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내부자 (3)
자신의 덩치로 뒤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가렸다. 낙조는 밤이가 쥐고 있던 주사기를 자신의 팔에 꽂아 피를 빼냈다. 아주 은밀하고 조용히. 곧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밤이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어 냈다. 낙조는 꽤 무덤덤하게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고선 숨을 다스렸다. 완전히 젖었던 목소리를 조금 다듬자, 시야가 조금이나마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를 너무 얕봤어.”
처음으로 보는 켈리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낙조는 그녀를 비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곤 손을 뒤로 하여 밤이에게 자신의 피를 뽑은 주사기를 쥐어 주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서로를 포기한 적이 없고.”
“…….”
“나는 죽기 직전까지 여러 번 발버둥 쳐 본 놈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뒤에서 밤이가 낙조의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낙조는 똑똑히 켈리를 향해 단단한 시선을 던졌다. 켈리는 주먹을 꽉 쥐고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실험실 안의 연구원들과 용병들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지만, 우리 뒷조사라도 해보지 그랬어. 어쨌든 당신 연극은 잘 봤어.”
“청주에서 군사들이 다음 주에 와.”
“오라 그래. 그 놈들은 날 잡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낙조는 조금 전까지 떨던 몸을 단단히 굳힌 채 말했다. 켈리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조금의 부끄러움이라거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말없이 낙조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몸은 변했어. 전보다 더 변했지. 알고 싶지 않아?”
“……말 같지 않은 소리 할 거면 닥쳐.”
“너에게 뭘 먹였고, 어떻게 변한 건지 알려 줄게. 네 동료들도 건들지 않고.”
켈리로서는 꽤 무게가 있는 제안이었다. 낙조는 그녀가 내민 뒤집어진 카드를 쥘지, 아니면 다시 그녀에게로 보낼지 선택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낙조의 시선이 잠깐 밤이에게로 돌아갔다. 밤이는 말없이 낙조의 소매만 꽉 쥐고 있었다.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들먹였다가 낙조가 흔들릴까 걱정됐다.
“그럼 밤이 누나가 날 연구하게 해.”
“……그건…….”
“아니면 떠날 거야. 힘을 써서라도.”
낙조는 카드를 뒤집지 않은 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뒤집을 일이 생긴다면, 그건 켈리의 의도가 정말 분명히 드러난 후일 때다. 지금은 자신의 제안이 더 중요했다. 자신을 바로 곁에서 지켜 줄 눈이 필요했고 모든 일행이 안전해야 했다. 켈리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
“…….”
“대신 우리 쪽 사람도 한 명 붙일 거야. 이곳은 내 공간이니까.”
“유치하네……. 말장난 그만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는 걸로 얘기 끝내.”
낙조는 말을 마치고 그대로 밤이를 데리고 실험실에서 나왔다. 코끝을 타고 올라온 약품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계단의 중간에 서서 밤이의 손을 놓아주었다. 밤이는 머뭇거리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괜찮겠어?”
“뭐가요?”
“여기서…….”
“누나가 나를 제일 잘 알잖아요. 여기 사람 중에 누나 따라올 수 있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걸요.”
“너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밤이는 조금 속이 상한 얼굴로 낙조에게 쏘아붙였다. 낙조는 은은하게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고 밤이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확실히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이, 자신과 함께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니 미안함이 맴돌았다. 낙조는 밤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고개를 살짝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누나가 날 구해 준 횟수를 따지자면 할 말이 없어요.”
“…….”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요.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밤이는 말없이 낙조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물을 꾹 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낙조는 밤이의 몸 너머로 복도 중앙에서 자신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켈리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리곤 보란 듯이 손을 들어 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계획이 뒤틀렸으니 막시안과 도연에게도 일을 알려야 했다. 직접적으로 만나는 건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지운이나 해화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켈리는 지운과 함께 쓰는 방에서 짐을 빼 실험실로 옮기라고 말했다. 낙조는 그 말에 다른 이들에게서 소문이 나는 건 싫다고 단호히 말했다. 낙조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켈리가 당장 눈앞의 이득을 위해 조금 성급히 구는 면을, 낙조는 잘 이용했다.
지운이 방으로 돌아온 후 낙조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오늘은 변종을 보았느냐고 물었고,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지운은 이제 도연과 어느 정도 합이 맞는다며 함께 변종의 샘플을 채취한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낙조는 언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게 좋을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아저씨?”
“어.”
“볼에 뭐 긁혔네.”
지운이 문득 낙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낙조는 지운의 시선이 닿은 곳을 매만져보았다. 그의 말대로 살짝 파인 상처가 손끝으로 느껴졌다. 아마 용병들에게 끌려갈 때 긁힌 모양이었다. 낙조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아직 배정 받은 일 없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지운이 먼저 물꼬를 틀었다. 낙조는 창문을 조금 열고 바깥 바람을 들이마셨다. 뒤를 돌아 방문이 꽉 닫혔는지 확인한 후 지운을 침대에 앉혔다.
“뭔데 이렇게 무게를 잡아.”
“홍지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리고 홍해화한테 그대로 전해.”
“뭔데 그래.”
“막시안이랑 김도연……, 걔네한테는, 일단 얘기하지 마.”
“아저씨?”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운에게, 낙조는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생각했다. 일단 자신이 생각하는 동료는 밤이와 해화, 그리고 지운이었다. 막시안과 도연은 아직 이곳 사람이라는 점이 맘에 걸렸다. 낙조는 지운의 곁에 앉아, 자신의 식사를 담당하던 사람 얘기부터 시작했다.
켈리와 결정 지은 합의 얘기까지 모두 끝냈을 때, 지운은 말없이 두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다음 주면 청주에서 군사가 온다. 그 전에 알아낼 건 알아내고 떠나야 해.”
“도연이……, 도연이도 데리고 갈 거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지운이 힘겹게 물었다. 낙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사이에 얼마나 정이 쌓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답을 줄 수 없었다. 자신이 지켜 내야 하는 사람들 중에 아직 그들은 없었다.
“아저씨, 도연이 아파. 도연이 여기에 두면 안 돼.”
지운이 낙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부탁하는 어조와 목소리는 이미 애절함으로 흐려져 있었다. 낙조는 묵묵히 지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순찰조에 나도 나갈 거야.”
“아저씨가 어떻게?”
“그건 기밀이야. 아무튼 내일은……, 막시안이란 놈을 좀 봐야겠어.”
그러니까 빨리 자라. 낙조는 지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선 말했다. 지운이 아저씨, 하고 몇 번 더 낙조를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불도 끄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머리 끝까지 덮었다. 지운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지 꽤 오랫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기척을 느낀 건 낙조가 다시 몸을 일으킬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김도연이란 애는 홍해화한테 부탁해 봐야지.’
낙조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눈을 꼭 감았다. 무거운 짐을 가득 떠맡은 사람처럼 마음도 무거웠다.
*
수호의 사무실 위치가 바뀌었다. 무흠의 훈련이 완벽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건물 내부의 상황도 뒤바뀌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무흠에 대해 얘기했다. 시스템 실은 정보실이란 이름의 팻말을 사용하게 됐다. 조금 좁아지긴 했으나 갑작스럽게 준비되어 휑했던 전의 방보다 나았다. 무흠의 훈련이 급해지면서, 연우가 수호를 찾아오는 날도 훨씬 줄었다. 수호는 그 점이 가장 맘에 들었다.
“수호 씨! 수호 씨도 오늘 올 거지?”
“어딜요?”
“내가 말해 줬잖아. 오늘 공개적으로 백무흠 훈련한다니까!”
“아…….”
수호에게 아이스 커피를 건네주며 연구원이 웃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백무흠을 담당한 건 오직 팀장인 연우뿐이었다면서, 모두가 참관하는 자리에서 훈련을 공개하는 의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수호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처음 봤던, 그 범과 같은 눈매만 생각날 뿐이었다.
“와야 해! 수호 씨한테도 아마 새 일이 주어질걸?”
“저한테요?”
“전주 대피소에서 다른 연구 센터로 고낙조랑 홍해화가 옮겨 갔잖아. 그거 좀 무리하지 않고 빼오려고 하시는 것 같던데……, 거기 정보를 아마 빼내려고 하지 않을까? 연구량만 따지자면 거기가 압승이라던데.”
“아, 거기…….”
이미 수호는 ‘악어와 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낙조와 해화에게 이 정도로 후폭풍이 닥칠지는 몰랐다. 그저 ‘개인사업자’가 운영하는 센터라고 했기 때문에 희망을 걸어 본 것뿐이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업체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악어와 새’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지금까지 청주 본부와 무슨 관계로 지냈는지는 낙조와 해화가 그곳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
전주 대피소 모든 근처의 CCTV를 연결하여 홍해화와 홍지운을 찾아냈을 땐, 안도감이 들었다. ‘살아 있구나. 아직 잡히지 않았구나.’ 그 생각을 하면서 급하게 또 키보드를 두드렸다. 근처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곳이 없는지 찾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악어와 새’였고, 그들의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로 통신을 연결해 ‘악어와 새’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식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물었으나 당연히 얘기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큰 덫에 몰아 넣은 거야.’
‘악어와 새’를 운영하는 자가 본부의 총책임자와 아는 사이였고, 고낙조와 홍해화를 단지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걸 알았다면 당연히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호는 말없이 생각에 빠져 있다가 커피가 든 컵을 꽉 쥐었다.
“수호 씨?”
“아, 네.”
“요즘 무슨 걱정 있어?”
연구원이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수호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녀의 수다를 들어줄 힘은 없었다. 해결할 일이 남았다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내가 왜 그랬을까.’
수호는 수없이 자신에게 물어봤다. 그 상황에서 왜 홍해화와 홍지운을, 그리고 고낙조를 구하려고 했나.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들을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들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도중에 발걸음이 멈췄다. 수호는 코앞에 사무실을 두고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동안 모니터에 코를 박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내적 친밀감이 생기기라도 했나. 그렇다고 하기에, 이곳에선 그들을 엄청난 적으로 몰고 있다. 고낙조는 적의 수장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의 목이라도 딸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하려고 난리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은 왜 고낙조가 순순히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막았는가.
「내가 말해 줬잖아. 오늘 공개적으로 백무흠 훈련한다니까!」
순간 수호의 머릿속에 연구원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컵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갈 뻔한 것을, 겨우 붙잡았다. 수호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어쩌면…….’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고낙조와 가까이 닿았던 일행을 직접 봤다는 사실이, 그 일행이 바로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몰두했던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이 흔들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백무흠을 처음 봤을 때 자신은 두려움과 공포를 가장 먼저 느꼈다. 안쓰럽다거나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더 알고 싶었을 뿐이야.’
백무흠에 대해서. 저 사람이 왜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런 수모를 겪고도 왜 다시 붕어섬에 갔는지, 그는 어째서 고낙조와 함께했고, 고낙조를 도망치게 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사무실로 향하던 수호의 발이 반대로 돌아갔다.
‘공개 훈련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야외겠지.’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졌다. 속도가 붙은 걸음에 컵에서 커피가 흘러 넘쳤지만 수호는 상관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수호는 아예 컵을 계단 창가에 두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물어봐야 해. 직접.’
백무흠은 훈련에 들어간 이후 연우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들었다. 그게 과연 그 자 스스로 꾸며낸 연극일지, 아니면 정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가 쥐고 있던 용기를 놓아 버린 것인지 알아야 했다.
분명 백무흠은 이번 공개 훈련에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낼 것이다. 고낙조를 잡기 위한 수단은 자신밖에 없다고, 모두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뜻이 정말 담겨 있다면……,
‘그는 고낙조를 잡지 않을 거야.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