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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80화 (80/202)

80화. 부름에 거역하기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사고를 하는 시간마저 주지 않는 켈리의 명령에 온몸이 요동을 치느라 숨 쉴 틈도 없었다. 켈리는 그리 길지 않은 명령으로 짧은 시간마다 낙조를 몰아쳤다. 낙조의 몸은 켈리의 말을 빠르게 흡수했다. 낙조가 스스로 팔을 거두려 힘을 써도 이길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준 힘을 반동으로 뒤바꿔 변종들을 더욱 잔인하게 포섭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진액이 가득 들어차고, 꾸덕한 진액이 팔 위를 기어오르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의식과 촉각은 별개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낙조는 모든 변종이 짧은 새 자신의 팔에 꿰뚫린 채 늘어진 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로비에 서 있던 켈리와 남자들은 무표정했다.

“잘 됐네.”

켈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낙조는 그제야 켈리와 자신과의 거리를 알아챘다. 자신은 밖에 나온 상태고, 켈리는 안에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는 거다. 켈리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생생하게 들렸다면 아직까지도 발악하고 있는 지운의 처절한 비명도 들려야 했다. 그러나 웅웅대듯 퍼져 나가는 지운의 비명은 켈리의 목소리만큼 선명하지 못했다.

명령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하는 흉내라도 내야 했던 막시안의 모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겁에 엉망진창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정체가 탄로난 후에도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행동들이.

「켈리 화이트라는 사람을…….」

의식을 차릴 즈음 귓속을 앵앵거린 말들 중 기억 나는 이름이 있다. 낙조는 숨을 다스리며 자신의 변한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변종은 이미 모두 목이든 신체 어느 부분이 다 잘려 나간 상태였다. 자신의 주변에 변종은 없었음에도 오른팔은 전처럼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내부고발자를 추측하기엔 낙조의 기억은 아주 촘촘했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헤아릴 수 없다. 낙조는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켈리의 눈을 마주하다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진 것 같은 이파리가 탐욕스럽게 손바닥 안쪽을 부풀렸다.

켈리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낙조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꽂히기 전에 오른손을 유리창에 세게 박아 넣었다. 워낙 단단한 유리인지라 단숨에 문이 부서지진 않았으나 조금의 틈을 비집고 이파리가 안쪽에서 성을 냈다.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낙조는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팔을 안쪽으로 더욱 쑤셔 넣었다.

“그만!”

단숨에 발사 된 총알처럼 켈리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낙조는 정말 총상이라도 입은 듯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서 잠시 주춤거렸다. 목소리 하나에 누군가 자신의 오른팔을 밖으로 잡아 당기는 느낌이 거세게 들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낙조는 입술을 달달 떨며 말했다. 말 한 마디조차 내뱉는 것이 힘겨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으나, 이대로 켈리의 목소리에 침몰하고 만다면 그 뒤는 불 보듯 빤했기 때문이었다.

낙조의 말에 켈리의 왼쪽 눈썹이 심하게 뒤틀렸다. 조금 전만 해도 평화롭게 명령을 내렸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고선 낙조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떼어 냈다.

켈리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낙조의 몸은 보다 더 무거워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중심을 붙잡는 게 힘들어졌다.

“너는 감사할 줄 모르는구나.”

켈리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뾰족한 손톱으로 긁어 내는 듯했다. 소리가 지나간 곳마다 따가움이 일었고 상처가 난 곳에선 그녀의 목소리가 쪼개지고 갈라져 온몸을 더욱 옥죄었다.

“그래도 항상 내 예상을 깨뜨려 주는 게 나는 너에게 참 고마웠는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란 걸 네가 생존하면서 증명해 주니까.”

“당신은, 사람 새끼도 아니야……. 큭,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허억, 죽어 나가는데, 그걸 씨발……!”

“뭘 얘기하고 싶은 거야. 세상이 이렇게 된 게 내 탓이라는 거니? 그럼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송 밤이라는 여자는, 너는 왜 이해해 주고 있을까? 그 여자도 똑같잖아. 세상이 이렇게 변한 걸 잘 이용하면서 산다고.”

“당신처럼, 당신처럼 사람을 괴롭히진 않지. 윽, 흐윽……. 다른 사람을 일부러,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아. 당신 같은 사람 옆에 누나 갖다 대지도 마.”

“이런 걸 멍청하다고 하는 거니, 아니면 네가 모르는 척하고 싶어서 끝까지 발광하는 걸까. 아쉽구나, 힘은 쓸 줄 알면서 어디에 써야 하는지는 정작 모르는 게.”

가빠질 대로 가빠진 호흡은 거의 기도를 막는 수준이었다. 낙조는 심해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문고리를 두 손으로 붙들고 눈을 부릅 떴다.

이대로 의식마저 잃는다 해도, 자신의 몸이 덩달아 함께 수그러들지는 알 수 없었다. 몸과 의식이 완전히 분리된 이 느낌에 고분고분해지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만약에, 이것도 진짜가 아니면?’

꿈속의 꿈. 낙조는 너무나도 따스한 햇살을 등진 채로 생각했다. 이 또한 켈리가 멋대로 침범한 자신의 무의식 속이라고 해도, 주인은 결국 낙조 자신이었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으로 이루어진 구역.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각화된 것뿐이라고.

“계획에 자만해서……, 조그마한 실수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낙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켈리와는 겨우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상태였다. 낙조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서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낙조의 말을 정확히 들었는지, 그녀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 낙조를 응시했다.

“힘을 어디에 쓸 줄 모르는 게 아니야.”

“……너.”

“깨뜨릴 곳이 보일 때까지 기다린 거지. 당신처럼 남용하는 게 아니라.”

말을 끝마친 낙조는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열기가 식지 않은 팔에선 굵직한 뿌리들이 살을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낙조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켈리는 주먹을 꽉 쥐고서 입을 열었다.

“멈춰!”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몸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낙조는 땅으로 꺼질 것만 같은 무게에도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고서 버텨 냈다. 바들바들 떨리던 몸은 점차 그 무게를 견디면서 천천히 위로 솟아 올랐다.

“……소용없을 텐데.”

“불가능하진 않지.”

켈리는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지만 낙조는 자신을 억누르려는 힘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말했다. 몸을 일으키려 할수록 뼈가 부러질 것처럼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러나 당황하며 막무가내로 벗어나려고 했던 초반에 비해 몸을 움직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꿈속에서부터 낙조를 핍박한 켈리의 작전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켈리의 목소리만 들렸던 이유, 자신이 밖에 내쳐졌음에도 변종이 더 꼬이거나 그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

낙조는 삐그덕대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후 유리문 너머의 켈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조용히 팔에 힘을 싣고서, 유리문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콱, 콰지지지직-

두꺼운 유리에 박힌 손에서 통증이 일었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낙조는 말없이, 계속해서 유리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유리가루가 흩날리고 작은 조각들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피가 튀면서 비릿한 냄새도 풍겼다. 그러나 여전히 변종의 기류는 없었다. 낙조는 유리문이 조금씩 깨지는 걸 보면서 이 공간에 대한 확신을 품었다.

‘여기는 밖이 아니야.’

콱, 콱, 퍼어억!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낙조와 켈리 사이를 막고 있던 유리문이 부서져 내렸다. 폭포가 쏟아지듯 유리 알갱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유리문 너머의 ‘진짜’ 광경을 비췄다.

켈리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로비에 붙잡혀 있던 지운과 켈리의 용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화사한 햇빛이 비추던 바깥의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로비의 풍경도 없어졌다. 켈리와 낙조는 창문 하나 없이 커다랗고 하얀 방 안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낙조의 등을 비추고 있던 건 그저 천장에 달린 핀 조명이었을 뿐이었다.

“허억, 헉, 하…….”

숨도 쉬지 않고 유리벽을 몰아 치느라 호흡이 가빴다. 낙조는 머릿속을 울리던 켈리의 목소리도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낀 후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켈리는 낙조와 눈이 마주치자 뒷걸음질 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죽여야 할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여자 손에서 몇이나 죽어 나갔어, 홍해화나 홍지운, 밤이 누나가 안전한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진짜로 무사할까?’

머릿속에 순간 그 생각이 스쳤다. 자신이 언제부터 실험을 당했다는 시간의 증거가 없으니 기억은 믿을 게 되지 못했다. 낙조는 벽에 붙은 문고리를 더듬고 있는 켈리의 어깨를 붙잡아 구석으로 밀쳤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 떨어지기 전 낙조의 볼을 철썩 때렸다.

“당장 올라와! 당장! 전부 움직여!”

그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무전기에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낙조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다가 무전기를 빼앗아 벽에 찧어 완전히 부서뜨렸다. 켈리는 숨을 씩씩대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친구들……, 어디에 있어.”

짐승이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에 켈리는 구석에 등을 완전히 붙이고서 낙조를 노려보았다.

“머리에, 머리에 든 게 없으니 힘으로 모든 걸 알아내려고 하는구나.”

달달 떨면서도 켈리는 당당했다. 여전히 낙조에게 충고를 하는 것처럼 말을 굴렸고, 낙조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굉장히 날카로웠다.

“그럼 그쪽은 머리가 얼마나 무겁길래. 머리 둘 곳 찾는 거 아냐? 대신 싸워 줄 사람, 대신 죽어 줄 사람 찾는 거잖아.”

“난 너 따위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낙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켈리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거의 갈라진 목소리는 듣기 싫은 소음을 냈고, 낙조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켈리의 얼굴 옆 벽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럼 뭐 해, 당신은 결국 나 못 잡았어. 실패한 거야.”

“……이, 이……!”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는 듯 켈리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낙조의 오른팔에 달려 들었다. 그녀는 조금 자란 손톱을 끝까지 세워 팔뚝에 달라 붙고서 가장 두툼하게 돋은 혈관을 꽉 깨물었다. 단단한 치아가 피부를 찢으려는 듯 좌우로 움직였다.

“아, 씨!”

낙조는 불에 데인 것처럼 황급히 팔을 떼어 냈다. 힘은 압도적으로 낙조가 우위였기 때문에 켈리는 금세 나가 떨어졌다. 그녀는 반 바퀴를 굴러 문 근처에서 쓰러졌다. 물어뜯긴 곳을 내려다보니, 살가죽이 뜯겨 나간 부분에서 거무튀튀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주변엔 켈리의 선명한 잇자국이 보였다.

본래라면 피부 안쪽에 붙어 있어야 할 혈관이 뿌리 뽑힌 나무마냥 밖으로 튀어 나온 게 보였다. 꼭 껍질이 벗겨져 잘린 전선 같기도 했다. 총상을 비롯한 갖은 부상은 다 당해 보았지만 이렇게 피부가 물려서 뜯긴 적은 처음이었다. 낙조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뿌리들을 멍하니 보다가 켈리가 나가 떨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앙이군.’

자신의 살가죽과 결국 뜯긴 혈관뿌리를 지독스럽게도 물고 있는 켈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녀는 겨우 상체를 일으킨 채 낙조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와중에도 낙조의 피를 꼴깍꼴깍 삼켜 댔다. 파란 눈은 광기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저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거북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벌컥, 쾅!

그 누구도 잠시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벌컥 열린 문 너머엔 켈리의 용병들이 각자 총을 겨눈 채 서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장 선 이가 주저앉은 켈리를 보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억, 어억, 어……!”

“……뭐 해, 잡아야지,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으라고!”

그런 용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켈리는 손바닥에 입에 물고 있던 낙조의 살가죽을 뱉어 내고 소리쳤다. 그녀의 치아 사이사이엔 가느다란 혈관뿌리가 끼어 있었고, 잇몸과 입술 주변은 검은 피로 뒤덮여 흰 피부와 대조돼 더욱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다 죽고 싶어!”

아마 그들도 이렇게까지 돌아 버린 켈리의 모습은 보지 못했을 테다. 낙조의 무의식에서조차 그녀는 항상 품위 있는 복식에, 예의를 차리려 했고, 존댓말을 빼먹지 않았으니까. 그저 낙조는 그녀의 일상을 받치고 있던 가장 밑바닥의 자존심을 건드려 본 것뿐이다. 거기에 비틀대다가 무너진 건 켈리 그녀였다.

“안 그래도 다 죽을 거야.”

켈리의 호통에 대답한 건 낙조였다. 낙조는 피가 튄 안경알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낸 후 서늘한 시선으로 켈리와 그녀의 용병들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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