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엇갈림
일찍이 눈이 떠졌다. 새벽녘인지 방안은 캄캄했다. 낙조는 상체를 일으키고서 이마를 짚었다. 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하루가 왔다. 시간은 결국 흐르고, 약속에 물린 책임은 져야 한다. 아직 잠들어 있는 지운을 힐끗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은 그나마 전보다 좋아 보였다.
‘아침 식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바람이나 쐴까.’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슬리퍼를 꿰어 신고 자켓을 걸쳤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은 낙조는 곧 곁에 선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예요. 기다린 사람처럼.”
“기다린 거 맞아.”
밤이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 전혀 오지 않아서 뒤척대다가 자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나왔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시계를 안 봐서 모르겠다.”
그녀는 낙조의 눈을 철저히 피하고 있었다. 죄책감에 떠밀려 온 사람처럼, 낯빛이 좋지 않았다. 낙조는 어렴풋이 밤이의 심정을 파악했다. 붕어섬에서 자신을 관찰하던 때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 낙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자신이 직접 밤이에게 피를 내어주었지만, 지금은 감시하는 또다른 눈이 생겨났다. 그 눈을 피해서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연구해야 할지 고민일 게 빤했다.
“계단으로 가요.”
낙조는 앞장 서서 말했다. 곧 밤이가 신발을 끌고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턱에 서서 창문을 열고 창가에 기댔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나는 오늘 켈리한테 말해서, 순찰조랑 같이 나갈 거예요.”
“뭐?”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그제야 들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밤이는 어쩔 셈이냐는 듯 무언으로 묻고 있었다. 낙조는 창가에 턱을 괴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피를 뽑아서 연구할 거 아니에요?”
“…….”
“피를 바꿔치기 해요. 붕어섬에서 뽑았던 피를 그쪽 연구원한테 주고, 어제 뽑은 피는 누나가 가지는 거죠.”
“말이 쉽지, 켈리 눈앞에서 사기를 치자고? 피를 뽑는 걸 직접 보려고 할 거야.”
“내가 시간을 벌게요. 순찰조와 밖에 다녀와서, 밤이 되면, 실험에 참여하겠다고.”
“그게 네 말대로 술술 풀릴 것 같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이제 알잖아!”
“켈리는 변한 내 모습이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일 거예요. 사업가가 새로운 개발에 성공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겠어요?”
낙조는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밤이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떠냈다. 하지만 숨을 아무리 다스려 봐도 머릿속은 같은 대답만 내놓았다. ‘고낙조의 계획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 적당한 모험은 종종 기대했던 것보다 큰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덫이 사방에 깔린 곳에서 어떤 덫이 고장 났는지 판단하는 건 도박이었다.
“뭘 보여 주려고.”
밤이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도대체 뭘 보여 주려고, 어제부터 무슨 생각을 했길래…….”
말이 다 이어지지 않았다. 주워 담기엔 이미 다 늦어 버렸다. 분명 자신의 말인데도 불구하고, 끼워 맞출 수 없었다. 밤이는 고개를 숙이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저 내뱉는 날숨마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죠.”
“……뭐?”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알려 줄 거예요.”
낙조에겐 분명 스스로가 짠 계획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단호하게 나올 수 없었다. 검은 눈동자가 새벽 빛 아래에서도 반짝거렸다. 두려움 따위는 모른다는 듯, 맑은 두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
“나한테도 안 알려 주는 거야?”
“계획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요. 성공하면, 누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죠.”
밤이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낙조는 붕어섬에 있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떠맡기듯 자신의 몸에 깃든 힘에 대해서도, 위기를 극복해내려는 의지와 태도까지. 처음 봤을 땐 그냥 그 나이대의 남자애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밤이 자신에게 매달려 힘을 쓰는 방법을 알려 달라 말하던 그 눈빛마저 아직 새록새록한데.
‘사람은 목숨이 경각에 달릴수록 기지를 발휘하니까.’
밤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곧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낙조는 자연스럽게 밤이에게 인사한 후 조용히 계단을 빠져나갔다.
*
백무흠 공개 훈련 시작 두 시간 전.
수호는 얼굴을 가린 채 복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본부엔 워낙 많은 건물이 있는 데다가 백무흠이 대기하고 있다는 건물은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혹여 백무흠과 관련된 사람을 만날까 봐 얼굴을 가려가며 방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조금 열린 문틈 새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바로 옆방으로 들어가 문을 살짝 열어 놓고 귀를 갖다 댔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미 정도는 보여 주는 게 쇼의 재미 아닌가요.”
“연우 씨가 저한테 쏟은 시간과 공이 있는데, 실수 같은 걸 보이면 안 됩니다.”
무흠과 연우의 대화였다. 수호는 불이 꺼진 방에서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차피 소장님도 다 아세요. 무흠 씨가 지금 얼마나 강한지. 고낙조……, 이제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는 상황도 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연우 씨는……, 왜 고낙조가 필요합니까?”
잠시 정적이 일었다. 수호도 한 번은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서연우 그녀가 왜 그렇게 고낙조에게 집착하는지. 간단히 생각하자면 고낙조도 그저 일과 변종에서 변이한 또 다른 변종에 불과하다. 게다가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선 고낙조보다 홍해화의 DNA가 더욱 필요한 상황인 것은 누구보다도 연우가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럼에도 연우가 고낙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과연 정당한지, 알고 싶었다.
“다들 그러죠.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지, 고낙조 같은 사람은 어딘가에 또 있을 거라고.”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변이는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생겨나니까 말입니다.”
“이 재난을 일으킨 원인이 뭔지 알아요?”
이번엔 연우가 무흠에게 물었다. 무흠은 생각에 빠진 듯 대답이 없었다. 수호는 조금 더 문에 달라붙어 그들의 대화를 숨어 들었다.
“인간이 스스로 공기를 생성시켜 호흡할 수 있게 하는 것.”
“…….”
“그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재난이 이어진 거예요. 저기 밖에 있는 변종들은 실패작들이죠.”
“……고낙조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봤어요. 독가스를 살포했는데 멀쩡히 숨을 쉬는 걸, 내가 봤단 말이에요. 고낙조를 잡으면……, 아마 갖은 실험을 다 해보겠죠. 정말 그 어떤 상황에서든 숨을 쉴 수 있는지.”
“성공했다는 걸, 연우 씨는 자신하십니까?”
“고낙조가 살아 있으니까요. 그 사람만 살아 있으면, 나는 뭐든 다 보여 줄 수 있어요.”
연우는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흠의 목소리는 마치 기계 같았다. 그저 컴퓨터에 입력해 찍어낸 것만 같은 발음에, 수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 거의 다 됐어요. 내가 다시 데리러 올 때까지 여기 있어요.”
“예.”
곧 연우는 잠시 자리를 비우는지 대화를 끊었다. 그녀가 옆방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는 문틈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멀어져 가는 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기어서 복도로 나왔다. 무흠이 있는 방의 문은 열려 있었다.
‘어차피 다시 올 거라 일부러 안 닫았나.’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을 바라보며 수호가 생각했다. 막상 저 둘의 대화를 듣고 나니, 자신이 의심했던 부분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없어졌다. 무흠은 완전히 기억을 잊은 듯 보였고 연우에게도 상상 이상으로 다정했다. 그저 소문으로 들었던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흠에게 매달려 물어보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백무흠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수호는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어차피 공개 훈련은 곧 시작될 테고, 고낙조가 있는 곳으로 곧 백무흠이 보내질 것이다. 백무흠은 정말 고낙조를 반쯤 죽여서 데려올 수도 있다. 서연우를 위해서.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로.
‘왜 서연우가 구해 줬다고 생각하는 거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서연우가 백무흠에게 얼마나 모진 짓을 했는지 자신은 안다. 백무흠이 붕어섬에서 당했던 실험이 얼마나 독했는지는 몰라도, 그보다 덜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무흠이 다시 중사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때도 백무흠은 지금처럼 웃을 줄 알았을까.
‘그럼 왜 붕어섬에 다시 갔지?’
딱 풀리지 않는 문제 하나가 있었다. 수호는 눈을 가만히 감고 이마를 짚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앞으로 큰 그림자 하나가 기울어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수호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온몸에 힘을 빼고 있던 수호는 소리도 채 내지 못하고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
“그때 당신이군.”
연우와 대화할 때와는 달리 아주 차게 식은 목소리가 수호를 짓눌렀다. 수호의 손목을 쥔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잡은 탓에 손이 얼얼했다. 수호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목을 열었다.
“소, 소, 손, 손 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흠이 수호를 놓아주었다. 그리곤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백열등 전구 하나가 겨우 방안을 휘젓고 있었다.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었다. 백무흠은 문을 잠그지 않았고, 자신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무흠의 눈. 그 눈빛은 자신이 처음 그를 몰래 보러 갔을 때 마주쳤던 눈과 같았다.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범과 같은 눈. 어두운 숲속을 훤히 꿰뚫을 것 같은 눈빛.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지?”
무흠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도 바깥의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수호는 붙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침을 삼켰다.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위압감은 그의 조각일 뿐이었다. 완전히 회복한 그의 앞에 서니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호는 숨을 길게 내쉬고서 겨우 입을 떼어 냈다.
“서연우 팀장, 님이, 백무흠 씨는, 소장님도, 다 알만큼, 강, 강하다고…….”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이야.”
“저, 저요?”
“빨리. 시간 없어.”
“……그게.”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당신과 고낙조가 붕어섬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서연우가 알아채게 한 장본인이라고 말하면……. 당신이 이렇게 되는 걸 그저 방관하며 시간을 보냈었다고. 당신이 5년 전 붕어섬에서 당한 일들도 알아내서, 그러다 그저 호기심에 그때 당신을 보러 갔던 것뿐이라고. 수호가 지닌 사실들은 무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어디서 뭘 하길래 자꾸 쥐새끼처럼 숨어서 날 보나?”
무흠이 한 번 더 수호를 재촉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수호를 내려다보았다. 수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장 기초적인 사실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정, 정보실, 금수호……, 라고 합니다.”
“정보실?”
무흠의 말끝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수호는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휘둘릴 필요 없어. 내가 저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
수호는 머릿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걸 듯이 한 마디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무흠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여전히 수평으로 두기엔 두려울 만큼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버텨 내야 했다.
“백무흠 중사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무흠의 왼쪽 눈썹이 비뚤어졌다. 그에겐 반갑지 않은 소리일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남자애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상황 자체도.
“이거,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
“고낙조. 잡으실 겁니까?”
수호와 무흠의 시선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고낙조’라는 이름에 무흠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사라졌다. 수호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무흠이 대답할 때까지 꿋꿋하게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너…….”
이윽고 무흠이 입을 떼어냈다. 그는 수호의 어깨를 잡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알고 있는 게 뭐든, 닥치고 얌전히 네 일이나 해.”
“…….”
“나 감시하는 거. 그게 네 일이잖아.”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무흠은 말을 끝내고서 문을 열고 수호를 복도로 밀어 내보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았다. 어두운 복도에 수호 홀로 서서,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