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인생의 번지점프
수호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누가 갑자기 쾅 하고 나타나서 하하하 깜짝 카메라였습니다 하는 게 차라리 개연성 있다.’
라미가 벌인 행동은 조금 전 사육사가 우리 안으로 고기를 던져 주었고, 두 눈으로 고기를 갈기갈기 찢는 걸 봤으면서, 맹수를 풀어 주다 못해 잠자는 곳까지 손수 끌고 온 격이었다.
‘무슨 얘기 했는지 진짜 궁금하다. 하 근데 물어보기 쪽팔리니까 먼저 얘기해 줄 때까지 걍 있자.’
라미는 정보실을 나설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여전한 얼굴과 표정에 자신을 대할 때와 비슷한 말투로 무흠을 대했다. 수호의 눈에는 라미가 굉장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장단을 쉽게 맞춰 주기 힘들었다.
“수호 씨 아직 이해 못했어요?”
“뭘요?”
“탈출 대작전!”
“무슨 애니 극장판 부제도 아니고…….”
해맑은 라미의 행동에 더불어 무흠의 존재가 섣불리 화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실이 끊긴 관절인형처럼 축 늘어진 수호는 간간이 무흠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미친 척하면서 무흠에게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 불쑥 들기도 했다.
“백무흠 씨 눈에 걸리면 다 탈락되는 거예요.”
“누가요?”
“여기 사람들이죠.”
라미는 잔잔하게 깔려 있던 미소를 찬찬히 지우고서 수호의 두 번째 컴퓨터에 손을 댔다. 자연스럽게 CCTV 창을 확인한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서연우 팀장님이 가장 먼저 알아채셨네요.”
“……설마 탈락이, 막, 죽이고, 그러는…….”
“그건 백무흠 씨 마음대로!”
‘싸이코였나? 나 지금까지 싸이코랑 마음 잘 맞는다고 진지하게 속 털고 그랬던 거야?’
라미의 대답에 수호가 그대로 얼어 붙었다. 라미는 가만히 수호를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이곳 사람들이 싫어요.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나 변했는데 다들 아직 우물 안 개구리구나, 싶어요. 그냥 땅 크기만 좁아진 거예요. 안은 다 똑같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은 가치가 있으니까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거.”
“그게, 그게 사람들 떼죽음 당해도 되는 이유예요?”
“수호 씨 그동안 몰래 기밀 문서 확인하고, 네트워크 해킹하고, 그랬던 거 내가 왜 말 안 했게요?”
“…….”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란 생각을 하면 틀린 거예요. 당신만큼 똑똑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아요.”
“그럼 왜 나는, 살려 두는 거예요?”
“우리가 수호 씨를 찾아온 이유랑 겹쳐요. 백무흠 씨를 알고 싶어 했으니까.”
“…….”
“저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대려고 하고, 그러면서 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라미는 오랫동안 쌓아 둔 얘기를 하듯 거침없이 말을 풀어 냈다. 미소가 항상 머물러 있던 입가는 일자로 다물려 있었고, 단정한 앞머리 아래 뜨인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조금, 비틀린 채로.
‘그런데 왜 우리라는 말을 쓰지. 자기 의견 얘기하는 것 같지가 않잖아.’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건 인간이잖아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걸요.”
“라미 씨 논리라면, 라미 씨도 필요 없는 목숨인데요.”
“조금 더 생각을 하고 말해요. 내가 어떻게 백무흠 씨를 데려올 수 있었을지.”
수호는 긴장을 놓지 못하고 시선을 굴리다가, 문득 라미의 뒤에 서 있는 무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주 조용히, 수호와 눈을 마주친 채 입술을 움직였다. 라미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켈……리.’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입안에서 혀를 굴려 본 수호에게 단어 하나가 떨어졌다. 하루 동안 가장 많이 듣고 말했던 이름이었다. 수호는 시선을 라미에게로 돌리곤 숨을 간간이 내뱉으며 말했다.
“성라미 씨 말 다, 이해했어요.”
“벌써요?”
“……그리고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지도 알겠고요.”
“시간을 끌어요?”
자신의 말을 따라하는 목소리에 소름이 섬짓 돋았지만 의연하게 굴어야 했다.
무흠이 순순히 정보실에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 라미가 정보실에 온 이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지금 이 상황까지. 무흠이 자신에게 내 준 하나의 과제였다. ‘켈리 화이트’라는 이름을 알고 있던 자신에게, 기밀 문서에 적힌 ‘K 박사’의 존재와 일치시킨 자신을 믿고 내어 준 과제.
라미는 무흠을 우리에서 꺼내 준 것이 아니다. 마취를 해 놓고 질질 끌고 나온 거지.
“제가 몰래 기밀 문서 본 거 아시니까 무슨 말 하는지 알 텐데요.”
“정확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의심하지 않게.”
“켈리 화이트……, 라는 분이 여기로 오고 있잖아요?”
“네.”
“그 분이 도착할 때쯤 무흠 씨 눈을 뜨게 해 줄 생각이고.”
“와, 맞아요.”
“그럼 무흠 씨는 자연스럽게 켈리…… 이이의 말을 따르게 되겠죠.”
“정말 다 이해하셨네요!”
퍽.
라미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한 채, 등 뒤로 손을 뻗어 전화기를 움킨 수호가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날렸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때려본 적은 처음이라 쓰러뜨리고도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와장창, 그대로 박살 난 전화기 부스러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큰 그림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악!”
“끝난 게 아니야. 그 여자가 오면 물거품이다.”
“……켈리요?”
“이름 같은 거 갖다 부르지 마.”
“넵.”
확실히 지금까지 라미에 의해 억제당하고 있었는지 무흠은 한결 가벼워진 몸짓으로 움직였다. 전화기가 부서졌으니 정보실에 아무리 전화를 걸어본다 한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수호는 CCTV를 확인하며 건물에 남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체크했다.
“서연우가……, 어디 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차장이 어디야.”
“그, 운이 좋게도 바로 건물 뒤라네요.”
“…….”
“제 말투가 원래 이래요.”
무섭게 생긴 사람에게서 따가운 눈총을 받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잔챙이들 상대할 시간 없다. 빨리 나와.”
“저도 가나요?”
“여기 남아서 이 여자 쳤다고 자수하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저는 정당방위입니다.”
‘금수호 진짜 개찌질해! 완전 강약약강의 표본이다 하지만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머릿속에서 줄줄 새는 것 같은 속마음을 다시 저 구석에 꾹 짓누르고서, 수호는 무흠의 뒤를 따라 정보실을 나왔다. 다른 곳에서도 CCTV를 확인할 수 있기에 연우가 자신들을 찾는 것따위 시간 문제겠지만, 어찌 됐든 무흠이 연우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는 것은 확인했으니 그리 두렵지 않았다.
“근데, 왜 지금까지 서연우 말 들어 주신 거예요?”
아차.
수호는 내뱉고 나서 입을 짓씹었으나 늦은 후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떠서 옆을 보니 무흠은 정면만 주시한 채 빠르게 걷고 있었다. 키 차이 때문에 보폭 차이도 꽤 나서 금세 거리가 벌어졌다.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무흠의 뒤에 선 수호는 차의 운전석 창문을 거침없이 부시는 무흠을 보고서 또 잠시 얼어 붙었다.
‘나 지금 포지션이 어떻게 되는 거지? 동료야 뭐야 인질 아니야 이거?’
무흠은 와중에 친절하게도 조수석 창문까지 부셔 문을 열어 주었다. 그냥 운전석 문 열면 되지 않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어리둥절할 때가 없었다. 거의 몸을 구겨 넣는 무흠을 보고서 조수석에 오른 수호는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어, 저기, 저기, 서연우 와요.”
태연하게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얘기해놓고서 무흠과 눈이 마주치자 입이 절로 다물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수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수호는 사이드미러로 점점 가까워지는 본부 사람들을 보면서 파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란 문장이 이렇게 무서웠었나.
“뭐 해?”
“예?”
“시동 안 켜?”
“저한테 키가 없는데요?”
“……너 카드 찍어.”
무흠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카드? 수호의 얼굴 위로 온갖 물음표가 떠올랐다가 느낌표 하나로 크게 떠올랐다.
“이게 차 키도 됐어요?”
“니가 천재 해커로 스카웃 됐다는 사실이 의심된다.”
“컴퓨터만 있었어도 제가 이겨요!”
“지금은 없잖아?”
더 씩씩거리고 싶어도 자신들을 쫓아오는 사람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수호는 애써 태연한 척 굴면서 자신의 얼굴이 찍힌 카드를 모니터에 가져다댔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는지 무흠은 곧장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서 핸들을 틀었다.
“오, 온다온다온다 온다!”
“두고 가기 전에 그냥 고개 숙이고 있어.”
무흠은 이상한 곳에서 친절했다.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오른손으론 수호의 머리를 잡아 직접 수그리게 해 주었다.
‘친절한 게 아닌가?’
잠시 고민이 되긴 했으나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게 중요했다. 아무리 무흠이라 한들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세상이 변한 이후부터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으며 움직였던 수호는 빙글빙글 돌고, 사람들의 비명과 총소리로 빗발치는 이 상황 자체가 두려웠다.
“야, 헛똑똑이.”
“저 부르시는 건가요?”
“여기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어디야.”
“……그건 왜요?”
“시간 없다.”
“그, 훈련하셨을 때 보셨겠지만 광장 근처에 언덕이 하나 있는데에에에엑!”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악셀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격렬한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호는 다시 상체를 푹 숙이고서 두 귀를 막고 그저 이 상황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라야 했다.
‘서연우 미쳤어? 너가 지금까지 곱게 키운 백무흠 진짜 죽이려는 거야?!’
쉬지도 않고 날아드는 총탄이 차의 이곳저곳에 바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귀를 막았음에도 끔찍할 정도로 잘 들렸다. 수호는 차체가 덜컹거릴 때마다 몸을 더욱 움츠렸다.
“꽉 잡아.”
무흠의 그 말에 수호는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과 같이, 차는 아주 빠른 속도로 언덕을 올라갔다. 까맣고 광활한 밤하늘에 걸린 건 초승달 하나밖에 없었다.
부우우우웅, 쾅, 콰강!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벽이 부서지고 갈라졌다. 벽을 뚫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차체가 흔들렸으나 수호는 초승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깨진 유리 파편이 살갗을 파고 드는 순간까지도, 몸이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공했다.’
수호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