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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89화 (89/202)

89화. 시체꽃 (3)

대피소를 코앞에 두고서도 해화와 지운을 깨우지 못했다. 공주에 진입하면서 밤이도 잠들었다. 대피소 입구가 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해 두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해화를 무사히 대피소에 들여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잠든 일행의 얼굴을 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들 오랜만에 맘 놓고 자는 거겠지. 아무 소리도 없는 걸 보니 꿈도 꾸지 않나 보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디선가 몰려오는 텃텃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낙엽이 아스팔트 바닥을 뒹구는 걸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될 줄이야, 새해 첫 날에는 상상도 못했다.

누군가 거리를 청소하는지 그때 난장판이었던 대피소 앞은 말끔해져 있었다. 핏자국은 군데군데 보이긴 했지만 끔찍했던 현장의 잔흔은 없었다. 낙조는 조용히 운전석에서 내려 거리를 둘러보았다. 대피소 문은 막혀 있었다. 경비를 서는 병사가 없나 싶어 기웃거리다가 안쪽에서 불쑥 움직이는 인영 둘을 보고 맘을 놓았다.

‘생각보다 안전한 것 같네.’

사태가 벌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여유를 부리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나 싶었다. 생각해 보면 매 순간이 절박했고 두려웠으며 발악해야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던 이유엔 조금 전 보았던 잠든 얼굴들의 이름이 깃들어 있다.

유년시절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의 틀이 깨진 후부터 사람의 이름을 외운 적이 있나 싶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일에 꽃 두 송이를 사고, 집 앞에 자주 놀러 오는 길고양이들의 저녁을 챙기고, 생활비를 위한 막노동이나 일일알바를 뛰면서 여러 해를 버텼다. 낯선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건 사치였으니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감정도 무시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어 그 사실이 분하고 상대가 미워 죽겠을 때도, 정작 죽을 때는 미워하는 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랬다. 낙조는 자신이 죽는 순간을 여러 번 상상했다. 적당히 사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이름이랑 비슷하게 고독사로 사라지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은 부모님의 성함과 고양이 별로 간 노묘 치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아 죽었던 학교 친구들의 연락은 스스로 끊어 냈으니 말 다했다. 와중에 간간이 밥을 주는 길고양이들 이름을 떠올리고, 그러다 보면 아무리 지우려 했으나 지우지 못한 이름이 기억나고 만다. 어쩌면 사랑했을 사람의 이름. ‘아마도’ 사랑했으니 기억나겠지. 죽는 상상은 그렇게 저문다.

노을에게 흠씻 젖은 채 기울어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낙조는 오른쪽 소매를 걷어 멀끔한 팔을 매만졌다.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힘이 없었다면, 이란 생각은 종종 했다. 이 힘이 없었어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직 그 질문에 대한 확답은 할 수가 없다. 정말 자신이 살아남고 싶은지, 이렇게 된 세상에서도 나는 잘 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자신조차 희미한 질문엔 침묵이 답이다.

잠든 얼굴들을 보면서 무수한 생각을 했지만, 사실 차까지 뛰쳐 나와 유령처럼 걷고 있는 건 켈리가 보여 준 붉은 꿈 탓이었다. 끈적거리는 붉은 세상 아래서 맥없이 쓰러진 일행의 얼굴들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이 다시금 치솟았다. 붉은 꿈 속에서도 모두가 잠든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점은 꿈속에선 그들이 눈을 뜨고 있었고, 지금은 두 눈을 완전히 감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 순간이 더욱 꿈 같았다. 자신만 눈을 뜨고 있어서. 자신만 잠들지 않았기에.

‘뿌리까지 뽑지 말고, 줄기만 잘라서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해야겠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해화의 발목에서 나는 풀은 뿌리까지 뽑으면 피가 나고, 피가 나면 붕대를 두르니 쉽게 의심을 살 게 빤했다. 어차피 풀의 줄기는 그리 굵지 않으니 보이지 않을 만큼 짧게 잘라 안으로 들여 보내는 게 나을 듯했다. 출입 명부에 이름도 바꿔 쓰고.

‘아, 그때 이름 웃기게 썼었던 거 기억나네. 평택이었나.’

그땐 지금보다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직접 끝을 지켜 본 사람들이었지만, 아직 희망을 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청주에 스스로 들어가면, 백 중사님 만날 수 있나.’

막연한 상상이 들 만큼 머리에 찬바람이 돈 것 같았다. 멍하니 붉은 벽돌을 바라보던 낙조가 고개를 돌렸다. 차를 주차한 곳으로 다시 걸어가면서 어깨를 털어 냈다.

“어디서 뭐 했어?”

“깜짝이야. 언제 일어났냐.”

“아까.”

“아까 언제.”

“몰라! 일어나니까 너만 없어서 나왔어.”

한쪽 머리가 부스스하게 뜬 해화가 목청 크게 대답했다. 한참 자고 일어난 게 도움은 됐는지 안색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낙조는 공중에 민들레씨처럼 붕 떠있는 해화의 머리카락을 잡아 살며시 내렸다.

“너, 그거 발목, 짧게 자르고 붕대는 풀어. 들어가서 괜히 의심 산다.”

“알아서 할게.”

“이름도 다르게 쓰고. 성도 바꿔 이왕 바꾸는 거. 홍지운은 불안하니까 들어갈 때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뭐 말을 그렇게 하냐? 자식 유학 보내는 사람처럼?”

평소 같았으면 한숨 한 번 쉬고 말았을 투덜거림이었다. 낙조는 말없이 해화를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허공에 떠 있는 손이 불안했다.

“고낙조.”

“어.”

“이상한 생각 하지?”

“미쳤냐?”

“이별 멘트 유도하는 거 아니야? 니 입으로 말하기 싫어서? 이거 완전 쓰레기네.”

“맵다 매워 홍해화.”

“야!”

“아 쫌 조용히 해! 변종한테 다 소문 내라 어? 우리 왔다고, 같이 대피소나 들어가자고.”

“개소리 좀 작작해. 할머니 안전히 계신 거 보고 나올 거야.”

“할머님께서 손주들 보고 잘 가라, 그러시겠냐?”

“그럼 너는, 너는……, 우리가 너 보고 잘 가라고 할 것 같았어?”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귓속이 아팠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이 꽉 다물렸다. 낙조는 시선을 떨어뜨리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이런 구질구질한 남자가 다 있다. 사람 대하는 법을 몰라서 헤어지는 것도 길고양이 집 보내듯이 하려고 한 게 실수였다. 대답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쭈뼛거리니 해화가 숨을 몰아쉬었다.

“야, 울지 마.”

“안 우는데?”

“아아……, 눈물이나 좀 닦어. 좀 이따 다시 얘기해.”

“뭘 다시 얘기해!”

“내가 진짜 미치겠다. 소리 좀 지르지 말라니까.”

끝까지 자존심은 부리겠다고 눈을 부릅 뜨고서 눈물만 또륵또륵 흘리는 모습에 손이 저절로 튀어 나갔다. 그럼에도 쉽게 닦아 주지는 못한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자 해화가 코를 훌쩍거렸다.

“그림 이상해 보이잖아. 울지 마…….”

“으아아아아!”

“야아악!”

울지 말라고 슬쩍 팔을 건드니 다 들으란 듯 해화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라 팔을 뻗어 입을 막자, 해화는 또 그 손가락을 깨물었다. 악 소리 날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고양이에게 진심으로 물려 본 적이 수백 번인데, 항상 물어 놓고서 혼자 놀라 눈치를 보는 녀석들이 종종 있었다. 그 모양새랑 비슷한 세기였다. 낙조는 헛기침을 하면서 슬쩍 손을 빼 냈다. 해화도 코만 훌쩍일 뿐 조용했다.

“어그로 끝났냐?”

“웅.”

“홍해화 오냐오냐 해 주니까 발음까지 씹어 먹네.”

“뒤진다 진짜!”

“디징다 징쨔.”

해화만 들릴 정도로 작게 웅얼거리자 해화의 얼굴 위로 은은하게 분노가 스쳤다. 안전 거리를 유지한 채 낙조가 가만히 해화를 응시했다. 텅 빈 거리 위로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굴러갔다. 계절마다 바뀐다는 냄새를 알아채 본 적은 없었는데, 낙조는 이번 가을에 풍기는 바람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까지 기억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내가 비밀 하나 얘기해 줄게.”

“뭐.”

“나 너보다 한 살 어려.”

“……어쩌라고.”

“걍 그렇다고. 나이는 정확하게 알면 좋잖아, 안 지 꽤 됐으니까.”

“…….”

“아닌가?”

“그래도 그냥 지금처럼 해.”

“이제 와서 누나라고 할 생각은 없긴 했어.”

“버리고 튈 생각이었으니까 그랬겠지.”

“뭐라고 했냐.”

“니 인성 개빻은 거 알겠다고.”

매워도 너무 맵다. 반박하자니 팩트인 얘기라 다시 입이 다물렸다. 해화는 이번엔 단단히 뿔이 났는지 돌아서서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낙조는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헐레벌떡 뒤를 쫓았다.

차에 돌아가니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밤이와 지운이 머쓱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해.”

“유후~ 러브러브~”

“아 나 여자 안 좋아해!”

“……?”

“……아니, 사람 안 좋아한다고!”

“백 중사님 백 중사님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던 이유가 있었네.”

“미친 진짜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 남자 좀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멀쩡하게 생겨 갖구 괜찮지.”

“누나 제발.”

한참을 놀리던 밤이는 킥킥 웃다가 차에서 내렸다. 지운은 아직 잠결인지 눈동자가 몽롱해 보였다.

“뭐, 두고 갈 것처럼 얘기하더니 정강이 한 번 대차게 까였나 보네.”

“그냥 원만하게 합의를 봤다, 라고 해.”

“그래……, 전쟁통 속에도 애가 생긴다는데, 이 정도면 사랑하기 딱 좋은 날씨네.”

“누나는 진짜 그런 말 좀 쓰지 마. 완전 깨.”

“니 맘에 쏙 들게 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닥쳐.”

밤이는 기지개를 쭉 피더니 해화에게 다가갔다. 둘 사이에도 꽤 많은 게 쌓였을 시간이었다. 둘만의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겠지. 낙조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가 차에 올라탔다. 지운이 턱을 괴고서 백미러를 통해 낙조를 쳐다보았다.

“눈곱 좀 떼고 이제 일어나. 할머님 뵈러 가야지.”

“아저씨 나랑 누나 두고 가려고 여기 왔어?”

“아니야! 아니야아니야아니야! 니가 뭘 들었든 다 아니야! 됐어?”

“나 그럼 쫌만 더 잘게.”

“어휴 시발 자라 자. 평생 자. 새끼야.”

“웅……, 아저씨 그래도 잠든 사람은 건드는 거 아니야. 알았지?”

“자라고 개새끼야!”

손에 집히는 게 뭐라도 있었으면 했으나 앞좌석엔 아무것도 없어 낙조는 구겨진 휴지조각만 뒤로 던져야 했다. 지운은 두 눈을 감은 와중에 웃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웅크렸다. 혼자 열이 받은 채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밤이와 해화처럼 대화로 뭔가를 해 볼 상황도 아니었다. 낙조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루 안에 울었다가 웃었다가 다 하네…….’

하루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일기로 쓰라고 하면 무엇을 쓰게 될까. 어떤 것이 덜 충격적이고 어떤 일이 더 무서웠었나. 공포의 감도로 하루를 떠올리고 정리한다는 사실이 이제는 완전히 무뎌진 듯했다.

‘그리고……, 역시 너무 조용해.’

가을이 물씬 풍기는 냄새는 끄트머리에 불안함을 몰고 왔다.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다 머금고 나니 쓴 맛만 남은 것처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팔이 잠잠했던 것도 처음이었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얌전히 있어서, 변종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 했다.

마치 동면이 시작된 숲 같았다. 모든 생명이 배를 채우고서 따뜻한 곳으로 들어간 세상. 고요해지면서 시간이 동시에 멈춘 게 아닐까 의심되는 계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웅크린 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깊어졌다.

‘산에 가야겠다.’

공주 시내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사방이 산이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대피소는 시내 안쪽에 있는 터라 도로변에 나무가 심어져 있는 걸 제외하면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어려웠다.

시체꽃은 7년 동안 영양분을 채운다고 했다. 단 이틀 간 꽃을 피우려고.

겨울잠에 드는 동물들은 기나긴 잠에 지치지 않을 만큼 배를 채운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지금이 딱 적기다.’

낙조의 생각이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 낙조는 안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의 형상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검지 두 번째 마디에 잇자국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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