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궤변 (1)
지하주차장에 차가 들어섰다. 남은 차량의 수를 세어 보니 아직 해화는 오지 않은 듯했다. 예상 복귀 시간 보다 한 시간은 빨리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홍해화한테 어디냐고 무전 쳐 봐.”
“아저씨.”
“왜.”
“……아니야.”
‘찝찝하게.’
지운은 막시안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웬만하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성격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반응이 의심스러웠지만 막시안과 도연의 앞이라 그런지 자신도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막시안의 정체를 알고 난 후엔 더욱.
“막시안.”
“……네?”
“홍해화도 알아?”
“내가 말했다고―”
“―너 켈리 용병인 거 아냐고.”
“…….”
막시안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낙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짧게 쉬었다.
“그걸 모르는데 켈리가 자기를 잡는다는 얘기는 믿었다고, 홍해화가?”
“해화도 예상하고 있었대요. 낙조를 아는데 자기를 모를 리 없다면서.”
‘홍해화 얘는 왜 생각을 하다 말아.’
상황이 극에 치달은 만큼 판단력이 흐려질 수는 있다. 아무리 막시안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건 맞지만, 며칠이나 봤다고 이 정도로 신뢰할 수 있을까. 낙조는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잠재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순찰조가 모두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다. 켈리가 주차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화를 자신이 데리고 있거나, 다른 곳으로 미리 빼돌려 놓으면 좋을 텐데. 지금 이렇게 순찰조를 기다리는 과정마저 막시안을 비롯한 켈리, 용병들의 계획이라면 어떡하지. 게다가 자신은 도연이 정말 변이 의심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지도 못했다. 낙조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김도연 씨,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
도연은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지운이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던 듯 눈을 굴렸지만 그 자리에서 다짜고짜 물어볼 순 없었다. 낙조는 도연을 데리고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상처 좀 보여 줄래요?”
“갑자기요?”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 그래야 나도 의심을 안 하죠.”
“…….”
도연이 불안한 눈으로 차가 주차된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 낙조는 그녀의 앞을 온전히 몸으로 가로막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심 받는 거 김도연 씨도 싫잖아요.”
“저를, 갑자기 왜 의심해요?”
“막시안이 켈리 용병인 거 알고 있었죠?”
“……막시안이 말했어요?”
“우리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우리한테 같이 도망치자고 해놓고.”
“그게 아니라요.”
“우리가 그럼 이제 뭘 믿고 당신들까지 챙겨야 합니까.”
낙조의 쉼 없는 물음에 도연은 잔뜩 몸을 굳혔다. 낙조가 자신에게 완전히 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자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원체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일방적으로 대화에 끌려가는 분위기가 오면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그걸 낙조가 알아줄 리 만무했다. 도연은 아랫입술이 다 뜯기도록 깨물다가, 손을 떨며 셔츠를 살짝 들춰 보였다. 허리엔 붕대가 둘러져 있었는데, 왼쪽 옆구리 쪽이 불그스름했다. 낙조는 핏자국인 걸 확인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변종한테 물렸어요?”
“변종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벌레한테 물린 걸 수도 있고, 가시에 긁힌 걸 수도 있고…….”
“다칠 때 몰랐다는 거네요.”
낙조의 예리한 대답에 도연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도연은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서 낙조를 응시했다.
“아직도 지혈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큰 상처인데, 다칠 때 몰랐다?”
“죽기살기로 도망치는데 아픈 걸 모를 수도, 있죠.”
“당신들이 우리한테 설명 안 해 준 게 있어요.”
도연이 물끄러미 낙조를 바라본 채 뒷말을 기다렸다. 낙조는 뒤로 차를 힐끔 쳐다보고선 목소리를 한층 더 낮게 깔았다.
“당신이 다친 날 상황. 뭘 봤고 뭐에 쫓겼는지. 말해요.”
*
무흠의 발언에 연우는 사색이 되었다. 마이크를 쥔 채 그대로 굳어 버린 연우를, 무흠은 무심하게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빈틈없이 겹쳤지만 어쩐지 서로를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연우는 마이크를 놓고서 무흠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위험하다며 주변을 지키던 경비들이 연우를 막았다.
“다시 가둬야 할 것 같습니다. 마취총이라도 쏴서……,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서연우 팀장님.”
“아니, 아니요, 일단 제가 대화 좀 해볼게요. 진짜 잠시만요.”
무력으로 다시 백무흠을 진압한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 자리까지 공들인 시간과 돈이 얼마인데. 연우는 조금씩 무너져가는 탑을 바라보기만 하는 심정으로 무흠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와 명예와도 긴밀하게 닿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망신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백무흠을 놓칠 순 없었다. 비록 그의 힘을 보여 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이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건 증명해야 했다.
“저랑은 대화가 통할 거예요. 저렇게 이유 없이 막무가내로 나오는 사람도 아니에요.”
“……팀장님, 저기, 뒤에서 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연우를 막고 있던 경비 한 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연우는 서늘해지는 기운에 주먹을 꽉 쥐고서 무흠에 고정해둔 시선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소장은 어느새 일어서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장님, 아직이에요. 잠깐만 대화할 시간을 주세요.”
“…….”
소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연우를 응시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져 갔다. 무흠은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근데 꼴 좋다. 백신도 못 만들어 내면서 뻔뻔하게 팀장 달고 다니는 거 눈꼴 시려웠는데.”
“말도 마요. 백무흠 잡혀 들어온 후부턴 우릴 얼마나 갈궜어.”
수호는 주변에 있던 연구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백무흠이 이곳에 와서 핍박과 같았던 모진 실험. 그 시간을 잊었다는 건 소문일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그가 수호 자신을 붙잡아 매섭게 쏘아볼 때부터 느꼈다. 백 마디 말을 나눠 보지 않아도 안다. 상대의 목소리에서 충분히 읽어 낼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정말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아닌지.
수호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무리에서 빠져 나왔다. 스크린 속에 담긴 백무흠은 꼿꼿하게 서서 서연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무흠이 서 있는 시간은 도대체 언제인가. 2021년 6월 이후로 그의 시간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서로 맞지 않는 톱니바퀴가 억지로 맞물려 굴러가듯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호는 뒤숭숭한 광장을 빠져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건물 내부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넓은 복도를 울리는 소리는 수호의 발소리뿐이었다.
‘백무흠이 마지막으로 당한 실험 이후……, 실험체들이 어땠는지 기록이 있었나?’
본부 몰래 무흠에 대한 자료들을 봤을 때를 떠올려 봐도 마지막 실험 당시의 기록이 어땠는지는 기억 나지 않았다. 수호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은 후 심호흡을 했다.
‘백무흠이 정말 그때의 기억을 잃긴 한 걸까?’
사실 의심 한 번이면 충분히 벗겨 볼 수 있었던 과거였다. 과거가 미세하게 비치는 시간을, 그저 적힌 기록에 의존하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게 문제였다. 수호의 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했던 그대로, 백무흠의 기록을 확인해 봐야 했다. 2021년 6월, 그곳에서 백무흠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남들과 같은 속도로 흐르긴 했을까.
아군인이 적인지 판단하기 위해선 먼저 선의를 베풀 필요가 있다. 다만 상대가 백무흠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백무흠은 편가르기를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놈이 아니다.
―확인중입니다.
master의 아이디로 네트워크에 접속 중이었다. 수호는 딴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도리질 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무흠이 저 밖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연우마저 그를 다시 발 아래 두지 못한다면, 무력을 쓰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절대 이길 수 없어.’
무흠을 살인병기 비슷하게 만든 게 연우다. 만든 사람마저 따르지 않는 이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죽기 직전까지 몸을 총알로 박아 놓는다고 해도, 무흠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사람 한 명을 더 죽일 수 있었다. 자신의 몸과 힘이 그렇게 뒤바뀌었다는 걸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복수다.’
이건 복수야. 백무흠은 복수하기 위해서. 여태껏 기다린 것이다.
수호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
“산에 들어갔다가……, 변종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도연은 눈물 맺힌 눈으로 낙조를 응시하며 어렵사리 입을 떼어 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그녀는 용케 울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힘을 빼면서, 도연은 뒷말을 차분하게 이어 갔다.
“그런데 막시안이랑 다른 사람들은 못 들었다고 했어요.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올라갈수록 소리가 더 크게 들려서……, 확인해 보겠다고 하고 소리가 난 쪽으로 갔어요.”
“혼자서?”
“아뇨, 다른 순찰조 사람 한 명이랑…….”
“변종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냥 피곤해서 헛소리를 들었나 보다, 하고 다시 돌아가려는데, 다시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뒤를 돌아보니까, 이파리가 다 시든 나무 한 그루가 보이더라구요.”
꽤 오래 산 나무 같았어요. 기둥이 되게 두꺼웠거든요. 그땐 날이 많이 춥지 않아서, 다른 나무들은 이제 막 낙엽이 지기 시작했었는데, 그 나무만 이파리가 몇 개 안 남았었어요. 그냥 지나치면 되는 건데……, 이상하게 가까이 가 보고 싶었어요. 뭔가에 홀린 것처럼요. 아는 사람이 날 부르는 느낌이어서, 다가갔는데, 나무껍질이 거의 다 벗겨져 있었어요. 사람이 깎은 건 아닌 것 같았고, 벌레, 벌레가 갉아먹은 것처럼……. 그러고 보니 유난히 나무가 하얀 색이었어요. 처음에 봤을 때 왜 그걸 몰랐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나무가 소리를 질렀어요.
“변종의 울음소리요. 나무가 소리를 질렀어요.”
“나무에게서, 소리를 들어요?”
“분명히. 나무한테서 나온 소리였어요.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놀라서 도망치려고 뛰는데, 뿌린지 뭔지……, 아무튼 뭔가에 걸려서 굴렀어요. 이 상처도 구르다가 벌어진 걸 거예요. 복귀하고 알았어요. 옷에 피가 번져 있어서.”
“지금까지 켈리한텐 들키지 않았고요?”
“그날 변종의 샘플을 채집하지도 않았으니까……. 모아 두었던 붕대를 수시로 갈아주는 것밖에 답이 없었어요. 켈리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다시 그 나무가 있는 산으로 데리고 갈지도 모르잖아요.”
도연은 악이 오른 시선으로 낙조를 쏘아보았다. 낙조는 그제야 연결되는 그림들에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잔인한 말이겠지만, 일단 들어요. 우리는 그 나무가 있는 산으로 다시 가야 해요.”
“왜, 왜요?”
“알아내야 하니까. 바이러스가 식물에 퍼진 건지, 아니면……, 나무가 변종을 잡아먹은 건지. 알아야 다음에 만났을 때 피할 수 있어요.”
“…….”
“몰라야 편하게 산다는 말은 이제 머저리나 하는 말이고, 이젠 모르면 죽어야 해요.”
낙조는 칼날 같이 예리한 말을 도연에게 뱉어 냈다. 그녀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일지 생각해 보진 않았다. 말과 그 말에 따라오는 무게들을 말하기 전에 미리 재보는 시간이 아까웠다. 낙조는 아주 조금이었지만 도연에게서 의심을 거두었다. 자신에게 말한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라 하면, 그저 그녀는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변이한 기생선충까지 발견한 마당이었기에 도연의 말을 믿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켈리가 내려오면, 막시안이 날 쏘는 걸 봤다고 해요.”
“…….”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이후였던 것 같았고, 내가 반항을 해서 총알이 빗겨 나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라고요?”
“막시안이랑은 다르게 말귀가 밝아서 좋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막시안과 지운은 이미 차에서 내려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낙조는 조용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지난밤에 이어, 두 번째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