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변심은 소리 없이 전염된다
차의 앞부분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곧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보넷 틈에선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왔다. 구르듯이 아스팔트 도로 위로 떨어진 낙조와 막시안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반대로 차를 몰았다지만 이 고요한 동네에서 사고가 났을 당시의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낙조는 먼저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막시안의 입을 막은 채 좁은 거리로 몸을 숨겼다.
“읍! 읍.”
“조용히 있어.”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자신을 끌고 왔는지, 자신을 공격할 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을 꺼냈는지……, 벽에 몰아붙인 채 캐묻고 싶은 건 많았다. 낙조는 계속 팔딱거리는 막시안을 힘으로 제압하여 햇빛이 들지 않는 골목의 끝까지 끌고 갔다.
“콜록, 아, 콜록.”
“너 뭐야. 계산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 데리고 온 거지.”
“낙조. 일단 진정, 진정하고.”
“시간 없다. 김도연이 아픈 건 사실이야? 아니면 동정심으로 우리 애들 맘이라도 먼저 사려고 했어?”
“낙조! 내가, 내가 왜 이런 곳에 당신을 데려왔겠어요.”
막시안은 숨을 허겁지겁 풀어내며 겨우 말을 뱉었다. 태양이 한창 도로를 달구는 시간. 어쩌면 순찰조의 바퀴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고도 없이 대열을 이탈하고 이유 없는 교통 사고를 냈다는 건 모두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사고 난 차엔 오늘 무작정 순찰조에 합류하겠다고 한 자신이 있다. 자신이 막시안을 운전 중에 공격했다고 몰아가기에 딱 좋은 구실이었다.
“너. 켈리 용병이지.”
낙조가 막시안의 멱살을 잡아끈 채 낮게 중얼거렸다. 막시안은 가까이 붙은 얼굴에 눈을 빠르게 깜박이다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안 그러면 그렇게 잘 알 리가 없으니까.”
“……나도 낙조한테 할 얘기 있어요. 해화한테도 안 한 얘기.”
“변명에 홍해화 이름 갖다 붙이지 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막시안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낙조의 손목을 붙잡고 악을 썼다. 낙조보다 키는 컸지만 낙조의 힘은 감당할 수 없었다. 멱살이 잡힌 채 온몸을 비틀던 막시안은 결국 ‘제발’이라고 빌며 젖은 한숨을 터뜨렸다.
“켈리가, 나한테 시킨 게 있어요. 어젯밤에.”
‘잘 생각해, 고낙조. 똑똑하게 결정해야 해.’
낙조는 막시안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 묵묵히 막시안의 말을 들었다. 막시안은 벽에 완전히 눌린 채로 힘겹게 한 마디씩 내뱉었다.
“낙조를 실수인 척 총으로 쏘거나, 죽기 직전으로 만들어 오라고. 어떻게든, 해도 좋으니까…….”
“어젯밤에?”
“네. 진심으로 쏴도 상관없다고 말했어요. 어차피, 어차피 이제 낙조는 안 죽는다면서…….”
“또.”
“네?”
“또 말한 거 없냐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라. 그게 끝이에요.”
낙조는 잠시 시선을 옆으로 두었다가 다시 막시안을 응시했다. 막시안에게선 자신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긴장을 푸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낙조는 우선 막시안의 멱살을 놓아주고서 잠시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인 용병이었어. 일부러? 처음부터 이렇게……, 감시자를 심어 둔 건가.’
켈리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막시안의 이실직고가 사실이라면 어찌 됐든 그녀가 자신을 순순히 밖에 내보낸 것도 이해가 된다.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낙조, 도연이 얘기랑 도망치겠다는 말은 진짜예요.”
생각에 빠진 낙조의 옷소매를 붙잡고 막시안이 말했다. 그는 애처롭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켈리는……, 날 키운 사람이에요. 엄마가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줬던 기억이 있어요. 아주 어렸을 때. 아빠는 한국인이었는데, 만난 기억이 없어요.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냥 켈리가 시키는 건 다 해야 한다고 했어요. 처음엔 재미있는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산에 가서 사진과 똑같이 생긴 꽃을 꺾어 오기, 비 오는 날에 물웅덩이에서 흙탕물을 퍼 오기……. 켈리에게 숙제를 내면 그때마다 갖고 싶은 것을 선물로 받았어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켈리가 하는 일도 직접 보게 됐죠.”
“지금 네 감성팔이 얘기 들어주려고 내가 지금 여기로 끌고 온 줄 알아?”
“안 들으면 내 말 안 믿잖아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지금 적으로밖에 안 보여.”
“켈리한테서 벗어나려면 켈리를 알아야 해요. 그곳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예요.”
막시안은 숨을 흩뜨리며 말했다. 겉으로 늘어놓고서 보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을 알아야 꿰뚫을 수 있는 법. 켈리를 오랫동안 봐 왔다면 낙조 자신이 알아낸 약점 말고도 감춰 둔 약점을 알고 있을 테다. 아예 막시안을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나란히 되돌아갈 생각도 없었기에 낙조는 잠시 숨을 다스리며 고민했다.
“아픈 사람을 직접 켈리에게 데려갔던 날, 처음으로 도망쳤어요. 그녀가 너무 무섭고, 다음엔 사람을 죽이라고 할 게 빤하니까……. 세 시간도 안 돼서 잡혔어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도망쳤는지 몰라요. 내가 여기에 아직 있는 건, 다 결국 잡혔다는 증거고…….”
“그런데 켈리는 왜 널 아직도 살려 뒀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겨난 궁금증은 가장 원초적이었다. 자애로워 보이지만 절대 자비롭지 않은 그녀가 자신에게서 몇 번이고 도망치려 했던 아이를 왜 계속 살려 두었는가. 거기에 가장 신뢰한다는 증거를 왜 심어 두었는지, 낙조는 궁금해졌다.
“나는 본보기예요. 아무리 도망쳐 봤자 너희들은 잡혀올 것이고, 자신이 죽으라고 할 때까지 죽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살려 둔 거죠. 날 보면서, 도망칠 희망을 없애 버리는 거예요.”
“그럼 거기 사람들은 켈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야? 알면서도 남아 있는 거고?”
“도연이 어머니처럼, 그냥 수긍한 분들도 계세요. 안전하니까, 살 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맞물려 돌아간다고 해도 완벽하게 믿을 순 없었다. 단 말 몇 마디로 의심을 거두기엔 아직 알지 못한 켈리의 모습들이 많았다. 막시안이 얼마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지가 먼저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건 막시안뿐이었고, 붙는다고 해도 질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내가 널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 빨리 대 봐.”
“…….”
“곧 네가 아는 얼굴들이 몰려 오겠지. 켈리의 명령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마 내가 아니라 널 감시하라고 했을 수도 있고. 내가 널 믿으면, 작전대로 하는 거야.”
“작전이요?”
“켈리의 지시를 따라야지. 날 쏴.”
“낙조!”
“이름 진짜 징그럽게도 부르네. 빨리 말해. 아니면 내가 너 치고 간다.”
낙조는 그가 단번에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길 바라야 했다. 더 이상 대화에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막시안이 지금까지 조금도 거짓말을 섞지 않았다면, 낙조 자신에겐 득이 되는 정보만 얻은 게 된다.
‘총알 하나 맞는 거 뭐 어렵다고.’
겪어 본 고통 중에서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건 촉각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온몸이 조여드는 질식의 과정은 생각하기도 싫고. 낙조는 어느 정도 경계를 푼 눈으로 막시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늘 돌아가면, 해화를 잡을 거예요.”
낙조의 왼쪽 눈썹이 삐끗 움직였다. 막시안은 어느 정도 잠잠해진 호흡을 유지하려 애쓰며 황급히 덧붙여 말했다.
“해화에게 내가 미리 말했어요. 그러니까 낙조랑 나 뒤에 따라오라고.”
“너랑 내 뒤? 우리가 맨 끝이잖아.”
“……한 대 정도 빠졌다고 그게 티가 날까 봐요? 무전기만 잘 치면 되는데.”
“……야, 소리 들리지? 빨리 쏴.”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낙조는 ‘해화’라는 이름에 일단 막시안이 메고 있는 총을 당겼다. 총구를 바짝 자신의 왼팔에 갖다 대곤 막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막시안은 금세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교통사고로 이미 충분해요. 지금도 많이 다쳤는데―”
“―확실히 해야지. 똑똑한 사람을 이기려면 빈틈이 없어야 해. 혹시 알아? 켈리는 이미 너가 우리랑 내통했다고 생각할지.”
낙조의 거침없는 말에 막시안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켈리라는 이름에 잠식된 사람처럼 몸을 굳히더니, 이내 덜덜 떠는 손을 방아쇠에 가져갔다. 곧 골목 어귀에 멈추는 차 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어서 방아쇠를 당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물러나니 막시안은 마침내 결심한 눈을 빛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탕!
타다닥, 타닥.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막시안은 허망하게 총을 쥔 손을 떨어뜨렸다. 차에서 내린 이들이 총소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날숨에는 울음이 조금 곁들려 있었다. 막시안은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서 반대쪽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을 붙잡고 있는 낙조를 부축했다.
“낙조!”
“조, 조용히 좀 해, 진짜, 빨리 총, 들고…….”
낙조는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막시안을 밀쳐냈다. 이곳을 뒤따라 온 이들이 해화나 지운이 아니라면, 그저 켈리가 막시안의 충성도를 확인하기 위해 보낸 또 다른 용병들이라면, 이 광경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애써 쏘아 놓고 무슨 동정심이 든 거냐며 막시안을 몰아붙일지도 모른다. 정말 최악에 다다른다면, 탈출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칠 수도 있었다.
막시안은 영어로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쥐었다. 낙조는 숨을 빠르게 몰아쉬면서 막시안이 먼저 골목을 나서도록 그의 등을 밀었다. 막시안은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은 후 낙조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면서 조심스럽게 골목 끝으로 다가섰다.
“어……, 막시안?”
“…….”
“언니가 막시안 차를 놓쳤대서, 우리 보고 대신 찾아 달라고 하길래…….”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 막시안의 앞에 나타난 건 도연이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들었던 총소리를 떠올렸다가 막시안이 쥐고 있는 총을 한 번 흘낏거렸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도연의 시선이 막시안의 팔 옆으로 비스듬히 비켜서 흐트러진 낙조의 꼴을 본 건.
“고낙조.”
도연이 멍하니 낙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막시안은 차마 도연을 쳐다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도연, 찾았어? 어……, 막시―”
‘아, 저 새끼 진짜 존나 답답하게 구네.’
“―아저씨!”
낙조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막시안의 등을 응시하다가 주변 골목을 발칵 뒤집어놓을 것처럼 소리치며 등장하는 지운의 모습에 몸을 날렸다.
‘홍지운부터 설득시켜야 해.’
지혈은 되지 않았지만 지운의 입을 막는 게 우선이었다. 낙조는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지운의 입을 손으로 막고서 도연과 지운, 둘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흰 목격자야. 막시안이 날 쏘는 걸 봤다고 해.”
“읍, 읍읍!”
“그래야 막시안이 산다. 나도 살고.”
낙조의 말에 품에서 몸부림치던 지운의 움직임이 멈칫거렸다. 무슨 말이냐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곁에서 느껴졌다. 낙조는 애써 지운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지운을 슬며시 품에서 밀어냈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우리 차는 박살 났으니까 너희 차로. 그리고 막시안 너.”
“…….”
“동태 눈깔 좀 어떻게 해라. 안 보여? 나 안 죽은 거.”
‘저런 애새끼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동안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낙조는 다치지 않은 팔로 막시안을 붙잡고 질질 차까지 끌고 갔다. 막시안은 아무 말도, 반항도 하지 않고 낙조를 따라왔다. 뒤로 지운과 도연이 조용히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운전석 문까지 열어 줘야 해?”
낙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막시안이 고개를 젓고서 스스로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낙조는 차창 너머로 막시안의 옆얼굴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짧게 내쉬곤 조수석에 올랐다. 도연과 지운이 뒤에 오르고, 막시안은 총을 뒤에 던져 둔 채 시동을 걸었다. 떨리던 손은 조금 안정됐는지 금세 핸들을 부드럽게 돌렸다.
“안 아파요?”
막시안이 총을 쏘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낙조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막시안을 힐끗 바라봤다가 눈을 감으면서 대답했다.
“나 좀 잔다. 별거 아닌 걸로 깨우면 뒤져 진짜.”
막시안은 낙조의 말대로 입을 닫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총알이 스쳐 지나갔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변명이 필요해.’
낙조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다친 팔을 꽉 쥐었다. 가까운 곳에서 맞았던 터라 상처가 크게 난 것뿐이지, 막시안은 자신의 팔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이 사실이 켈리에게 전해지는 순간, 막시안을 보호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햇빛이 감은 눈꺼풀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