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보이지 않는 추격 (3)
낙조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이미 혼란에 가득 차 있는 머릿속이 또 한 번 뒤집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설이었다.
‘나 빼고 다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아니면, 내가 틀린 게 아니야?’
다수의 선택과 기억은 힘이 세다. 게다가 자신의 기억이 틀렸음을 주장하는 증거가 만만치 않았다. 낙조가 한참 말이 없자, 밤이는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조용히 얘기했다.
“그때 붕어섬에서, 백무흠이랑 다른 군인들 실험한 일지 봤었잖아.”
“…….”
“백무흠은 붕어섬에서 나올 때 기억이 없다고 했지. 강한 충격이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뇌 손상이었겠거니, 했지.”
“중사님은 피마자라고 했잖아요. 독이 있는 식물…….”
“실험한 식물은 그랬지. 그래도 쓰인 것만 믿으면 안 돼.”
밤이는 조심스럽게 바지 주머니에서 몇 번이고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낙조는 주저하다가 종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내용을 살폈다. ‘악어와 새’의 식단표였다. 날짜마다 칸으로 나뉜 식단표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낙조는 그곳에서 작게 적힌 글씨를 알아차렸다.
“낭탕?”
“미치광이풀. 사람들에게 소량의 독초를 매일, 그것도 아주 다양하게 먹였어. 서서히 중독되게 한 거지. 만드라고라, 산괴불 주머니, 은방울꽃…….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는 다 갖다 썼어. 웃기게도 양귀비는 쓰지 않았더라. 한국에서 눈에 띄게 많이 사용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단체 환각을 일으킨 후 가짜로 시간을 재배열한 거야. 세뇌시킨 거지.”
“만드라고라가 진짜 있어요?”
“너 대화에 좀 집중해. 셰익스피어에도 나오는 식물이야.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엄청 먹었고. 그래서 잠깐 심장이 멎었었어.”
“내 식판만 관리하던 이유였나 보네요.”
“그것도 그렇고, 너……, 켈리랑 나랑 셋이서만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켈리가 그때 만드라고라와 CCL을 섞은 걸 너에게 들이마시게 했지. 너 잠들고 나서 켈리 몰래 내가 뇌명실을 먹였어.”
뇌명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낙조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자, 밤이는 한숨을 짧게 쉬고 입을 열었다.
“중국 약초야. 뇌 기능을 활성화 시키는 데에 아주 효과적인 열매인데, 지금까지 어떤 약초 서적이나 의학책에도 없어. 1910년대에 어느 분이 치매 예방을 위해 뇌명실로 약을 제조한 기록이 있을 뿐이지.”
“그럼 구하기 힘든 식물이잖아요.”
“……켈리가 한국에서만 지냈던 건 아냐. 아주 옛날엔 중국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더라고.”
“근데 내가, 지금 누나 말을 다 믿어도 되는 건지 난 솔직히 모르겠어요. 누나가 켈리의 용병이 됐을지, 누가 알아요.”
밤이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서 낙조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남은 시간을 확인한 후 더 작게 말했다.
“나도 먹은 척하는 거야. 홍해화랑 홍지운도 세뇌 당한 마당에 나 혼자 너 두고 튀냐? 내가 그럼 너한테 뇌명실을 왜 먹였겠어. 켈리 침실까지 가서 훔쳐 온 건데.”
“……누나도 나갈 거죠? 여기 있을 거 아니잖아요.”
“그럼 나 버리고 가려고 했어? 켈리랑 한통속 된 줄 알고?”
“누나 만나기 전까지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요?”
“너 나랑 싸우러 왔냐? 목소리 낮추고 먼저 나가.”
“지하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같이 나가요.”
“니가 지금 총이 있니 뭐가 있니. 나한테 총 한 자루라도 쥐어 주고 얘기해.”
“……나 가둬 뒀던 방에 변종들 있었는데. 분명 더 있을 거예요.”
낙조는 자신이 갇혔던 하얀 방을 떠올리며 말했다. 밤이는 알고 있었다는 듯 그리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네가 드디어 사람다운 말을 하는구나.’의 눈빛인 터라 조금 기분이 상할 뿐이었다.
“널 나랑 여기에 들인 것도, 네가 날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서 또 잠들게 하라는 짓이지.”
“잠든 척하면 된다는 거죠?”
“내가 손등을 세 번 두드리면 일어나.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나 데리고 도망 가라.”
“……진짜 누나는 천재예요.”
“이제 제발 좀 조용히 해.”
밤이는 약속한 시간이 넘은 걸 확인한 후 낙조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낙조는 순순히 입을 닫고 기절한 척을 하겠다며 바닥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밤이가 실없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거사를 앞두고 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은 켈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해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분명 있을 테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은 백 퍼센트지만,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한 일일이 의사를 물어볼 시간도 없다. 낙조는 밤이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서 정말 잠에 드는 듯이 몸을 느슨하게 풀었다. 막시안은, 김도연은……, 살아 있을까.
여러 명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조의 머릿속엔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홍해화는 홍지운을 잘 데리고 오려나.’
홍씨 남매도 큰 변수였다. 해화는 그나마 자신을 보고 빨리 정신을 차린 것 같았으나 말 몇 마디에 휘둘릴 수 있었다. 지운은 마주치지도 못했지만 가장 걱정이 되는 인물이었다.
‘홍해화가 알아서 잘 하겠지.’
곧 무거운 발소리가 겹쳐 들리더니 자신이 몸을 여러 명이서 이동식 침대에 옮기는 게 느껴졌다. 켈리와 밤이의 목소리가 주로 들렸는데, 둘은 영어로 속삭이듯 얘기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걸로 보아선 의학 용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낙조는 마음 편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소리와 조금 엄숙해진 공기의 무게감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예상도 틀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오른팔이 따끔거리며 절로 움직이려는 걸 힘을 써 겨우 막고 있었으니까. 특히 낙조의 예상을 낙인 찍어준 건 변종에게서 나는 그 특유의 진액 냄새와 나무 썩은 냄새 때문이었다.
조금 구석진 방으로 가는 건지, 복도를 지나는 시간이 꽤 흘렀다. 방문을 열자마자 악취가 심하게 풍겼다. 침대를 끌던 남자들이 밖으로 나가고, 켈리와 밤이가 다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화가 마무리 되는 듯한 분위기에 낙조는 밤이의 신호만을 기다렸다.
“문 여실 거죠?”
“……그건 왜 묻지?”
“당신은 변종들이 물지 않지만, 저는 아직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진작 약을 먹으라고 했잖아.”
“아직 제 점수가 모자라는 걸요.”
“……나가 봐.”
자신이 들으라는 듯, 밤이는 한국어로 켈리와의 대화를 끝마쳤다. 밤이가 손등을 두드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켈리가 변종에게서 안전한 이유는 이곳에서 나간 이후 물어도 늦지 않았다. 낙조는 얌전히 밤이의 손길을 기다렸다. 곧 밤이가 서류를 챙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낙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렸다.
톡, 톡, 톡.
그리고 문이 닫혔다. 낙조는 실눈을 떠 방 안을 살폈다.
저번과 같이 창문 하나 없는 흰 방이었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변종들이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앞쪽에 있는 변종들은 무리의 힘에 짓눌려 벽을 더듬으면서 괴상망측한 소리를 냈다.
켈리는 낙조를 등지고 있었다. 손엔 곱게 빻은 가루가 담긴 병이 들려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마시게 한 독초 가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낙조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오른팔로 켈리의 목을 꽉 감았다.
“컥!”
목울대가 눌린 켈리는 병을 떨어뜨리고 낙조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손톱을 세워 긁어 대는 힘은 생각보다 셌지만 힘은 낙조가 월등히 우세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지 그녀의 목을 조이던 낙조는 켈리의 몸에서 힘이 느슨하게 풀려 나가자 팔을 풀었다. 그녀는 힘없이 쓰러져 불규칙적으로 숨을 뱉어 냈다.
“사람들이 그렇게 찾는 백신이란 게, 이미 여기엔 있었나 봐.”
“콜록, 너……, 컥.”
“들어 보니 점수가 높은 사람들만 약을 주는 것 같던데……, 그럼 당신 용병들은 당연히 면역자들이겠네.”
“허윽, 콜록!”
“몇 명 데려갈게. 당신은 혼자서도 잘 하는 사람이니까.”
켈리를 죽이지 않는 이유.
누군가는 물어 볼 것이 빤하다. 저런 악인을 왜 살려 두느냐. 그녀에게 살아 남을 권리를 왜 주느냐.
낙조는 켈리를 보는 내내 그녀와 매우 닮은 사람을 생각했다. 친절하지만 교활하고, 박식하나 자신에게 도취 된 사람.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함정에 빠지는 사람……. 켈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연우와 많이 닮아 있었다. 만약 이 세상에 아직 체계가 남아 있고, 사람들의 상식이란 게 존재했다면 켈리는 이름을 날리는 박사가 될 수도 있었고, 연우는 그녀의 뒤를 잇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을 테다.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은 이미 깃들어 있고, 그런 게 거들떠 보이지도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필요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안전함’에 포커스를 맞춰야 했다. 나와 있으면 당신들은 안전해, 이곳에선 그 누구도 당신들을 해칠 수 없어. 신앙과 같은 믿음을 자신의 존재로 부풀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스스로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선 자기애가 꿋꿋하게 중심을 지킨다.
나르시스트의 몰락은 보기 쉬운 구경이 아니다. 낙조는 켈리의 손목을 지그시 밟고서 유리 문을 열 준비를 했다. 켈리는 있는 힘을 다 해 몸부림을 쳤으나 낙조의 힘을 감당할 순 없었다.
“다음엔 수평적인 사회를 만들 생각 좀 해 봐.”
낙조는 말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이미 팔은 변종의 냄새를 맡고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낙조는 앞쪽에서 뒤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쏟아지는 변종 몇몇을 쫓아 내고서 그대로 방을 나왔다. 복도엔 밤이가 가만히 서서 낙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낙조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변종들이 떼로 달려 든다면, 이 문도 얼마 가지 못할 테다.
“저 사람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게 변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거라니, 좀 모순적이다.”
낙조가 쿵쿵, 흔들리는 문을 꽉 잡은 채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밤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에게 도망치라고 얘기하려고.”
“누나는 그럴 거 같았어.”
“주차장에서 봐.”
밤이는 짧게 인사를 남기고 비상구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은 방에도 변종들이 있을까. 낙조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길게 이어진 문들을 응시하며 재빠르게 옆 방의 문을 열었다.
‘딩동.’
방은 조금 작았으나 콩나물처럼 가득 선 변종들이 보였다. 잠금장치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게 우스웠다. 켈리 그녀는 안전하니 이곳 경호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티가 너무나도 선명히 보였다.
차례대로 문을 열고, 닫는 것을 반복했다. 켈리가 갇힌 방문은 더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변종들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낙조는 아직 아무도 올라오지 않은 흰 복도를 응시하다가 비상구 계단 쪽으로 돌아갔다. 문을 잠그고선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갈까, 하다가 지하까지 내려가기로 했다.
‘난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이미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밤이가 이곳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내 지하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낙조는 자신의 품에 뛰어 든 이의 얼굴을 뒤늦게 확인했다.
“아저씨 진짜 안 죽었어?”
“……야, 넌 내 옆에 있으면 안 죽을 것 같아서 구해 줬다더니.”
“내 말이 맞잖아! 아무도 안 죽었어.”
지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으면서 빽빽 우겼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해화와 막시안, 도연이 나란히 차 앞에 서 있었다.
“밤이 누나도 올 거야.”
“언니랑, 만났어?”
“여기서 제일 정상이야.”
해화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듯 보였다. 낙조는 넉살 좋게 대답한 후 지운의 등을 토닥였다. 막시안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목발까지 짚은 모양새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낙조와 눈이 마주치자, 막시안은 멋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몸이 이래서 염치없지만, 그래도 도움은 될 거예요.”
“내가 너랑 싸워서 뭐 하냐.”
막시안은 그 몸에 꿋꿋이 총까지 챙겨 왔다. 이건 잘했네. 낙조가 무심하게 툭 던지자, 막시안이 가장 걱정 없는 얼굴로 웃었다.
위쪽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모두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몸이 움찔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연은 두고 온 엄마가 생각나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밤이를 기다리면서, 낙조는 엘리베이터와 비상구 계단 쪽을 반복하여 힐끔거렸다.
“누나!”
곧 밤이가 비상구 문을 열고 주차장에 들어섰다. 그녀는 입고 있던 흰 가운을 벗어 던지고서 낙조가 있는 쪽으로 달려 왔다. 뒤이어 여기저기가 깨물린 용병 둘이 헉헉거리며 비상구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낙조는 운전석에 올라타고서 급히 시동을 걸었다. 모두가 자리를 찾아 올라탔을 때, 막시안이 해화의 손을 붙잡았다.
“해화, 도연이 잘 부탁해요.”
“막시안?”
“도연이 꼭 낫게 해 주세요.”
막시안은 말을 마치고 총과 총탄을 차에 실은 후 문을 닫았다. 낙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악셀을 밟았다. 백미러 안으로 쏟아지는 변종들이 보였다.
탕, 탕탕, 탕!
아무렇게나 쏘는 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미러로는 더 이상 막시안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