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모두가 축제에 한창 빠져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에선 ‘백무흠’이란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공개 훈련에서 보았던 장면을 마치 각자가 몰래 지켜 본 것마냥 부풀리고 경악하면서 무흠의 행동을 더욱 정의롭게 만들었다.
축제는 몇 날 며칠이고 이어졌다. 연우의 비밀스러웠던 계획은 그저 서프라이즈에 불과했다. 공개 훈련을 지켜 본 모두가 연우를 칭찬했다. 연우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들은 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지 알 법 했다.
연우는 더 이상 수호를 찾아오지 않았지만 수호는 매 시간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무흠에 관한 정보를 찾는 것도 어쩐지 꺼려져서 확인하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이곳 본부 사람들에게 무흠은 영웅 그 자체였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연우의 명령만을 받들어 백신의 열쇠인 낙조를 잡아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전히 수호 자신만 연극과도 같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정보실에 틀어 박혀 아이스 커피만 홀짝대는 시간, 왁자지껄한 바깥 분위기를 억지로 모르는 척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점차 익숙해졌다.
“저라면 백무흠 씨 찾아갈 것 같아요.”
정보실에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만 빼면.
무흠의 공개 훈련 당일, 몰래 빠져 나가려던 수호를 붙잡은 여자는 본부 소장의 비서였다. 그녀는 연우가 무흠을 어떤 식으로 훈련시키고 어떻게 사용하려는지 대략 알고 있었다. 회의 때 직접 참석하진 못했으나 회의가 끝난 후 소장이 툴툴거리며 연우가 회의 때 발표한 내용을 혼잣말로 중얼거린 덕분이었다.
비서라는 사람이 제 사무실 드나들 듯 정보실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수호에겐 당장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기에 내쫓기도 무안했다. 무흠의 공개 훈련 당일에 자신을 붙잡은 이유 또한 특별했다.
「서 팀장님, 계속 저렇게 두면 큰일 나요.」
무흠보다 연우를 먼저 걱정하는 여자의 이름은 성라미. 기억력이 좋아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의 얼굴을 완전히 외우고 있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연우가 얼마나 무흠에게 집착적으로 변하는지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라미 또한 수호와 마찬가지로 본부의 사람들 속에 끼지 못한 이였다. 자신은 언제나 겉을 떠돌았다면서, 이미 먼저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수호를 알아본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우가 라미에게 본래 특별한 존재였던 것도 아니었다. 서로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라미는 일방적으로 자신이 연우를 알고 있는 것일 뿐, 연우는 자신의 이름조차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왜 그런 사람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나. 수호는 라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연우에게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망가지기 직전이에요. 저러다가 계획이 틀어지면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서 무서워요.」
라미가 연우를 걱정하는 감정에 연민이 가득하진 않았다. 연우라는 사람이 가진 성격을 먼저 읽었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 연우가 보여 준 상황들로 하여금 최악의 패를 상상하고 있었다. 본부라는 울타리 안에서 라미도 한동안은 안전함을 느낀 건 맞았다. 다만 그 집합체와 절대 어울릴 수 없겠다는 결정에 스스로 돌고 돌 뿐이었다.
“라미 씨 백무흠 만난 적 있어요?”
“어떻게 만나요?”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인데 지금 나보고 찾아가라고요? 서연우가 떡하니 지키고 있을 텐데?”
“찾아가 봤다면서요.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죠!”
라미는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얼렁뚱땅한 면이 많았다. 수호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후엔 곧장 무흠을 찾아가라는 제안 아닌 제안을 내놓았다.
“백무흠 심기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간 나는 비공식 훈련 상대 삼아서 여기 못 돌아와요.”
“죽이려면 처음에 만났을 때 진작 죽였겠죠.”
“지금 놀리는 거예요 뭐예요?”
“생각보다 수호 씨가 겁이 많아서……, 정 그러면 제가 가 보고요.”
“백무흠을 만나러 가겠다고요?”
“안 되나요?”
“……목숨 몇 개 달린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알면서 방치하는 것만큼 최악으로 치닫진 않겠죠.”
라미의 마지막 말에 수호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말 그대로 무흠이 숨기고 있는 걸 연우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무흠에 대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캐는 수호에 비해 라미는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유추하여 이 결론까지 도달했다. 말을 단순히 하는 것뿐, 그녀가 본부에 남아 소장의 비서직까지 맡은 것엔 이유가 다 있었다.
“백무흠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내가 일일이 알려 줘야겠어요?”
“진짜 그 사람이 죽일까 봐 그러는 거예요? 죽이려고 맘만 먹었으면 이미 여기 사람들 다 죽었어요. 다들 시한부 선고 받은 거예요. 백무흠이 나서기 전까지 모르고 살다가 다함께 죽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우우, 말만 많아 진짜. 그럼 제가 다녀올게요.”
“저기요!”
“좋은 방법 있으면 지금 말해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가서 뭘 어떻게 말하려고요!”
“아무 말도 안 해요.”
라미는 큰 눈을 말갛게 뜨고서 웃지도 않은 채 조곤조곤 얘기했다. 어떤 계획을 갖고 가는지도 얘기해 주지 않으면서, 그녀는 큰 두려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도 안 하면 뭘 하려고?’
그렇게 서로를 깊이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수호는 라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만났다는 건 와중에 기쁜 일이긴 했지만 라미는 수호와 딱히 작전을 세운다거나 같은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슨 생각을 갖고 저렇게 기세등등한 건지, 수호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여태껏 라미 같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도 했고 왠지 그녀가 할 행동은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본부에 큰 혼란을 가져올 것만 같았다. 주저하지 않고 곧장 정보실을 나가려고 하는 라미의 앞을 막고서, 수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같이, 같이 가요.”
“눈에 띄게 둘이 움직이자구요? 수호 씨랑 나랑 연관도 없는데. 연우 씨가 보면 뭐라고 말할 건데요?”
“그럼 지금까지 정보실 찾아온 건 말이 돼요?”
“이곳에서 알리바이를 만들려면 혼자가 편해요. 특히 수호 씨나 나 같이 혼자 일하는 사람들은.”
라미는 꽤 당차게 말했다. 수호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고 있자, 그녀는 별 말 없이 정보실을 빠져 나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모든 사고회로를 멈춰 세웠다. 자신이 무흠을 찾아갔을 때 지녔던 걱정의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무흠에 관한 의심을 품고 있을 때 자신은 오로지 혼자였고 그 걱정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
라미가 나서 준다면……, 라미의 알리바이를 자신이 입증해 줄 수 있다. 접점이 없는 둘이 어떻게 서로를 보호해 주냐. 종종 소장이 정보실로 연락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고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으니 그걸 물고 늘어지면 된다. 외부 신고는 꾸준히 들어오고, 대부분이 구호 물품을 약탈당한 이야기들이니 그 사례를 정리하여 라미에게 전달하려고 했다면 되는 일이다.
“수호 씨는 어디 갈 데 있어요?”
라미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수호를 지나쳐 정보실을 나가다가 문득 물었다.
“갈 데요?”
“여기가 없어지면 지낼 곳이라든가.”
“……모르겠는데요.”
“그럼 정보실에서 머물 곳 좀 찾아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그녀가 벌일 행동이 수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스케일이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호는 라미를 한 번 더 말릴까 고민하다가 그녀를 보내 주었다. 그리곤 제자리로 돌아와 빈 문서 하나를 켰다. 라미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 두어야 했으니까.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개 훈련을 아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연우는 긴장을 풀고서 그동안 취하지 못했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날카로웠던 신경도 가라앉히고서 동료들과 가볍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별안간 휴게실로 뛰어 온 후배 하나가 소장이 급히 부른다는 얘기를 전하기 전까진 모든 게 평화로웠다.
소장실 앞쪽에 항상 앉아 있던 비서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연우의 관심은 오로지 소장의 호출에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저 비서도 엿듣지 못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한편으론 공개 훈련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컸기에, 자신의 직책에 대한 의논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컸다. 백신 개발은 무흠의 실험으로만 보아도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무흠은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정말 회의실 문턱을 넘을 때까지 연우는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동안의 고생을 드디어 돌려 받는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소장님!”
“몰랐어? 백무흠이 이전에 비슷한 실험을 당했다는 거.”
“……몸에 남은 흉터가 있었고 피에서 독 성분이 검출되긴 했지만…….”
“그럼 왜 의심하지 않았지? 누군가가 미리 백무흠을 건드렸을 수도 있겠다는 걸?”
“처음 그 사람 잡아왔을 때만 해도 달랐잖아요! 그냥 멀쩡한 군인이었어요!”
“너한테 실험을 당하는 내내 날뛰다가, 갑자기 네 말만 듣는 것도 그 새끼가 항복했다고 생각한 거야?”
“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내가 살려 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서연우 너는, 사람을 너무 네 눈으로만 본다. 세상이 너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 지금까지 네가 이룬 결과가 운이 좋았다거나 네가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네가 속았다는 생각은 못 해?”
“소장님께서도 지금까지 아무 말 없으셨잖아요!”
“씨팔, 야!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잡고 있는 네가 알아야지, 내가 맨날천날 네 옆에 붙어서 충고까지 해야 해!? 어린 놈이 그래도 일 열심히 한다 싶어서 지금까지 뒤 봐 주고 있었는데 미쳤냐?”
소장은 목소리가 밖으로 샐까 하는 걱정따위 비추지 않았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몇 장을 움킨 소장은 그대로 연우에게 던졌다. 나풀거리며 떨어진 종이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저번에 내가 말했지! 우리 쪽 사람들도 몇 명 거기에 있다고! 어느 정도 면역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약을 거의 개발했으니까 니가 치고 올라오라고 했잖아! 내가 씨팔 이런 것까지 알아서 떠다 먹여 줘야 해? 조금만 알려고 하면 줄줄이 나오는 걸, 왜 여태껏 의심도 안 하고……, 어휴, 씨팔 진짜……. 갖고 나가! 정보실에 사람 심어 달라고 했더니 써 먹지도 못하고. 빨리 꺼져!”
연우는 두 주먹을 꽉 쥐고서 바들바들 떨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들을 주웠다. 글자들이 당장 눈에 읽히지는 않았지만, 소장이 자신에게 안부보다 먼저 말한 이야기 때문에 분을 식힐 수가 없었다.
「지방에 있던 박사한테서 연락 왔다. 예전에 붕어섬에서 일한 박사라고. 백무흠에 대해 잘 알던데. 고낙조도 다 잡았었는데 부하 하나가 빼돌렸단다. 저번에 말했던 그 약 개발도 실험 끝났다더라. 어쩔 수 없어. 백신 개발은 그 박사한테 다 넘겨.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백무흠이 붕어섬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 더 강하게 품었더라면, 자신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고 했을까? 소장의 말대로 백무흠을 쥐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고 실험 도중에 그의 태도가 바뀐 걸 의심 없이 성공했다고 결론 지은 것도 자신이었다. 소장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백무흠이……,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내 뜻대로 움직여 준 거라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방이 적밖에 없는 이곳에서, 감히 자신을 상대로 함정을 파 둔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없이 창피하고 망신스러웠다. 자신을 얼마나 잘 안다고, 심지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살린 사람은 자신인데. 일말의 고마움도 없었다고? 연우는 생각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한 곳만 바라보고 움직였는지 잘 알 것만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신도 내가 지금까지 다 만들어 온 건데. 그걸 왜 넘겨 줘?’
여러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백무흠을 만든 건 자신이라는 사실 또한 지울 수 없었다. 박사가 붕어섬에서 백무흠을 상대로 실험을 벌였다 하더라도, 자신이 마주했을 때의 무흠은 그저 일반 군인일 뿐이었다. 끝없이 반항하던 그 사람을 지금처럼 순종적인 괴물로 만든 것도 자신이었다.
‘절대 안 뺏겨.’
연우는 계단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정보실이 있는 건물로 발을 돌렸다. 종이를 대충 훑어 보니, 박사의 지난 몇 년 행적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켈리 화이트…….’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지 꽤 된 사람이다. 붕어섬에서 어떤 목적을 갖고 실험을 했는지는 적히지 않았으나 백무흠을 비롯한 여러 군인들을 실험에 이용했으며, 그 실험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박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백무흠의 피에서 피마자 독이 검출된 걸 생각하면 아마 식물의 DNA를 이용한 실험을 예전부터 진행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이 울렸다. 머리를 부여잡고 연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당장 무흠에게 가서 켈리라는 박사에 대해 아는지 따져 묻고 싶어도, 이미 무흠의 덫에 걸린 자신에게 그가 순순히 정보를 늘어놓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치욕스럽다. 연우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직원들을 그대로 지나쳐 정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 서, 연우, 팀장님.”
“백무흠 조사 좀 해 봐요.”
“예?”
“당장! 붕어섬이랑 무슨 관련이 있었는지, 켈리 화이트란 여자는 누군지, 할 수 있는 거 다 해서 빨리 캐 보라고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수호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연우가 소장이 준 종이를 책상에 내려 놓았다. 수호는 눈치를 보면서도 군말 없이 종이를 먼저 확인했다. 소장이 스스로 알아 낸 정보가 저 정도라면, 정보원인 수호가 파헤칠 수 있는 정보는 몇 배일 수도 있다. 연우는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힘을 준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연우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라며 실수를 되짚지 않았다. 소장의 앞에서 부끄러움은 이미 다 겪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 본부에 쌓아 온 실적과 그 결과물인 무흠을 생판 모르는 이에게 넘길 수 있다는 상황이 더 치욕스러웠다. 연우의 바짝 깎은 손톱이 수호의 의자를 바득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