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궤변 (2)
―해당 IP로는 접속할 수 없습니다.
‘이게 뭐야?’
수호는 덩그러니 스크린에 뜬 창을 바라보았다. 읽고 또 읽어도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금 로그인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파일을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막혔다.
‘접속 기록은 분명 다 삭제된다고 했는데.’
로그인 기록을 내가 지우지 않았나? 수호는 머리를 쥐고 몸을 떨었다. 처음 백무흠의 정보에 접근할 땐 단순히 호기심과 서연우에게서 지고 싶지 않았던 오기 때문이었기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호흡도 함께 가빠졌다. 수호는 황급히 스크린을 돌려 밖에 설치된 CCTV를 확인했다.
‘아직 그대로야.’
백무흠은 관중들 앞에 서 있고, 서연우는 경비들에게 막힌 채 소장에게 무어라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래, 급하겠지. 급한 불은 꺼야 하니까. 수호는 틈틈이 그 스크린을 확인하면서 IP 우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국가 IP도 살아 남은 건 얼마 없겠지만, 손 쓸 방도는 그것뿐이었다.
‘서연우가 백무흠을 통제하지 못하면 백무흠은 탈출하거나 죽을 거야.’
손바닥에 식은땀이 계속 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백무흠은 서연우를 또 속일 거야. 지금 당장 여기를 전멸시킬 수는 없으니까.’
무흠이 연우의 말을 들을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자료를 복구해야 했다. 누가 자신의 침입을 눈치챘는지는 나중에 알아내도 괜찮았다. 문서들이 저장된 사이트가 통째로 날아간 게 아닌 걸로 보아서, 이쪽의 수장도 아직 이 자료들이 필요한 모양인 것 같았으니까. 수호는 세 개의 컴퓨터들을 왔다갔다 하면서 문서에 정상적으로 접속되기를 기다렸다.
[2021년 6월 2일]
어떤 문서를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6월 근처의 문서는 모두 확인할 작정이었다. 수호는 연결이 됐다는 사실에 안심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글자를 읽었다.
[이 문서는 잠겨 있습니다.]
“씨발, 진짜 미치겠네…….”
수호는 주먹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려치고서 다시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그 문서가 원래 잠겨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접근을 알아챈 이가 잠갔는지는 알 수 없다. 내용을 확실하게 알기 전까진. 수호는 진땀을 빼면서 빠르게 다른 컴퓨터로 암호를 해킹하기 시작했다. 손을 바삐 놀린다고 해서 눈이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시 바깥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눈을 돌린 수호는 잠시 몸을 굳혔다.
연우가 기어코 경비들을 뚫고 무흠의 앞까지 다가갔다. 대화를 엿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무흠이 대응하는 태도로 상황을 추측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흠은 말없이 연우를 응시하고 있었고 연우는 보아하니 그를 달래려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저럴 줄 알았어,”
표정 하나 없이 일관하던 무흠이 엷게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수호는 이를 바득 씹고서 다시 해킹에 열을 올렸다. 무흠의 손목엔 다시 쇠사슬이 걸리나. 다시, 그 어두운 곳에 처박히게 될까.
[문서를 열고 있습니다.]
동시에 맨 왼쪽에 있던 컴퓨터 스크린이 하얗게 변했다. 수호는 속으로 함성을 내지르며 의자를 힘차게 왼쪽으로 끌었다. 시간이 이제 정말 얼마 없었다. 무흠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니, 지금도 다시 일하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직원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 자신의 행적을 포착한 이가 있을 수도 있다.
[PS. 지명하신 병사는 피마자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병사의 생생한 피는 일반인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의 독성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성은 옅어지겠지만, 다시 식물 세포를 주입한다면 독성은 되살아날 겁니다. 기억을 지우려 뇌에 강한 충격을 주었으나 효과가 미미합니다. 실험을 강행하고 싶다고 하셨지만 지금 상태로는 불가합니다. 기껏 공을 들이신 샘플을 죽이고 싶진 않으실 게 아닙니까. 박사 K가 다시 돌아올 확률은 없어 보이니, 잠시 실험을 미루십시오. 이 병사는 K에게 세뇌당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박사 케이가 누구야.’
처음으로 문서에서 누군가를 지목하는 문장이 나왔으나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본부 내부에서 알 법한 이들의 이니셜에 K가 들어가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그 문서는 2021년 6월에 작성됐다. 그때 자신은 대학교에서 술에 취한 채 기말고사 준비나 하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백무흠은 알겠지. 백무흠만 알 거야. 서연우도 모를 거고.’
수호는 막연한 확신을 갖고 문서를 아예 캡처하여 자신의 파일에 옮겨 놓았다. 연우도 모르는 무흠의 과거. 그것이 아마 무흠과 대화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수호는 한 컴퓨터만 빼고 다른 컴퓨터들을 종료시켰다.
*
해화는 무사히 ‘악어와 새’로 돌아왔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낙조와 막시안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색이 되었다. 출발하기 전 막시안에게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면서. 낙조는 그녀가 자신 쪽으로 뛰어오는 사이에 어떻게 해화를 설득할지 생각했다. 일단 지운과 도연은 목격자로서 충분히 납득을 시켜 뒀으니 적당한 말 한두 마디 정도 얹으면 될 것 같은데……, 해화가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너, 이게……!”
“난 안 죽어. 딱 보면 모르냐?”
“헛소리 하지 마! 막시안, 당신은 또 왜……!”
“차 미끄러져서 좀 박았어.”
“그럼 치료해야지. 왜 바보 같이 서서 기다리고 있어?!”
“홍해화, 진정해 봐. 너 막시안한테 들었다며.”
“……뭘?”
순간 주변이 삭막하게 가라앉았다. 낙조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가, 막시안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막시안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손에는 언제 꺼낸 건지 총이 들린 채였다. 낙조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세……
철컥.
“막시안.”
늦었다. 막시안은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뜨고서 해화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었다. 낙조는 몸을 움직이려 하는 순간 자신을 붙잡은 해화의 손길에 가로막혔다. 해화는 차분했다. 처음 낙조의 상처를 봤을 때와는 달리 사뭇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에도 떨림이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 막시안을 응시한 채 낙조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알아서 하겠다 이건가.’
낙조는 그런 해화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켈리가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부러 큰 소동을 만드는 건 피하기로 했다. 물론 지운의 눈이 돌아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야, 개새끼야! 너 총 안 내려!”
“홍지운. 거기 서 있어.”
“홍해화, 야!”
“서 있으라고!”
해화도 밀리지 않았다. 지운은 금방이라도 막시안의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씩씩댔다. 해화는 다시 느슨해진 시선으로 막시안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건 둘이 짠 판인가.’
낙조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오늘 세운 계획은 외출을 하자마자 경로를 이탈했다. 그것처럼, 이것 또한 자신이 모르는 작전 중 하나가 아닐까. 해화가 이상하게 침착한 모습이 그런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막시안 저 새끼는 왜 표정이 저러는데?’
……하긴, 내 입으로 나 쏘라고 했을 때도 미안해 죽으려고 하는 얼굴이었지.
낙조는 몇 시간 전의 일을 회상했다가 곧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소리에 해화의 팔을 붙잡고 자신의 뒤로 숨겼다. 막시안은 여전히 총구를 내리지 않았고, 총구의 끝엔 낙조가 걸쳐지게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장면이랑은 많이 다르네?”
켈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말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봤을 때와는 달리, 조금 더 편안한 복장을 하고 안경을 낀 상태였다. 화학용품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실험실에 쿡 박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낙조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켈리를 주시한 채 해화의 팔을 꽉 쥐었다.
“막시안, 너 최선을 다했니?”
켈리의 고개가 잽싸게 막시안에게로 돌아갔다. 잔혹동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켈리의 크고 파란 두 눈은 심연 속에서 고요히 빛났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막시안은 여전히 낙조 쪽을 바라보고 선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낙조는 숨죽인 채 그와 시선을 주고받다가 문득 막시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본보기예요. 아무리 도망쳐 봤자 너희들은 잡혀올 것이고, 자신이 죽으라고 할 때까지 죽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살려 둔 거죠. 날 보면서, 도망칠 희망을 없애 버리는 거예요.」
‘얘 지금 무서워서 이러네.’
어렸을 때부터 부모처럼 따르고 나이에 비례하며 심부름을 도맡았다는 이야기. 켈리를 알아야 그녀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 번번이 도망쳤지만 어김없이 붙잡히고, 끌려오고, 그럼에도 용병을 해야 했던 막시안은……, 지금 그녀가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두려울 뿐이다. 그녀가 지시한 것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시안?”
“…….”
방아쇠에 걸쳐졌던 막시안의 손가락을 보고, 낙조는 어느 방향으로 몸을 던질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켈리가 막시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막시안은 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호흡을 억지로 맞추느라 빨갛게 익은 막시안의 얼굴이 눈앞에 놓였다. 낙조는 동시에 켈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걸 보고 오른팔을 뻗어 켈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텅 빈 손이 허공에 붕 뜨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내가 직접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쥐새끼를 심어 놓으셨더군요.”
낙조의 말에 켈리의 얼굴도 따라 굳어졌다. 그새 지운이 해화를 자신의 곁으로 끌고 갔다. 낙조는 여전히 벌벌떠는 막시안을 힐끗 바라보고서 다시 켈리를 응시했다. 과연 이 하얗고 파란 낯짝이 진짜 살가죽인지, 아니면 가면인지는 모르겠지만 볼수록 저 깊은 곳에서 불쾌함이 거품처럼 일어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쥐새끼라니.”
“보고도 몰라요? 나를 반 죽여 놓으라고 시키지 않았습니까.”
“그야…….”
“어차피 나는 안 죽으니까? 그 얘기는 내가 실험실에서 하자고 하지 않았나.”
낙조는 켈리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말문을 턱턱 막히게 하면서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강하게 꽂아 넣는 한 마디에 켈리는 잡힌 손목을 뿌리치고서 화를 잠재우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막시안을 향해 있다는 것은 굳이 따라 쳐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 교육을 참 살뜰히도 시켰나 봅니다.”
“날 기분 나쁘게 만들어서 낙조 씨한테 좋을 게 있나요? 왜 이렇게 성격을 못 죽이지.”
“나도 이렇게까지 될 생각은 없었어.”
“…….”
“근데 나를 인간으로 안 보니까 하는 말이야. 나도 기분 나쁘거든.”
“이 미친 새끼……!”
“몰랐으면 알아두라고. 나도 기분 좆 같다고. 지금.”
낙조는 어절 하나하나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빈틈없이 맞붙는 목소리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낙조는 켈리의 주머니를 잠깐 바라봤다가 다시 켈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약속은 지키셔야지. 내 주변도 안 건들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나보다 남이 더 유리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주지 않아. 주도권을 갖고 있는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건 그냥 해본 말일 수 있잖아? 고낙조, 당신이 멍청했던 거지.”
켈리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살벌하게 눈을 뜨고서 긴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내뱉었다. 그렇다고 낙조에게 타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일개 걸어 다니는 ‘샘플 1’로 보는 시선엔 연우로 인해 이미 익숙했으니까. 애초에 자신의 인생은 타인에게 영향을 줄 만큼 굵거나 선명하지도 않았다. 남의 인생에선 몇 번이고 바래졌던 이름이, 세상이 뒤바뀌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불릴 줄도 몰랐다.
“누가 주도권을 쥐어.”
낙조가 싸늘하게 말했다.
웃는 가면을 벗겼지만 지금 보는 얼굴이 또 가면인지, 아니면 진짜 표정인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켈리의 모든 수를 읽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방어하지 못할,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은……, 켈리의 시선이 항상 따라 붙는 나에게 달려 있다. 사각지대도, 그녀를 직접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나’다.
“주도권은 나한테 있지. 당신은 죽는 몸이지만, 나는 아니니까.”
나는, 나를 철저하고도 교묘하게 이용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