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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78화 (78/202)

78화. 신기루 (2)

소리 한 끗도 낼 수 없었다. 낙조는 크게 뜬 눈으로 밤이를 직시한 채 몸에 갇혔다. 가위에 눌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정신까지 내리누르려 하고 있었다. 켈리는 밤이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리 목을 쥐어짜 소리를 치려 해도 입은 열리지 않았다.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낡은 전구처럼, 이대로 발버둥을 치는 것도 포기하면 모든 것을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스멀스멀 퍼졌다.

‘몸이 왜 이래?’

설상가상으로 겨우 붙잡고 있는 정신마저 잠들까 봐 겁이 났다. 시야는 밤이를 향한 그대로 붙들려 있었고, 다른 곳으로 눈을 굴리지도 못했다. 그저 밤이가 자신을 돌아봐 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낙조는 죽어라 밤이를 부르려 했지만,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곧 켈리의 그림자가 낙조의 얼굴을 덮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낙조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따끔거리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이 잘려 나가 눈만 덩그라니 뜬 느낌이었다. 켈리가 자신의 피를 뽑는 건지, 아니면 다른 액체를 주입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낙조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밤이가 의심스러운 걸 넘어서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게 있는데, 켈리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밤이라면 켈리의 단독적인 행동을 가만히 둘 리 없다. 그녀라면, 밤이라면…….

‘밤이 누나가 아니라면?’

그 생각이 번개에 맞은 것처럼 꽂혔을 때, 눈앞이 일순간 흐려졌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듯이 입체적인 면들이 뒤죽박죽 얽혔다. 피를 뺀 게 아니라 환각 증세가 있는 약물을 넣었구나. 낙조는 직감했다. 그나마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마지막 감각이었던 시각마저 잃는다 생각하니 맥이 빠졌다.

‘아무도 들어왔다 나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낙조의 시야는 처참하게 부서지는 와중에도 밤이의 뒷모습을 꾸역꾸역 담아 내고 있었다. 낙조는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하는 상태로 점차 무너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환각이, 이곳에 들어온 후부터 시작된 게 아니라면. ……내 저녁에 또 약을 넣어서,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밤이는 낙조의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 때까지, 매정하게도 뒤 한 번 돌지 않았다. 낙조는 순식간에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하나의 영혼으로 남았다. 그때쯤 드는 생각은 ‘저 여자는 송밤이가 아닐 것이다.’라는, 동료를 의심하며 잃고 싶지 않은 믿음이었다.

‘그럼 내가 진짜로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도 억지로 온몸을 뒤틀려 했던 힘을 완전히 빼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심해로,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아래로 계속 추락시키려는 중력과, 위에선 꼼짝도 못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압박이 동시에 낙조를 붙들고 있었다. 빛 한 줄기 스며들지 않는 곳에서 낙조는 고군분투할 힘마저 잃었다.

힘에 이끌리는 대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공간에서 낙조는 점점 자신의 존재를 제외한 공간의 광활함을 무시무시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림자에 오랫동안 숨어 있던 외로움과 고독함 등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낙조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렸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찮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자존감이 깎이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새로운 것은 ‘박탈’이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자신에게 ‘유일한 성공작’이라고 말해 주었던 그 말이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을 살린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낙조의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없었으니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삶을 용케 붙들고 있던 자신에게 ‘신’ 비슷한 것이 내려 준 선물 같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더럽게 맞지 않던 로또 번호가, 스크린 속에서만 봤던 잭팟이, 이 멸망 직전에 목을 들이댄 세계에선 고낙조 ‘자신’의 존재 자체라고 착각을 했었다.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있구나.’

‘불사’를 무기라고 생각한다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말한 켈리의 말이 이해가 갔다. 물리적인 힘을 쓰지 못하면 자신은 무거운 추를 발목에 달고 하염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이름 없는 떠돌이와 다름이 없다. 이렇게 사라져도 발 벗고 자신을 찾을 이는 없을 것이다.

몸을 도둑맞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텅 빈 자신의 몸에 그녀는 무얼 심을까. 켈리는 어떻게 말하는 목소리를 원할까. 낙조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보 수 없는 캄캄한 공간에서 쉬지 않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래야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감각마저 잃는다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걸 알았다.

―고낙조 씨.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머릿속으로 반복하며 외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낙조를 불렀다. 낙조는 그제야 캄캄하기만 했던 시야에서 사람의 인영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손끝과 발끝이 따끔거리는 감각도 느껴졌다. 낙조는 액체 한 방울도 담기지 않은 캄캄한 공간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그 인영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낙조는 조금 더 빠르고 힘차게 발을 굴렀다. 마침내 그 희미한 인영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손에 닿을 때, 시야가 또 한 번 뒤집혔다. 아주 조그마한 구멍으로 정신이 빨려 들어갔다. 토네이도에 속절없이 휩쓸린 것처럼 낙조의 시야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고낙조 씨, 눈을 떠요.

어지러움에 구역질이 날 무렵, 다시 똑같은 목소리가 낙조를 불렀다. 낙조는 응답하듯 시야를 열었다. 코앞엔 진한 녹색 수트를 차려입은 켈리가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하늘은 새빨갰다. 해가 지는 땅의 끝에 온 것처럼, 주위가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낙조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고개가 움직여졌다. 그 다음으론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궁금하죠?

켈리는 조그마한 티 스푼으로 찻잔을 톡, 톡, 두드렸다. 그 어떤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청명한 울림이 메아리를 낳았다. 낙조는 자신의 두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만 겨우 쉬어 댔다. 왼쪽 손바닥은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오른손은 괴사한 식물의 이파리로 뒤덮여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돌아오다가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 가까스로 다섯 손가락이 식물의 줄기를 뚫고 솟은 게 보였다.

―이건, 고낙조 씨가 만든 세상의 결과물이야.

켈리는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낙조에게 말했다. 그녀의 옷차림이나 티 테이블만 보았을 땐,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낙조는 전처럼 그녀에게 당당히 맞설 수 없었다. 진짜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고, 이대로 켈리가 떠나 버린다면 ‘완벽한 외톨이’가 된다는 사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고낙조 씨가 죽지 않아서……, 당신이 스스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상은 이렇게 됐다구. 주변을 좀 더 봐. 아는 얼굴들도 있을 거야.

켈리는 그렇게 말하곤 찻잔에 입을 댔다. 낙조는 주저앉은 자신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어 내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해의 반쪽이 점령한 하늘 아래, 무수한 시체들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변종이 인간을 공격했는지, 인간들끼리 서로를 죽이려 했는지, 아니면 모두 변종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쓰러진 사람들 모두가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해……화.”

목을 열기도 전에 뜨겁게 젖은 목소리가 낙조의 혓바닥을 잠식시켰다. 낙조는 거친 길 위를 엉금엉금 짚어가며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해화의 시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자신이 잠겼었던 심해처럼 새카맣고 텅 비어 있었다. 낙조는 해화의 목을 받쳐 들어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살갗에 느껴지는 감촉은 아직 부드러웠다. 굳지 않았다. 낙조는 해화의 손을 주무르면서 숨을 겨우 터뜨렸다.

“홍해화…….”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낙조는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다 시선이 또 멀지 않은 곳에 멈추었다.

“홍지운…….”

입술 새로 흩어져 나오는 이름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지금까지 몇백 번을 불렀을까. 외치기도 했고 속삭이기도 했던 이름을 부르자, 그저 흐릿하기만 했던 시신의 얼굴은 낙조에게 응답하듯 또렷해졌다.

지운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총을 얼마나 맞았는지, 성한 곳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낙조는 다시 바닥을 기어 지운의 시신을 안았다. 지운은 꼭 낙조를 바라보는 것처럼 눈을 뜨고 있었다. 해화처럼 캄캄한 눈동자에 낙조 자신의 얼굴이 선명히 비쳤다. 낙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운의 상처를 찾았다. 무차별 사격을 받은 것인지 가슴과 배 쪽에 유난히도 총알이 박힌 상흔이 많았다.

‘내가 뭘 했기에 이렇게 됐지.’

낙조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만 지운의 몸 위로 뚝, 뚝, 떨어졌다. 낙조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무거운 눈물이 흘렀다. 낙조의 숨소리만이 지독할 만큼 짙은 적색 공간을 가득 메웠다. 켈리는 더 이상 낙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낙조 또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아는 얼굴들이 쓰러져 있었다. 송밤이, 막시안, 김도연, 백무흠……. 모두 적색의 빛을 받으며 누군가 구해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낙조는 젖은 얼굴을 닦지도 않고서 멍하니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켈리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내가 죽였어요?”

―그런 것까진 알려 주지 않아. 나는 그저 보여 주는 거야. 고낙조 씨가 선택한 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그런데 왜 당신은 없죠?”

―내가……, 당신을 빤히 아는데, 저렇게 죽어 있을 리 없잖아.

켈리는 눈을 크게 뜨고 느리고도 묵직한 말투로 대답했다. 낙조는 켈리의 말을 무시하고서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아예 눈을 감았다. 보지 않는 게 오히려 현명한 판단일 수 있었다.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익은 새빨간 하늘 아래서 무력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됐다. 이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우자. 낙조는 품에 안은 지운의 시신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냥 환각이야. 켈리가 나를 몰아 세우고, 협박하기 위해서……, 지어낸 모습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되뇌었지만 낙조는 당당하게 눈을 뜰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 수 있게 만들어준 상대를 향한 의심이, 방향을 틀어 자신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나는 정말 내 힘이 긍정적인 결과를 이끈다고 생각하나. 내가 결정한 일들은 과연 정의로웠나.

‘고작 환각이라 해도, 이 정도로 현실과 똑같은 세상을 어떻게 구현하지? 모든 게 진짜 같잖아.’

낙조는 눈을 감은 채 지운의 손을 찾아 붙잡았다. 조금의 힘도 실리지 않은 지운의 손은 그새 약간 굳어 있었다. 낙조는 거친 호흡을 갈무리하면서 기도하듯 지운의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댔다.

의심은 끝없이 최악을 상상하게 만든다. 낙조는 시뻘건 빛에 잠긴 시신들의 피가 자신이 낸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켈리는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점을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는 걸 지적했다. 내가 죽지 않는 게 왜 일행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눈을 뜨기 두려웠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을 것 같아서.

―잘 생각해 봐. 고낙조 씨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잠깐, 잠깐만!”

한동안 말이 없던 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점점 멀어지는 켈리의 음성에 눈을 뜨고 그녀가 있던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켈리의 모습은 티테이블에 앉은 그대로,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잠에서 깨려는 노력 정도는 해보고 나를 원망해야지. 그만한 힘도 없으면서 날 상대하려 했다면, 이번 기회에 분수를 좀 알도록 해.

켈리의 몸은 아주 고운 모래알보다도 작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그녀는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낙조는 꼭 신전에 엎드려 신탁을 듣는 사람처럼, 멍하니 켈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켈리는 이윽고 완전히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낙조는 조각이라도 붙잡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켈리의 말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었던 이 세상에 대해 알게 됐으니까.

‘잠에서 깨려는 노력…….’

어디서부터 꿈이었을까. 아직도 나는 그 작은 방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탈출은 고사하고 막시안과 순찰조로 나간 적도 없던 게 아닐까. 분명히 자신의 기억에선 모든 시간 흐름이 맞아 떨어졌지만 환각이 일어나기 시작한 부분을 확실하게 짚을 수 없었다. 낙조는 멍하니 시체로 가득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태껏 스스로가 개인적인 악의를 갖고 힘을 사용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목적은 언제나 비슷했다. 곁에 있는 이를 지키기 위해. 처음엔 본성과도 같은 생존을 위해 힘 썼고,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지켜 주는 이들을 똑같이 지켜 주기 위해 힘을 사용했다.

물론 그 힘이 왜 자신에게만 통용되는지, 다른 변종들을 두고서 왜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갈구하는지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라고 하기엔 ‘유일한 성공작’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걸렸다. 서연우는 잠깐 같은 편으로 지낼 때만큼은 켈리처럼 낙조를 자신의 발 밑에 두려는 수작은 두지 않았다. 해화의 몸에서 자라나는 이파리가 백신 개발에 결정적인 재료가 된다는 사실에도 여전히 자신을 목표물의 선두에 두고 있다. 낙조는 그 이유를 켈리에게서 조금이라도 찾으려 했었다.

“일어나.”

문득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응시했다. 무척 피곤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얼굴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대비되어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눈 밑은 퀭했고, 눈동자는 삼백안으로 눈빛이 묘하게 거칠어 보였다.

“…….”

낙조는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모두가 죽은 자신의 꿈속에서 자신과 똑같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를 발견했음에도 놀랄 수 없었다. 낙조는 이미 켈리의 말을 믿고 꿈에서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독한 꿈이니만큼 꿈에서마저 헛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자는 키가 조금 컸으나 굉장히 말라 보였다. 그는 긴팔에 무릎을 간신히 덮는 길이의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데도 남자의 옷자락이 하늘거렸다. 낙조는 붉은 하늘을 등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견디다가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고낙조. 이대로 계속 잘 거야?”

어쩐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게 힘들었다. 남자는 자신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낙조는 눈만 굴려 남자의 발을 바라보았다. 그는 맨발이었지만 상처 하나 없었다. 뼈대만 남아 있는 듯한 남자의 발목을 보던 낙조의 눈이 순간 커졌다.

남자의 발목엔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자의 꽃은 줄기를 타고 종아리를 감싼 후 위쪽으로도 뻗어 있었다.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다리가 완전히 식물에 감긴 상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낙조는 입을 벙긋거렸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인가?’

켈리가 말한 대로 이 광경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미래라면, 이 남자는 시간이 흐른 후에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눈 떠. 일어나서 만나.”

남자는 낙조가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낙조의 이마를 뒤로 밀었다. 그 짧은 새에 낙조는 남자의 손가락에도 얇은 넝쿨이 감겨 있는 걸 보았다. 무겁고도 단단한 힘이 자신을 힘껏 밀치는 기분과 함께 낙조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붉은 불빛이 넘실거렸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남자의 얼굴은 자신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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