘 들어. 나는 인간을 위해서 일하지 않아. 알아들어? 내가 살려고 하는 이유는 너 같은 멍청한 인간을 살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인간은 그동안 너무 호화롭게 살았어. 빼앗고 뜯어내고 쉽게 즐길 수 있는 것만 좋아했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짓을 못한단 말이야. 소수는 그렇게 살았겠지.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소수만 언제 걸러내니? 벌들의 세계에서도 그래. 산란하지 못하게 된 여왕벌은 가차 없이 일벌에 의해 쫓겨난다. 아니면 죽든지. 살아남으려면 제 몫을 해야 해. 스스로가 사회에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고.”
“당신 말은……, 인간 사회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지구에 살았어. 멸종위기라며 동식물을 지정하고 관리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파괴하는 주범 또한 인간 아니겠니. 무슨 권한이 있어서 인간이 그럴 수 있었을까?”
켈리의 눈은 광기에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연우의 얼굴을 가까이 대고서 속삭이듯이 자신의 생각을 입으려 흘려 냈다. 연우는 그녀를 뿌리치고서 도망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켈리의 이야기는 어딘가 불편하면서도 달큰했다. 사람을 이끌리게 하는 호기심을 무차별하게 자극했다.
“그럼 당신은, 무슨 권한이 있어서 인간 사회를…….”
“나? 보면 모르겠어?”
켈리는 눈을 크게 뜨고 조금 더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연우의 턱을 꽉 쥐고서 도망치지 못하게 잡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서로의 숨소리가 너무나 가까이서 섞여 들어갔다.
“인간에게 얽힌 모든 걸 해방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나는.”
*
“여기야?”
“어.”
등산길 입구까지 안개에 싸인 산은 밤에 봤을 때보다 훨씬 높았고 우람했다. 등산길 근처에 차를 주차한 후 옷을 여몄다. 뚝 떨어진 온도가 살갗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고낙조.”
“예.”
“그러고 보니 너한테 안 물어봤다. 너는 못 느꼈어? 원래 주위에 변종 있으면―”
“―김도연 때는 조금 느껴졌는데, 위치를 파악하진 못했어요. 어젯밤엔……, 정말 아무것도 못 느꼈고요.”
“잠들면 아예 페로몬 자체가 사라지나…….”
밤이는 낙조의 대답을 듣고서 흠, 하고 길게 신음을 흘렸다. 지운은 차에 가방을 두고 내린 후 등산길 초입에 발을 내밀었다.
“홍지운.”
“어어?”
“무턱대고 어딜 가.”
“……아저씨 누나 어디쯤에서 사라졌는지 기억해?”
“너무 어두웠어서 위치는 잘 몰라.”
괜한 희망을 심는 것보다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 옳다. 낙조는 안경알에 입김을 불어 닦아 낸 후 앞장섰다.
‘홍해화가 식물과 교감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산 하나를 통째로 잠들게 했잖아. 분명히 겨우 잠들었다고 홍해화가 그랬는데, 그럼 홍해화를 데리고 간 놈은 뭐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해화는 분명 어디로 빨려가기 직전, 노래를 끝마친 후 ‘겨우 잠들었다’라고 말했다. 밤이 말대로 페로몬까지 흘리지 않아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면 해화를 낚아챈 놈은 왜 잠들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그놈만 깨어 있었는데 홍해화가 알고서…….’
정확한 대답이 나오기 직전까진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편이 좋다. ‘왜’라는 의구심이 가끔은 알 수 없는 지점에서 힌트를 내어 주기도 하니까.
‘홍해화가 그놈은 차마 못 재운 걸 수도 있어. 힘을 쓰는 법을 스스로도 잘 몰랐잖아.’
밤이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한 것은 분명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 낙조가 아는 해화의 선택은 그렇게 해석됐다. 자신 또한 처음 능력이 발현됐을 때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막무가내로 달려들었으니까. 그나마 자신은 발현되지 않더라도 힘을 쓸 수 있었다면, 해화는 자신과 달랐다. 육체적 힘과 정신적 교류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해화가 신체의 어느 부분으로 식물과 대화를 나누는 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의문을 품는다 한들 정확한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이쯤이야.”
한참을 올랐을까, 조금씩 몸에서 땀이 날 무렵 밤이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녀는 아주 확실하진 않더라도 이 부근이 맞다고 주장했다. 주변에 나무가 꽤 많았고 등산길이 갑자기 험해지는 구간이었다는 기억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럼……, 그렇게 빠른 속도로 사라질 수 있으려면 그럴 만한 공간도 필요하니까, 조금 뚫린 곳이겠죠?”
“아무리 봐도 김도연처럼 땅으로 꺼졌다거나 위로 잡혀간 건 아니야.”
“홍해화를 사냥감으로 생각한 건 아니에요. 일단 대화가 됐으니까, 뭔가를 얻기 위해서…….”
밤이와 서로 혼잣말을 하듯 대화를 나누다가 낙조가 문득 고개를 한 방향에 두고 말을 멈췄다. 그는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낙엽 더미를 밟으면서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홍해화 신발 아니야?”
바람에 깎이다 만 바위틈 사이에 비죽 튀어나온 운동화 끈에 이목이 끌렸다. 손을 뻗어 조금 때가 탄 끈을 움키고 잡아당기니 해화가 신고 다니던 운동화가 끌려 나왔다. 목이 짧은 와인색 운동화. 지운은 낙조가 든 운동화를 보자마자 낙조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왜, 왜 여기 있지?”
“이쪽으로……, 끌려갔을 리가 없는데.”
낙조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바위틈을 응시했다. 조금 멀찍이 서 있던 밤이가 다가와 바위를 살폈다.
“이거밖에 없었어?”
“네.”
“핏자국이나 그런 건 없어. 사람 몸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 같은 것도 없고.”
“그럼 이게 왜 여기…….”
“고낙조?”
혼자 중얼거리던 낙조가 문득 입을 닫았다. 그리고선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상하다 싶었는지 밤이가 쪼그려 앉아 낙조와 눈을 맞췄다.
“그때, 도연이 잡혀갈 때……. 땅이 움직였잖아요.”
“…….”
“만약에 홍해화를 잡은 게 뿌리라면 말이 되지 않아요?”
“흙에 파묻혔다는 증거가 없잖아. 저기부터 여기까지, 지금 땅이 얼어 있어. 못 느꼈어? 완전 단단하다고.”
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 밑창으로 흙을 팍팍 차대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낙엽에 덮여 있던 흙은 얼음처럼 단단해져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낙조는 짚고 있던 바위에서 손을 떼어 내 땅을 매만져 보았다. 팔에 힘을 실어 아무리 눌러 봐도, 손톱으로까지 긁어 봤지만 땅은 갈라지지 않았다. 손톱에 끼는 알맹이가 조금도 없었다.
“산 자체가……, 이렇게 갑자기 얼 수가 있어요?”
“말이 안 되지.”
“……누나, 만약 이게 껍질이라면요.”
“껍질?”
밤이가 조금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낙조는 다시 해화의 운동화를 주웠던 바위틈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겨울눈, 이라고 하나요? 식물들이 겨울나기를 위해서, 만들어 두는 게…….”
낙조는 멍하니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구멍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밤이는 낙조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는 떡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지운만이 그 대화에 끼지 못하고 ‘겨울눈?’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울눈은 나무의 겨울나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만들며, 포근한 겨울눈 속에 잎이나 꽃을 저장한 후 겨울이 끝나면 싹을 틔운다. 겨울에 종종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매달린 봉오리를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이 겨울눈이다.
“껍질……, 껍질 같은 겨울눈이면, 동백나무. 동백나무 겨울눈이랑 제일 겹쳐.”
밤이는 숨을 터뜨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마를 짚고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저씨, 겨울눈이 뭔데 그래? 어?”
“너가……, 식물이 어떻게 잠드냐고 했지.”
“…….”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해 두꺼운 옷 같은 것을 입는 거야. 식물이. 그 안에 미리 봄에 틔울 새싹을 준비해 두고.”
낙조가 혼자 살던 원룸 빌라 뒤쪽엔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꽤 오래 된 나무들이었는지, 잎이나 꽃을 피울 때마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마다 사진을 찍는 소리를 들었던 걸 기억했다. 겨울에 가끔 세탁기 하나 들어가는 발코니에 나가면 낙조의 눈높이에 딱 맞는 동백나무의 겨울눈들이 창문에 걸쳐져 있었다.
“동백나무 겨울눈은 다른 애들이랑 달라. 여러 겹의 비늘, 단단한 비늘로 뒤덮여 있어서…….”
밤이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땅을 찍어 내렸다. 콱, 콱, 꽝꽝 언 호수를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무리 힘을 써서 긁어 보아도 알맹이는 좀처럼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누나가 땅속에 있다는 거 아니야? 어?”
지운은 이해를 다 마치기도 전에 벌어지는 눈앞의 광경에 지레 겁을 먹은 채 낙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낙조는 멍하니 바위틈만 바라보다가 미친 듯이 땅을 파려고 하는 밤이를 불렀다.
“누나, 잠깐만요.”
숨을 헐떡이던 밤이가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익은 얼굴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아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그녀 스스로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
“제가 아까 말한 거……, 생각해 봐요.”
“뭐, 뭐를.”
“땅이 움직인다는 거. 박힌 뿌리들이 바퀴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이 흙은……, 돌아갈 수 있어요. 어느 방향이든.”
“…….”
“어젯밤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왔을 순 있지만, 바위가 여기 없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낙조는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밤이는 손에 꽉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떨어뜨렸다.
“……홍해화가 끌려가면서 놓친 운동화가 바위틈에 있는데, 그럼 분명히 바위에 부딪히거나 그랬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없잖아요. 이 바위를 넘어서 갔다고 해도 사람이 끌려간 흔적 자체가 전혀 없어요.”
낙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바위를 짚고 넘어서 맨 위에 올랐다. 아직 정상까진 한참 남은 길이었지만, 유일하게 낙엽더미가 흩어진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몇 시간 만에 흙이 움직인 거예요. 큐브를 맞추는 것처럼, 일부분만, 조금씩, 조금씩…….”
해화는 땅속에 있을까. 이 산의 핵은 도대체 무엇일까. 해화가 유일하게 재우지 못한 것. 그녀를 어떤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잡아간 그것. 바이러스를 퍼뜨린 주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