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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70화 (70/202)

70화. 내부자 (2)

‘시간이 다 돼?’

여전히 여유로움을 가득 품은 얼굴로 낙조를 응시하는 켈리. 들릴 수 없는 초침 소리가 낙조의 귓속을 파고드는 듯하다. 켈리는 말이 없다. 낙조와 켈리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곳에 없다.

‘혹시 모르니까 힘을 미리…….’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른팔에 힘을 부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맞춰왔던 호흡이 한 번에 어그러진 것처럼, 아무리 해도 힘이 모아지지 않았다. 당황한 낙조가 오른쪽 소매를 황급히 걷어 보았다. 항상 숨쉬듯 돋아 있던 핏줄의 색깔이 이상했다.

“…….”

낙조의 동공이 흔들렸다. 낙조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낙조의 팔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게 무슨 짓―, 컥!”

순간 기도가 꽉 막힌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낙조는 한손으로 목을 붙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켈리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낙조를 바라보기만 했다.

감염됐던 병우와 둘이 방에 갇히고 난 후 분사된 가스를 마셨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캐한 연기를 마시는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제대로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낙조는 계속 숨을 들이켰지만, 심장 박동만 빨라질 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은 흐려졌다.

“Twenty, twenty one, twenty two…….”

낮은 목소리로 켈리가 숫자를 세는 게 들렸다. 낙조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응시한 채 영어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막혀 왔고 손끝에서부터 점점 힘이 빠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으며 몸을 비틀었다.

“헉, 윽, 콜록, 으, 흑…….”

입가에서 새어나온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말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온몸을 채우고 있는 신체 기관들의 선이 하나씩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발작을 할 기력마저 잃은 낙조가 바닥에 축 늘어졌을 때였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제 이 두 눈만 감으면, 모든 게 끝나리란 직감이 생겼다. 이 눈만 감으면…….

“허억!”

아주 찰나의 순간이였다. 분명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온 세상이 암흑으로 물드는 걸 직접 본 것 같았는데. 누군가 악몽에 잠식된 자신을 끌어 올린 것처럼 낙조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낙조는 엉겁결에 들이킨 산소에 목을 다시 붙잡고 켁켁거렸다. 악에 받쳐 붉게 물든 눈가가 매섭게 일렁였다.

“ONE……. You've been dead for a minute. Just, a minute.”

켈리는 자신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영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제 막 다시 정신을 차린 낙조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힘도 다 빠진 상태였다. 혹시나 하여 걷은 팔뚝을 내려다보니, 혈관은 제자리를 찾은 듯 붉고도 파랗게 뛰고 있었다.

“당신…….”

“놀랍군요. 당신의 신체 능력이 이 정도라니. 내가 겁을 먹은 게 아쉽기도 하고요.”

켈리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순간 낙조의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자신에게만 그릇을 가져다주던 부엌 직원. 음식을 먹는지 먹지 않는지 확인하던 시선.

“사람 갖고 장난을 참 정성껏도, 치네, 씨발…….”

띄엄띄엄 숨을 쉬어 가며 낙조가 중얼거렸다. 켈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어떤 환경에서든 숨을 쉴 수 있는 기능……, 정말 불사의 몸이 되었네요.”

“개소리 좀 작작해. 살려 준 거 고맙지도 않으니까.”

“이런 타이밍에 협박은……, 딱히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은데.”

켈리는 작게 속삭였다. 낙조는 혹여나 그녀가 자신에게 손을 댈까 싶어 남은 힘을 모두 오른팔로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확실히 전보다는 느렸지만 조금씩이나마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빨갛게 충혈 된 낙조의 눈과 시선의 위치를 맞추기 위해 켈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아직 바튼 숨을 내뱉는 낙조를 응시하다가 싱긋 웃었다.

“오늘 인류가 또 하나의 발명을 해냈네요. 고낙조 씨 덕분입니다.”

그 말을 받아치기도 전이었다. 아까부터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건지 중앙문 뒤쪽에서 얼굴을 반쯤 가린 남자 서너명이 우르르 복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낙조의 팔을 한 쪽씩 꿰어 차고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아직 힘이 다 모이지 않았는데. 낙조는 이를 악 물고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모든 기능이 꺼졌다가 다시 시작된 것처럼. 어쩌면 명령을 전달하는 부분이 고장 난 것 같기도 했다.

“고낙조 씨에겐 높은 점수를 드릴게요.”

켈리는 조그마한 수첩에 무어라 적고선 자리를 떴다. 남자들은 낙조를 그대로 비상구 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 거의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던 낙조는 남자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9층……?’

2층을 더 내려온 것이었다. 9층이면, 밤이가 있을 것이다. 이 모습을 밤이가 보면, 안 되는데. 낙조는 조금 걱정을 하면서도 밤이를 믿었다. 상황 파악을 그 누구보다 빨리 할 줄 아는 사람이니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을 것이다. 적당히 눈치껏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려 하겠지. 그런데 누가 그녀에게 그 자리를 줄까. 어쩌면 켈리의 지시에 따라 밤이를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 놨을지도 모른다.

“회복실로 옮겨.”

낯선 남자의 지시에 낙조를 든 용병들이 낙조를 질질 끌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과는 달리 유독 공기가 차고 시린 곳이었다. 다시 냉동 창고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어지럽다.’

낙조는 뒤늦게 찾아온 어지럼증에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바닥에 볼을 대고 가만히 누워 있자니, 한 용병이 낙조의 머리채를 잡아 올려 얼굴을 확인했다.

“안 죽었습니다.”

“안 죽는다니까, 저 새끼. 절대로 안 죽어.”

용병들이 서로 키득대며 낙조에 대해 떠들었다. 곧 문이 닫혔다. 낙조는 눈앞이 좌우로 흔들리는 어지럼증 속에서도 몸을 일으켰다. 감시자도 없겠다, 자신의 위치를 밤이에게 어떻게 해서든 알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둔 의미는 분명 밤이 몰래 켈리의 실험쥐가 되라는 것일 테다. 다른 일행들은 순찰을 돌러 나갔으니, 내부에 있는 자는 밤이밖에 없다.

그러나 회복실에 딸린 문은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용병들이 잠그고 나가 열 수 없었다. 낙조는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잡다가 문에 이마를 기댔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방이었다.

‘나를 진짜 죽였던 걸까.’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낙조는 무감각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철제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거면, 나는…….’

생각의 흐름이 자꾸만 비틀렸다.

‘나는 이제 정말 어떡하지.’

과연 자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쥐어질까. 이젠 케이지에 갇힌 실험쥐가 되었는데, 이 상태로 청주에 보내지는 건 아닐까. 그럼 홍해화는? 홍해화도 똑같은 수법에 걸리면 어떡하지. 고민과 생각과 걱정이 한 데 이루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낙조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문고리를 쥐었다.

문고리를 뜯어 버릴 생각이었다. 처음엔 실험실에 들어갈 줄 알고 밤이를 걱정했지만,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니 무슨 방법을 써서든 밤이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잔뜩 핏줄이 불거진 오른팔에 집중한 채 문고리를 가슴 쪽으로 잡아 당겼다. 처음 몇 번은 꿈쩍도 않던 문고리가 조금씩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낙조는 왼손으로 벽을 짚고 다시 한번 문고리를 힘껏 당겼다.

팍, 쿠당탕!

“으…….”

골이 울렸다. 뜯겨진 문고리와 함께 떨어져나간 낙조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이러고 누워 있을 때가 아니야.’

밤이를 찾아야 한다. 그녀를 찾아서, 자신에게 투입한 독이 무슨 성분인지, 자신은 어떻게 해서 살아난 건지 저들보다 먼저 알아내야 한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반대편 문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이리저리 오가는 게 보였다. 벽에 얼굴을 감지하는 센서가 있는 걸 보니 입구인 게 분명했다. 낙조는 벽을 짚어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용병들의 기척은 없었다.

한 걸음을 뗄수록 어지럼증이 점점 심해지는 듯했다. 낙조는 복도를 반쯤 걸었을 때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생각이 너무 깊어져서 증상이 심하게 느껴지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엘리베이터 앞에선 누군가 오지 않을까 염려하며 사물함 옆에 몸을 잠깐 숨겼다. 호흡하는 법을 다시 깨우친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의식적으로 반복했다. 조금이나마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젠 문을 여는 게 관건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아무리 스캔해 봤자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누군가 나오거나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방이 아닌 실험실이 있는 층의 다른 방에 자신을 가둬 놨다는 것은 이 상태의 몸에서 확인할 것이 또 있다는 소리다. 알아야 한다면 ‘그들’이 아닌 밤이가 자신의 상태를 먼저 알아내야 했다. 낙조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곤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누군가가 작게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어머, 당신은 여기 들어오시면―”

“―고낙조!”

누군가 문을 열었고, 낙조의 얼굴을 확인하곤 자신을 막아 세우려 했다. 그 틈 사이로 밤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낙조는 눈을 최대한 부릅 뜨고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흰 가운을 입은 밤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일제히 밤이에게로 달려드는 것도 보았다.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막는 게 분명했다. 낙조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힘이 돌아온 상태에서 낙조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놔요! 무슨 짓이에요!”

“저자랑 접촉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지랄하지 마! 놓으라고!”

밤이의 팔다리에 매달려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연구원들은 낙조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낙조는 흐트러지는 정신 속에서도 밤이를 빼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한 채 손을 뻗었다. 밤이에게 연구원들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사실 여자 대여섯 명을 드는 것과 같은 무게였지만, 낙조는 손쉽게 밤이를 끌어 올렸다.

“누나, 켈리가……, 나한테 독을, 먹였어요.”

“뭐?”

“나보고 이제 죽을 수가 없대. 죽을 수 없는 몸이 됐대요.”

“…….”

“내 몸에 도대체, 뭐가, 뭐가 있는 건지, 알려 줘요. 도대체 뭐가 있길래 다들 이렇게 나를…….”

말은 차마 끝맺을 수 없었다. 밤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낙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에 두 눈을 묻고서 낙조는 한숨을 흘렸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아주 조금, 흘러 나왔다.

*

스위치를 켰다. 깜깜했던 방 안이 단번에 환해졌다. 연우는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서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 앞에 무흠이 작은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흠은 이제 약이 없어도 움직일 수 있었고 말도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정신력이 회복되었다는 뜻이었다. 그간 자신이 겪은 고통은 꿈이라고 망각했다. 연우가 무흠의 훈련을 끝내면서 가장 걱정한 부분이었다. 사람의 기억까지는 손 대지 못할 부분이라, 무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독한 꿈을 꿨습니다. 당신이 나를 모질게 대하는 꿈. 나를 살려 준 당신이 그럴 리 없는데.’

무흠이 정신을 차리고 처음으로 연우에게 한 말이었다. 무흠은 붕어섬에서 잡혀와 죽을 위기에 처한 자신을 연우가 구해 줬다고 믿고 있었다. 직접 그를 고통의 절벽에서 밀어 버린 장본인으로서, 연우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말을 하는 무흠은 미소 짓고 있었다.

“왜 안 자요?”

연우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불이 켜졌을 때부터 인기척을 느꼈을 무흠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눈을 떼어 냈다. 매섭고도 단단한 눈매가 또렷하게 연우를 향해 있었다.

“새 삶을 시작한 기분이란 게 이런 건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옛날엔 가슴에 꼭 한이 맺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없이 속이 개운합니다.”

“앞으로는 할 일이 더 많을 텐데요.”

“은혜에 대한 보답은 확실히 할 겁니다.”

무흠과 대화를 나눌수록 연우는 속이 쓰렸다. 차마 삼키면 안 될 것을 목으로 넘긴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연우는 애써 그에게 웃어 보이고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밤하늘로 가득 찬 바깥 풍경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의 끝도 이만큼 고요할까요.”

무흠이 중얼거렸다. 연우는 답하지 못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두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흠은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하늘은 바라볼수록 점점 연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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