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악어와 새 (3)
켈리는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낙조 일행만 따로 모아 불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일을 조금만 도와줄 수 있느냐는 말에 낙조는 ‘올 게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직 지운과 밤이에겐 얘기를 전하지 못했는데. 해화를 힐끔 보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을 이대로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발하는 데에도 힘을 써야 해요.”
켈리는 정중한 말투로 낙조 일행에게 각자 역할을 분담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밤이가 슬쩍 낙조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막시안의 얘기를 들어보니 남매 두 분이서 바이크를 아주 잘 다룬다고 하더군요. 두 분껜 주변 순찰을 부탁드릴게요.”
“……네.”
해화는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켈리의 말은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아우라가 풍겨 나왔다.
“우리 과학자님껜, 실험실을 빌려 드릴게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밤이를 응시하며 하는 말에 밤이는 약간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단둘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나? 낙조가 밤이를 바라봤지만 켈리가 앞에 있어서인지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고낙조 씨.”
“예.”
“고낙조 씨께는 할 일이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뭐지?’
말로 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 안에 고였다. 한편으론 막시안이 지난밤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얼핏 알 것 같기도 했다. 쉽게 읽어내려고 하면 안 되는 여자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낙조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가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
“남매 두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이곳에 올 때부터 켈리는 은근히 낙조의 일행이 개인적으로 모이는 것을 방해했다. 해화와 지운이 낙조와 시선을 잠깐 맞추었다가 그녀를 따라 나갔다. 밤이와 단둘이 남게 되자, 낙조는 작은 목소리로 밤이에게 물었다.
“어제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누나를 왜 과학자라고…….”
“우리가 가져온 짐을 미리 꺼내 봤더라고. 놀라는 기색이 없었어. 자신들도 연구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어. 그게 다야.”
“누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변명하듯이 말 안 해도 돼요.”
그렇게 말하니 밤이가 낙조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봐 온 적 없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미지의 영역에 호기심을 갖고 홀로 뛰어 들었다지만, 자신과 함께 하면서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나도 많이 당한 사람이었다. 낙조는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미안한 감정에 고개를 수그렸다.
“누나가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하는 거 알아요.”
“그런 나약한 소리 누가 하래?”
밤이가 설핏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낙조를 아프지 않게 툭 건드렸다. 그러나 함께 웃을 힘이 나지 않았다. 겉으론 안전한 공간이었지만 막시안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잘 포장된 감옥과 다를 것이 없었다. 밤이에게도 간밤의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다.
“누나. 누나가 한 말 기억하죠. 너무 완벽해서 이상하다고 했던 거.”
“……그게 왜?”
“저 켈리라는 여자가 만들어낸 허상에 붙잡히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밤이는 의아한 눈길로 낙조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지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한다. 며 웃었지만, 낙조가 따라 웃지 않자 그녀 또한 곧 표정을 정리했다.
“너 뭐……, 봤어?”
“본 건 아니고 들었어요. 자세히는 아니지만……, 실험실에서 긴장 풀면 안 돼요. 누나가 공부하는 실험은 공유하지도 말고요.”
“너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자세히 알려줘야 나도 좀 주의를 하지.”
“켈리는 노아의 방주를 만들고 있어요. 완벽한 생명체만 이곳에 잡아두는 거예요. 결함이 있으면―”
뒷말을 다 잇지 못했는데,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급히 입을 다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평상복이라고 하기엔 조금 두껍고 어두운 자켓을 걸치고서, 얼굴을 반만 내밀어 낙조와 밤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놀라거나 피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볼 일 있으십니까?”
기나긴 침묵 끝에 낙조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낙조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밤이를 바라보았다. 꽤 끈질긴 시선이었다. 밤이는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쾌감에 미간을 좁혔다.
“사람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건 실례죠.”
날카롭게 한 마디를 놓으니,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슬금 미소를 지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다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밤이는 낙조의 옷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일부러……, 저러는 거 같지 않아?”
“맞을 거예요. ……협박하는 거죠. 닥치고 있으라고.”
“네 얘기 들은 거 아니야?”
“대충은 들었나 본데요. 저런 식으로 나오는 거 보면. ……켈리한테 용병이 있다고 했거든요. 막시안이 얘기해줬어요.”
“용병?”
시기에 맞지 않는 생소한 단어에 밤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낙조는 전보다 더 목소리를 낮추고서 속삭였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내쫓거나 제거하는 명목으로 곳곳에 숨어 있대요. 우리를 감시하라고 했을 확률이 높아요.”
“미친……, 개 싸이코였잖아!”
“누나, 목소리.”
“어 미안.”
흥분에 싸인 목소리에 낙조가 밤이를 달랬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럼 우리한테서 정보를 뜯어낼 작정인 거네.”
“대신 우리는, 여기가 무슨 목적으로 실험을 하는지 알아내야 해요.”
막시안과 도연을 이곳에서 내보내기 전까지. 짧은 시간에 밤이에게 알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탈출은 당장 계획한 일이 아니니 추후에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조는 주위에 인기척이 또 느껴지진 않나 바깥을 잠깐 기웃거리다 밤이에게로 돌아왔다.
“청주 본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실험실이 있다는 거 보면.”
“그런데 그 여자는 너를 모르는 척했잖아.”
“도망가지 않게 붙잡아두려는 명목인지도 모르죠.”
낙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러 곳을 오가면서 수많은 일을 직접 겪다 보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도 차분해질 수 있었다. 다만 그만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밤이는 턱을 괴고 무얼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작게 속삭였다.
“의심 살 행동은 하지 마. 최대한 켈리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게 행동해.”
“대놓고 나 바보 만들게요?”
“적어도 용병들이 널 감시하는 일은 줄어들 테니까.”
아무리 낙조에겐 힘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터전이기도 한 이곳에서 무작정 무력을 보일 순 없었다. 낙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저녁에 봐요.”
“그래.”
짧게 인사를 나누고 낙조가 먼저 방을 나섰다. 밤이는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숨을 크게 내뱉었다.
*
“일은 어때?”
지운과 해화는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해화는 다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지운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낙조는 지운의 곁에 앉아 테이블을 정리하는 척 물었다. 지운은 말이 없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포크를 쥐고서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존나 피곤해. 순찰만 도는 게 아니라 보고서도 쓰래. 변종을 봤는지, 죽였는지, 연구를 위한 샘플을 채집했는지. 전부 다.”
“샘플?”
“변종의 피를 샘플이라고 하더라. 각자 2인 1조로 다니는데, 나랑 누나는 떨어뜨려 놨어. 뭐, 일 배워야 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지운은 무언가 찝찝한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낙조가 더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고 묻기 위해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켈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습니다. 내일을 위해 풍족하게 드세요.”
그녀는 식당을 한 바퀴 휘 둘러보다가 낙조와 지운이 나란히 앉아있는 걸 보고서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섣불리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식당을 떴다. 어제와는 달리 이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 누구랑 다니는데.”
켈리가 식당을 떠나고 난 후 낙조가 물었다. 지운은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도연을 가리켰다.
“아주 최고의 파트너야. 실수했을 땐 완전 무섭게 혼내고, 일도 잘 가르쳐줘.”
“별다른 건. 뭐 들은 거 없어?”
“……자기 전에 방에서 얘기해줄게.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지운의 말이 옳았다. 낙조는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곤 수저를 들었다. 양송이 스프와 갓 구워진 빵. 허기를 채우기엔 나쁘지 않은 메뉴였다. 해화는 어디 있나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식탁에 막시안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막시안의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리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둘이 파트너라면 오히려 계획이 잘 풀릴 수 있도록 순풍을 불러올지도 몰랐다.
지운이 씻고 머리에 수건을 걸친 채 방으로 들어왔다. 낙조는 침대 헤드 쪽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무슨 일 해?”
켈리의 말을 듣지 못한 지운이 뒤늦게 물었다. 낙조는 안경을 벗고서 어쩐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나한텐 아무 일도 안 시켰어. 기다리래. 뭘 기다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에엑?”
지운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낙조는 턱을 괴고서 반대쪽의 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아저씨, 그럼 그 얘기는 들었어?”
“무슨.”
“여기, 그냥 일하고 자급자족하는 곳이 아니야.”
“…….”
“점수를 매긴대. 월말마다. 그 점수로 생필품이나 약을 사는 거야. 도연이가 얘기해줬어. 그래서 점수를 많이 받기 위해선 켈리의 눈에 들거나 친분이 두터워야 한다고 했어.”
낙조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사람들이 무방비할 정도로 켈리에게 신뢰를 보이는 모습이 꺼림칙하다 느껴졌는데, 그 이유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켈리는 이곳의 지도자임과 동시에 사업가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체계로 사람들을 꾀어내고, 자신이 정한 규칙에 맞게 움직이도록 사람을 훈련 시킨다.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처리할 수 있는 용병도 갖고 있다. 겉으론 사람들을 거두는 일을 하지만, 그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단단히 하고 이곳이 주는 안전함을 다른 곳에선 넘보지 못하도록 한다.
“밤이 누나랑 얘기를 해야겠는데.”
낙조가 안경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실로 첫 출근을 했으니 대충 그곳의 분위기는 밤이가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운이 낙조의 앞을 막아섰다.
“왜.”
“도연이가 말해줬어. 잘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
“켈리, 그 사람은 밤에 돌아다니는 말을 다 듣는대.”
아마 용병이 주변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옆방인데도 가지 못한다니, 낙조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지운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낙조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식사 끝나고, 나랑 누나 순찰 나가기 전에 다같이 한번 만나자.”
“어디서.”
“지하 주차장.”
지운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도연을 통해 알게 된 센터의 비밀이 한두가지가 아닌 듯싶었다. 낙조에겐 이곳의 정보가 필요했다. 자신들을 갈라놓으려는 켈리의 의도를 대충은 파악했으니 어떻게든 다함께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내야 했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문을 잠갔다. 어쩐지 방문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기시감이 가시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