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신기루 (1)
연우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가운을 벗어 내팽개쳤다. 무흠은 처음과 달리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던 자신의 애원에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을 올려다보았던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연우는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억이……, 분명 기억이…….”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나. 그동안 나를 속였던 건가. 연우의 머릿속엔 수많은 가정들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무흠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했다.
‘내가 공개 훈련 해도 되겠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이러려고 했나?’
머리를 감싼 연우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생각했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무흠의 태도에 처음부터 경계를 완전히 푼 건 아니었다. 아예 미쳐 버린 건 아닐까 염려하기도 했었다. 수 번의 훈련 과정을 거치며 그런 의심은 싹 사라졌지만. 오늘 보았던 무흠은 지난날과 달랐다.
당최 어디서부터 다시 짚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놓친 시간이 언제인지, 마음 쓰였던 적이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 훈련 시작 전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고낙조를 잡으려는 생각은 있는 거겠지?’
한참 바닥을 바라보던 연우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다시 주워 입고서 밖으로 뛰쳐 나갔다. 기숙사와 본관은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쉬지 않고 달렸다.
‘아직 퇴근하지 않으셨을 거야.’
무흠이 스스로 실험실에 되돌아간 걸 확인하고, 연우는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현장이 어떻게 정리됐는지는 전해 들은 게 없었다. 연우는 엘리베이터도 놔두고 비상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연우의 얼굴을 아는 몇몇 직원이 비상구 문을 등지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우는 그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등 뒤로 그들이 무언가 쑥덕거리는 듯했다.
“소장님! 소장님!”
“연우 씨, 함부로 문 여시면 안 돼요! 지금 소장님께서―”
소장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려고 할 때 복도에 서 있던 어린 직원 하나가 연우를 붙잡았다. 그러나 연우 눈엔 뵈는 게 없었다. 그녀를 힘으로 뿌리치고 문고리를 잡아 문을 벌컥 열었다.
퍽. 툭, 투두두둑…….
문을 활짝 젖히자마자 연우의 머리에 딱딱한 무언가 날아와 부딪쳤다. 연우는 몸을 움츠리며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손바닥이 미지근한 액체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떨어진 건 미니 패드였다. 스크린이 산산조각 난 패드엔 연우가 소장에게 직접 올린 ‘백무흠 훈련 보고서’가 떡하니 띄워져 있었다.
“니가 지금 여길 어디라고 제발로 와!”
소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린 직원이 연우를 부축하며 급히 자신의 소매로 연우의 피를 닦아 주었다. 연우는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소장의 시뻘건 얼굴을 묵묵히 응시했다. 이럴 줄 알았다. 잔뜩 화가 났겠지.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으니까. 연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공개 훈련 일정을 다시 잡아 주세요.”
“뭐? 너 미쳤냐?!”
“백무흠 말대로, 살아 있는 인간을 데려다 놓으면 됩니다.”
“허! 내가 뭘 믿고!”
“직접 보셨잖습니까. 훈련 동영상. 백무흠, 이유 없이 저렇게 나온 건 아닐 겁니다. 백무흠 한 명이 군인 백 명보다 가치 있습니다.”
잔뜩 찡그려진 얼굴을 한 소장을 빤히 쳐다보며 연우는 상처를 가리던 손을 내렸다. 피가 흘러내려 얼굴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연우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말을 이었다.
“고낙조 잡으셔야죠.”
“…….”
“어차피 고낙조만 잡으면 다 잊을 거예요, 오늘 일. 바로 다음 주잖아요. 그 센터에서 고낙조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데, 고낙조가 얼씨구나 하고 굴러 들어올 것 같아요? 당장 코앞에서 놓친 횟수만 수 번입니다. 이번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잡아야죠.”
“니가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그냥 다음 주에 결과만 보고 얘기할 일이지, 왜 공개 훈련 일정을 맞춰 달라는 거야. 어? 서연우, 너 때문에 내 자리까지 위험해져야겠어? 어!?”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
“…….”
“여기서 아무도 소장님이랑 전 못 건들도록. 덤비면 난 죽을 수도 있겠다. 이런 공포를 심어 줘야죠. 우리가 얼마나 이곳에 필요한 사람들인지 깨닫게 해 줘야죠!”
연우는 참지 못하고 바락 외쳤다. 곁에서 연우를 부축하던 어린 직원이 몸을 잠깐 떨었다. 연우는 다시 그녀를 뿌리치고서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가 있어요. 지금 들은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말고. 내 귀에 다시 들려오면, 바로 당신 먼저 찾아갈 거니까.”
“……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오로지 소장과 연우만 남은 방엔 쓴 침묵만이 흘렀다. 연우는 꼿꼿하게 서서 소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장은 책상에 두 손을 얹은 채 한숨만 푹푹 쉬어 댔다.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란 것을 안다. 하지만 반드시 연우는 두 눈으로 봐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보여 주고, 자신의 나이만 보고 깔보던 이들의 머리 위에 서서 그들이 벌벌 떠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
“저녁 식사 시간이네.”
켈리를 내려다보던 낙조가 낮게 중얼거렸다. 켈리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야지, 여기서 입을 열어 봤자 불특정다수에게 자신의 약점을 들추는 꼴만 된다. 낙조는 켈리의 어깨를 쥐고 허리를 굽혀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의 어린 양들 기다리겠어, 먼저 올라가셔요.”
그리곤 다시 차게 식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켈리는 낙조에게서 눈을 떼고 막시안과 해화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요.”
다시 신경을 예민할 정도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졌다. 평상시의 태도를 갖춘 켈리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낙조는 그제야 지운과 해화를 살폈다. 해화는 조금 겁 먹은 모습이었지만 잘 버티고 있었다.
켈리와 낙조 사이에 오갔던 대화 때문인지, 순찰조 일원 모두가 조금 경계하는 시선으로 낙조를 바라보았다. 낙조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로 해화와 지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켈리한테 한 말, 뭐야?”
해화가 주저하는 듯하다가 낙조에게 물었다. ‘죽지 않는 몸’에 대해 하는 말이겠지. 낙조는 감흥 없는 눈을 하고서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했지만 딱히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도 되지 않아서 알게 될 내용이고.
“일단 올라가자.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어.”
낙조는 말을 마치고 도연과 막시안을 돌아보았다. 막시안은 여전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고, 도연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희망이 다 새어나가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 켈리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운과 해화를 데리고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운은 도연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 뒤를 돌아봤지만, 낙조는 그들에게 함께 올라가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서자,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밤이가 낙조를 불렀다. 그녀는 전날 봤을 때보다 많이 지쳐 보이는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그녀에게선 온갖 약품이 섞인 냄새가 풍겨 올랐다. 낙조는 목소리를 낮춘 채 밤이에게 물었다.
“피는 잘 바꿨어요?”
“어. 생각보다 이쪽 애들이 그렇게……, 열정적이진 않더라고.”
밤이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열정적이지 않다……, 정확히 무슨 뜻일까. 낙조는 자신들을 뒤따라 올라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괜한 분란은 일으키지 않는 편이 좋다. 낙조의 의도를 다들 눈치챘는지 다른 이들 모두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
식사를 마친 후 낙조는 밤이와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 켈리는 이미 실험실에 와 있었고, 보는 눈이 적어져서 그런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따라오세요.”
켈리는 밤이와 낙조, 자신이 선택한 연구원만 데리고서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 가운데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양쪽엔 각종 실험 도구들이 정렬돼 있었다.
“얘기를 하는 걸 보니까……, 고낙조 씨는 지금 변한 몸이 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켈리가 등을 보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선 안 된다.’
막시안의 고해성사 비슷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아무리 도망쳐도 번번이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는 유년 시절. 그리고 켈리의 존재 자체가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보였던 태도들. 완벽히 켈리에게 붙잡히다 못해 세뇌 당한 것 같은 모습은 켈리가 끼칠 수 있는 위험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죽지 못한다는 게 정말 무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낙조 씨는 멍청한 걸 수도 있겠군요.”
켈리는 살짝 뒤돌아 덧붙여 말했다. 낙조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애초에 날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겠죠. 다 죽어가는 마당에 불사라, 참 욕심 나는 실험 아닙니까.”
“정말 단순히 실험의 용도로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굳이 당신만 잡으려 부득부득 애를 쓰는 이유를 그렇게만 생각해요?”
“적어도 정의로운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첨예하게 부딪치는 시선에도 낙조는 밀리지 않았다. 켈리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가 어설프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데리고 온 연구원은 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고낙조 씨가 정의 같은 걸 따질 인간이 되나.”
침대 곁에 선 켈리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밤이가 낙조 곁에서 발끈하는 듯 몸을 움직였으나, 낙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와서 누워요. 약속은 지켜야지.”
“당신은 안 지키고, 나는 지키고……. 좀 타산이 안 맞는데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됐나? 고낙조 씨가 다 말아먹은 걸 누가 몰라?”
켈리의 억양이 조금 더 거세졌다. 낙조가 자신의 작전에 직접 훼방을 놨다는 것에 확신을 두고 한 말이다. 낙조는 입을 닫고 켈리를 물끄러미 마라보다가 침대 위에 누웠다. 딱딱하고 온기 하나 없는 철제 침대가 살갗에 닿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내가 직접 볼게요. 다희 씨는 가서 쉬어요.”
“……네.”
켈리는 자신이 데려온 연구원을 내보내고서 밤이와 낙조를 가운데에 두고 대립했다. 그러나 밤이도 어디 가서 입이 다물린다 해도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켈리는 조용히 손에 위생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챙겼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밤이도 잠시 시선을 떼고서 준비를 마쳤다.
“우리 내기할까?”
밤이가 마스크를 쓰자마자 켈리가 밤이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제안에 밤이의 눈매가 서늘하게 갈라졌다. 입을 감춘 켈리의 얼굴에선 웃음기 하나 없었다. 낙조는 손발이 묶이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며 켈리를 예의주시했다.
“고낙조 씨 피가 왜 특별해졌는지, 뭐 때문인지 먼저 밝혀내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
“이기는 사람이 내일부터 고낙조 씨를 혼자 맡는 거고.”
“꽤 적극적이시네. 이런 분인 줄 몰랐어요.”
밤이는 켈리의 자극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받아 쳤다. 밤이의 대답에 켈리는 입으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곤 잠시 낙조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땐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던 파란 눈이, 어딘가 모르게 광기에 젖어 있는 듯했다.
‘그냥 엎어뜨리고 튈까?’
삭막한 실험실의 공기는 몸을 갈수록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도 하나씩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낙조는 애써 천장만 응시한 채 생각하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냐, 적을 알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아야지.’
켈리가 의도한 목적은 무엇인지 밝혀내는 건 이 과정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켈리의 손바닥 안에 갇히지만 않으면 된다. 매 순간 경계하고 지켜봐야 한다. 심장이 평소보다 크게 두근거렸다. 낙조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살짝 폈다. 차가운 철제 침대 때문에 자꾸만 몸이 움찔거렸다.
곧 밤이와 켈리는 서로 뒤를 돈 채 각자의 연구를 시작했다. 밤이라면 자신이 줬던 피를 모두 사용하진 않았을 테다. 켈리도 피를 뽑겠다는 말은 없었다. 낮에 벌어졌던 교통사고로 인한 상처는 거의 아물었고, 배를 스친 총상도 얼얼하기만 할 뿐 아프지 않았다. 확실히 전보다 회복력이 몇 배는 빨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적막이 유난히 길었다. 둘은 각자 무엇을 하는 건지 낙조의 몸엔 손도 대지 않고 각자의 테이블을 떠나지 않았다. 낙조는 번갈아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그때 소리도 없이 켈리가 손에 무언가를 지고서 낙조에게 다가왔다. 밤이는 뭔가에 굉장히 집중한 듯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낙조가 밤이를 부르려 입을 열 때였다.
“잘 자.”
켈리가 손에 쥐고 있던 아주 적은 양의 가루를 낙조의 코끝에 불어 흩날려 보냈다. 그녀가 직접 소곤거렸는지, 아니면 낙조가 헛것을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낙조는 얼어붙은 것처럼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루를 흡입하고서도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정신만 깨어 있고 몸은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