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보이지 않는 추격 (1)
복수를 위해 다지는 감정 중 분노가 차지하는 힘은 얼마나 될까. 그 분노는 과연 어디서 오나. 여러 갈래로 뻗은 분노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켈리가 보인 그간의 행적은 본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볼모 삼아 동료들에게 어떤 협박을 가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대략 알 수 있었다.
켈리를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끝까지 감추려 했을 내막까지 들추고 나서야 결정하려 했다. 그녀의 말 한 마디가 이곳에선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 알기에, 자신 혼자 그녀에게서 빠져 나왔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안위도 마찬가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낙조는 당장 켈리의 곁에 있던 남자의 뒷목을 잡아 챘다. 놈은 허공에 붕 떠올라 손발을 휘저어댔다. 거무튀튀한 피로 뒤덮인 낙조의 손아귀에선 피비린내와 흙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질식시킬 것 같은 악력에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쏘라니까! 뭘 멍청하게 서 있어!”
다 쉰 목소리로 켈리가 남은 용병들을 향해 쏘아 붙였다. 몇몇은 낙조의 변한 팔을 보고 얼어 붙었으나, 그나마 정신을 차린 몇 놈들이 총을 장전한 후 총구를 낙조에게 겨누었다.
낙조는 들어 올렸던 남자를 문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남자는 문턱에 머리를 제대로 찧고 그대로 쓰러졌다. 부딪치며 충격을 받은 용병 몇몇이 중심을 잃고 시선을 낙조에게서 떨어뜨렸다.
‘켈리의 지시대로만 움직일 줄 알지, 스스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네.’
낙조는 간단히 그들의 행동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주먹을 비틀었다. 마치 변종을 마주했을 때처럼, 손바닥 안쪽이 간지러우면서도 뜨거운 것이 솟아나려는 느낌이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동정심 비슷한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켈리의 달콤한 말 한 마디에 속아 용병이 됐든 어쨌든, 이들이 저지른 최악의 일은 수도 없이 많을 테다. 막시안처럼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잡혀 산 이도 있겠지. 그러나 그들 하나하나의 사정을 들어 주면서까지 이 시간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걔, 걔네 데려와!”
낙조가 쓰러진 남자를 넘어서서 남은 용병들에게 가까이 붙었을 때였다. 검은 핏자국을 입가에 덕지덕지 묻힌 켈리가 급하게 소리쳤다.
“걔네들이 살아 있는지가 중요한 거잖아. 다들 멀쩡히 살아 있어!”
“아직 건드리지 않은 것뿐이겠지.”
대화를 더 이어 나갈 필요가 없었다. 낙조는 뒤에서 계속 소리치는 켈리를 무시한 채 손바닥 안에 가득 움켜 두었던 뜨거운 진액을 용병들에게 흩뿌렸다. 그들의 살갗 여기저기에 닿은 진액은 곧장 피부를 태우면서 살갗 안쪽으로 녹아 들어갔다.
“끄아아아아!”
“아아아악!”
소량의 진액만이 닿은 용병들도 상황이 다른 건 아니었다. 낙조는 각자 자신의 신체가 타들어 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용병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변종을 완전히 녹여 없앤 만큼 산이 강하니 사람의 살과 뼈를 녹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진액이 닿은 범위만큼 살이 먼저 타들어 갔고, 그 뒤론 뼈와 혈관, 세포가 아예 녹기 시작했다. 물론 살가죽이 탄 이후 안에 있는 것들이 녹으며 피도 함께 흘렀다. 얼굴에 진액이 닿은 놈들은 볼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치다가 곧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졸도했다.
변종이 없음에도 낙조의 팔은 여전히 변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불어 낙조의 뜻대로 진액을 끓였고 아직까지도 잔뜩 긴장을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중이었다. 낙조는 자신의 팔을 잠깐 내려다봤다가 켈리를 향해 뒤돌았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기분일 때 이 힘이 얼만큼 발산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질 때 힘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처음엔 낯설기만 하여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이 자신을 방해했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거야.’
낙조는 생각이 끝나는 대로 곧장 켈리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동자엔 핏발이 바짝 서 있었다. 한손엔 여전히 물어 뜯은 살가죽과 혈관뿌리가 붙잡힌 채였다. 낙조는 시간이 찬찬히 지나는 것에 따라 팔에 난 상처의 고통도 조금씩 줄어드는 걸 느꼈다. 고통과 회복에 무뎌지니 조금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었다.
“이거 안 놔!”
켈리는 생각했던 대로 순순히 끌려오지 않았다. 낙조는 들은 체도 안 하고서 그녀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악어와 새’에서는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워낙 층이 많았으니 알지 못하는 공간이 있을 법도 했다. 이곳이 고층인지, 아니면 숨겨진 지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낙조는 엘리베이터가 박힌 왼쪽 끝 복도를 보고서 난리를 치는 켈리를 묵묵히 끌었다.
켈리에게 자신의 환각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묻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녀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는 순간 그녀가 세운 다른 계획에 스스로 빠져 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켈리를 먼저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따로 무기를 들고 오진 않았는지 씩씩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의 돌발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는 켈리를 빤히 응시하며 버튼을 누르라는 듯 턱짓했다.
문이 닫히고, 켈리는 파란 눈을 번득이면서 낙조를 노려보다가 조용히 버튼을 눌렀다. 사람들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방이 모인 곳이었다. 낙조가 있던 층은 꽤 고층에 있었던 듯, 아래로 내려가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켈리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겉옷을 벗어 얼굴에 배인 핏자국을 닦아 냈다. 이미 말라 버린 피는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녀는 낙조를 등진 채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다시 평소대로의 호흡을 되찾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알림음이 울렸다. 낙조는 혹시라도 더 대기하고 있을지 모를 용병들의 수를 어림짐작하며 주먹을 쥐었다.
“……고낙조?”
다소 부산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복도는 조용했다. 복도에 한두 개씩 놓인 벤치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얘기하는 작은 소음이 전부였다. 그 백색소음을 뚫고 낙조의 귀를 간지럽힌 목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홍해화!”
해화는 한 손에 물컵을 든 채, 낙조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낙조는 엘리베이터를 뛰어 나가 그녀의 앞까지 달려 갔다. 차마 세게 붙잡지는 못하고, 허공에서 주먹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낙조는 어렵게 입을 떼어 냈다.
“너, 너 괜찮아? 홍지운은. 밤이 누나는?”
“…….”
“홍해화!”
대답이 없었다. 결국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니 복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와중에 낙조의 상처를 발견한 이들이 수군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지 켈리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해화는 낙조의 얼굴을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처럼, 그녀의 시선에는 반가움이라거나 놀란 것 같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해화는 손을 들어 낙조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곤 고개를 내려 아물고 있던 낙조의 상처를 확인했다.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해화가 낙조에게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다고, 분명히 죽었다고―”
“―홍해화 씨. 방으로 들어가세요.”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가 해화를 불러 세웠다. 낙조는 날을 잔뜩 세운 채 해화의 손목을 쥐어 자신의 뒤에 감춘 후 등을 돌렸다. 켈리는 ‘악어와 새’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과 해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었다고 했잖아!”
붙잡고 있던 손목이 툭, 하고 풀려 나갔다. 몸으로 막고 있었던 해화가 낙조의 옷깃을 꽉 쥐고서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옷깃을 붙들고 있는 손은 파르르 떨렸다.
“꽤 큰 사고였잖아요. 홍지운 씨가 발견했고, 증언했어요. 해화 씨도 들었잖아요.”
“홍지운이 발견했을 때까진 살아 있었어. 살려 보겠다고 당신이 데려갔잖아!”
낙조는 해화가 켈리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그녀를 끌어 당겼다. 돌려서 얼굴을 확인하니 해화는 흔들림 하나 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내가 죽었다고 했어? 저 사람이?”
“저 여자만 말한 게 아니야. 언니도, 송밤이 그 언니도 너 죽은 거 확인했다고 말했다고!”
순간 함께 발을 딛고 있는 그 공간의 소리가 전부 멎은 것처럼 느껴졌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기분이었다. 낙조는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해화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하얀 방에서 보였던 표정은 흔적도 없이 지운 채 고개를 빳빳이 처들고 웃고 있었다.
‘누나도 켈리에게 잡힌 거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당차고 똑똑한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그랬을 리 없다. 낙조는 해화를 붙잡고 물었다.
“교통사고 나고, 오늘이 며칠 째야.”
“5일……, 5일 지났어.”
닷새. 닷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럼 자신이 지하주차장에서 들었던 도연의 이야기도 가짜인가. 그때의 공간감각이 아직까지도 선명히 느껴지는데. 낙조는 머리를 굴리다가 고개를 숙여 해화의 귀에 속삭였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해. 무조건. 홍지운은 어디 있어.”
“너랑 쓰던 방에, 아직…….”
“정신 차려. 나 살아 있어. 같이 살아서 나가야지.”
모든 기력을 잃은 듯한 모양새에 마음이 쓰였지만 당장 조곤조곤하게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낙조는 해화의 두 팔을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얘기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도 눈앞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눈물범벅이 된 해화도 입을 억세게 다물고 따라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낙조는 켈리에게 물었다.
“송밤이 누나는 어디 있어.”
“네가 직접 기어들어 온다면야……. 당연히 실험실에 있지.”
켈리가 무슨 플랜을 짜 놓았는지는 당장 알 수 없다. 다만 여전히 그녀는 낙조 자신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낙조는 거짓 기억이라도 자신이 그녀와 벌였던 논쟁 속 다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나는 나를 잘 이용해야 해.’
켈리는 실험실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들어간다면, 또다시 알 수 없는 가루를 마시고 잠들까. 그곳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일까. 모든 것이 거짓으로 돌아가고 있는 공간에서 의심을 하는 시간도 사치였다. 낙조는 해화에게 ‘지하주차장에서 만나.’라고 속삭인 후 켈리에게로 당당히 걸어갔다.
“여러분들도 다 방으로 돌아가세요. 고낙조 씨는……, 내가 처음부터 주의하라고 한 인물이었잖아요.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를 만들까 봐 애초에 싹을 자르려고 했던 겁니다.”
켈리는 자신의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충고를 내리듯 말했다. 사람들은 낙조의 등장에 술렁거리면서도 켈리의 지시는 거역하지 못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낙조는 뒤를 돌아 해화까지 어느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관중들이 사라지자 켈리는 웃고 있던 표정을 싹 지웠다. 실험실과의 거리는 2층밖에 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지, 실험실은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실험실의 입구가 열리자, 각자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던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낙조는 눈만 보이는 그 얼굴들 속에서, 밤이를 단번에 찾아 낼 수 있었다.
밤이는 낙조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리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손엔 검붉은 피가 담긴 플라스크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조금 느린 손길로 제자리에 놓아 두고선 마스크를 벗었다.
“고낙조 씨가 일어났어. 내가 투여하라고 한 만큼 약을 넣지 않았나 봐.”
켈리는 밤이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낙조가 볼 수 있는 모습은 그녀의 뒤통수뿐이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 상태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 밤이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낙조와 눈을 마주친 채 대답했다.
“둘이 얘기하게 해 주세요.”
‘켈리한테 경어를……, 써?’
밤이가 켈리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기억하던 때와 완전히 달랐다. 켈리는 못마땅한 듯 낙조를 한 번 뒤돌아 보더니, 5분만 주겠다고 하고선 작은 사무실로 가라고 말했다.
그새 팔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새 피부까지 돋았다. 밤이는 이제 작아진 낙조의 상처를 응시하다가 따라오라며 먼저 발을 떼어 냈다.
사무실에 들어와서도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밤이만이 풍기는 독보적인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달리 그녀가 어느 정도 ‘악어와 새’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낯선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낙조는 그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차라리 의심만 가진 채 멀어지는 게 나았다. 판결문처럼 완전히 밤이와 적대적인 관계라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까지 기억 나니.”
밤이가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과연 밤이는 솔직할까. 아니면 켈리의 계획 절차에 따라 자신을 다시 어딘가에 가두려 할까. 낙조는 그녀의 눈을 피한 채 대답했다.
“순찰조로 다녀온 날 밤에, 켈리와 누나랑 같이 실험실에 들어갔던 거.”
“잘 기억하네.”
“……무슨 소리야. 사고 나고서 바로 실려 왔다는데.”
“그걸 믿니?”
밤이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되물었다.
“네 기억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네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바꾼 거라곤 생각 안 해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