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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67화 (67/202)

67화. 악어와 새 (2)

노을에 스며드는 뒷모습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낙조는 문득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도연이었다. 그녀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 곁에 서서 낙조를 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며 등 뒤로 진 손을 괜히 꽉 쥐고만 있었다.

도연은 이내 고개를 다시 돌려 노을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다홍색 물감을 헤쳐놓은 것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는 노을의 빛은 산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새 친구들을 위해 더 즐겁게 먹죠.”

켈리는 노을이 다 저물고 어둠이 깔려오기 시작하자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녀를 따라 다시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특별히 신이라거나 믿음이란 단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특정 종교 단체는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낙조는 의심을 쉬이 풀지 못했다. 밤이 역시 낙조와 같은 생각인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토마토를 섞은 에그 스크램블이 식사로 나왔다. 지운은 얼른 수저를 들고 싶어 손을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낙조는 먹기 전 혹시 이들이 식사 기도는 올리지 않는지 유심히 켈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낙조가 예상했던 모든 것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수련회에 온 기분이었다. 적당한 통제를 받으며, 어렵지 않은 규칙을 지키고, 그에 맞는 보상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낙조의 맞은편엔 막시안이 앉았다. 그는 자신이 비건이라며 삶은 토마토와 콩 스프를 먹었다.

‘그래, 불교랬지, 쟤……. 식물이 괴물 된 세상에서 속도 좋다.’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콩을 우물거리는 막시안을 보자니 지금까지 한 의심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낙조는 스크램블을 한 술 떠 입으로 넣으며 밤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밤이는 이미 반을 먹어치운 상태였다. 배고플 만 했지. 막상 하루가 다 가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딱딱하게 군 자신의 태도가 조금 머쓱해졌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의외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해화였다. 그녀는 수저로 스크램블을 휘적이다가 막시안에게 말을 걸었다. 막시안은 씹고 있던 토마토를 모두 삼킨 후 해화를 바라보았다.

“물을 얻으러 갈 때……, 산으로 간다고 했는데, 정말 변종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막시안은 해화의 질문을 듣고 잠시 시선을 켈리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가운데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이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막시안은 짐짓 표정을 굳히고서 해화와 낙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변종은 없어요. 없었는데……, 최근에 발견한 게 있어요.”

그의 말에 해화가 쥐고 있던 수저를 놓았다. 막시안은 켈리의 눈치를 계속해서 보다가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식사 끝나고 옥상에서 만나요.’

막시안은 우리를 믿는 걸까? 아니면 이것 또한 집단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계략 중 하나의 과정일까. 낙조는 일부러 식사를 빨리 끝마치고서 방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가 끝난 이후는 자유 시간이었다. 각자 씻거나 식당에 남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지운은 그새 도연과 이야기를 많이 터 놓은 듯했다.

‘하긴, 또래 만나는 건 오랜만이니까.’

낙조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버거웠다. 자신에 대한 소개를 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상품의 특징처럼 자신을 구성한 요소들을 매번 설명하는 게 지겨웠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해본 적도 없었다. 사람으로 인해서 감정을 소모하는 게 싫었고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해를 입거나 슬퍼하는 것도 신경 쓰기 귀찮았다.

그래서 지운과 밤이, 그리고 해화와 지금까지 함께한 것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정’이라는 게 붙어버려서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반듯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일찍이 스스로를 포기했다면 서연우를 따라 청주에 가서 조용히 피나 뽑혀 줬을지도 모른다.

타인과 섞이는 것을 일부러 기피했다. 부모님과 마지막 연락을 한 건 세상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이었다. 연을 끊자고 했던 아버지 몰래 전화를 건 어머니와 짤막한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냥 아프지만 말아라.’ 어머니가 한 말이다. 취업이든 결혼이든 사람과 직접 엮이는 걸 거부한 낙조에겐 가장 편안한 말이었다.

그런 낙조의 성격을 잘 아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일 년에 두세 번 만날까 말까 한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그가 한 번은 그런 말을 했다.

「넌 외로움이란 걸 몰라서 좋겠다.」

혼자 있어도 잘 놀잖아.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아마 술을 꽤 먹었을 때 취기에 올라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낙조는 그 말에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게 있다. 애인이 없으면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줄 안다. 낙조는 어렸을 때부터 고양이를 좋아했고, 고양이를 15년 동안 키웠으며,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었다. 반려묘를 고양이 별로 떠나보낸 후 1년 가까이 캣타워와 장난감을 버리지 못했다. 자주 보던 길고양이가 한 마리라도 안 보이면 동네를 뛰어다니며 찾았다. 집에선 다른 사람들의 반려묘 영상을 보며 웃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외로운 사람이라며 측은하게 여기고, 사랑을 몰라서 불쌍하다 말하는 게 싫어서 혼자 지낼 뿐이었다.

“고낙조.”

침대에 앉아 그런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해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눈짓을 하는 걸 보니 옥상에 올라가자는 말 같았다. 낙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녀를 쫓았다. 대충 주위를 둘러보니 켈리는 이 층에 없는 듯했다.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는 막시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완전히 깔린 어둠 아래에서, 밤바람에 막시안의 갈색 머리카락이 부스스 흩날렸다.

“몰래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해화가 슬그머니 다가가 말했다. 문이 열렸을 때부터 인기척을 느꼈던 건지 막시안은 잘게 웃으며 대답했다.

“켈리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만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낙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하나 걸리는 게 있을 줄 알았단 말이지. 낙조는 내색하지 않고 해화의 뒤에 서서 막시안을 응시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들을 따로 옥상으로 부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곳의 규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알리고 싶은 내부의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데 처음 본 사람들한테 굳이?’

낙조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막시안은 난간에서 내려와 닫힌 옥상 문을 한 번 힐끗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여기 오고 나서 이상한 거 느낀 거 없어요?”

낙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다. 해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자, 막시안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고 둘에게 말했다.

“여기엔 아픈 사람이 없어요. 다쳤다거나, 지나치게 늙은 사람.”

막시안의 말에 처음 건물에 발을 디뎠던 순간이 기억났다. 자신들을 바라보던 시선들은 희한하게도 빛났다. 그 시선들이 과연 모두 정의롭게 빛났었나.

“아이들은……, 있던데요.”

해화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막시안은 예상한 답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들도 다 하는 일이 있어요. 몸집이 작으니 어디든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 여기서 할 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를 왜, 데려왔습니까?”

이번엔 낙조가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며 물었다. 막시안은 미소를 거두었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그의 얼굴에선 원망스러움이 묻어났다.

“저번에 물을 뜨러 갔을 때, 도연이가 벌레에 물렸어요. 처음엔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밤에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아직 켈리는 몰라요. 하지만 알게 되면, 도연이는 추방돼요.”

해화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도연이, 도연이 어머니랑 이곳을 나가야 해요. 해화, 낙조, 이번엔 우리를 도와줘요.”

살갗을 때리는 바람이 유난히도 날카로웠다.

“강요는 안 해요. 못해요. 해화를 돕기로 결정한 건 내 선택이었어요. 낙조를 살리는 것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도와라.’ 이곳의 규칙 중 하나를 지킨 거예요.”

“허…….”

낙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원하는 바가 없다면 지나칠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한정된 자원으로 여럿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가 있지만, 그래도 서로를 살리자고 뭉쳐 사는 단체가 아닌가. 늙고 아픈 것은 죽이고 어린 아이의 노동력까지 착취하며 만들어진 단체의 법칙을 지금 자신과 거래하자고 내미는 건가.

그렇다고 이들이 해화와 지운을 도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에겐 엄연히 빚이 있다. 도망친 이후에도 며칠 동안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까지 보장받지 않았나. 그럼에도 쉽사리 ‘도와주겠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 가늠할 수 없는 가능성의 수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누가 하나 잘못되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해서, 다시 저들이 이곳으로 끌려오면…….’

책임질 수 없는 일에 몸을 던지는 일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낙조는 무거운 신음을 흘리고서 해화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고낙조 너는?”

해화가 몸에 힘을 주고 서서 낙조에게 되물었다. 막시안의 시선이 둘의 사이로 떨어졌다.

“나쁜 목적을 갖고 널 구해준 사람은 아니야.”

“……그래. 갈 곳은 어디든 있겠지.”

“햇빛이 드는 곳?”

“어?”

“―햇빛이 드는 곳으로 가자며.”

「거기는 햇빛이 안 들잖아.」

“그럼 남향인 집을 찾아야겠네.”

자신이 한 말임에도 다시 떠올리자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낙조는 일부러 시선을 난간 밖으로 던져둔 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곁에서 해화가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막시안의 작전은 이러했다. 탈출하기로 한 날 새벽, 물을 뜨러 가는 척 막시안과 도연은 차에 오른다. 도연의 엄마는 몰래 차 트렁크에 숨는다. 둘이 먼저 건물을 떠나고, 낙조와 일행은 청주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그곳을 뜬다. 다만 분명 켈리가 자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빨리 나와야 한다.

켈리는 눈치가 빠르다. 수상함을 느낀다면 그날 새벽에 물을 뜨러 자신이나 도연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진 도연의 발작을 들키지 않았지만 혹여 들키게 된다면 켈리와 도연, 단 둘만 한 공간에 내버려두면 안 된다. 켈리의 주의를 받더라도 도연의 곁을 지켜야 한다.

악어와 새엔 주민들은 모르는 얼굴들이 있다. 센터를 지키는 켈리의 용병이다. 막시안은 우연히 그들이 도망치려 했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만약 운이 좋지 않다면 낙조 일행이 그곳을 계속해서 떠나려고 할 때, 용병이 뒤에 따라붙을 수도 있다.

“용병이 따라 붙으면, 그 다음은?”

낙조가 유심히 계획을 듣다가 물었다. 막시안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가 대답했다.

“일단 저희랑 만나요. 수가 많지는 않으니까, 이길 수도 있어요.”

“도연이라는 아이는, 변이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가요?”

그때까지 말 한 마디 없던 해화가 막시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막시안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도연이가 물린 산 위치를 기억하기는 한데……, 켈리에게 알릴 수가 없어서…….”

“우리 쪽에 잘 아는 언니가 있어요. 나랑 같이 온 언니. 그 언니한테 가요.”

해화는 도연의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어딘가 결연에 찬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막시안은 해화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젖은 목소리가 고맙다고 속삭였다. 해화는 막시안의 긴 손가락을 살짝 잡아주었다. 워낙 큰 손이었던지라 해화의 손이 작아 보였다. 해화는 꽤 오랫동안 그렇게 조용히, 막시안을 위로했다.

방으로 돌아갈 때도 셋은 시간을 나누어 따로 계단을 내려갔다. 가장 먼저 해화가, 그 다음엔 낙조가. 마지막으로 막시안이 계단을 내려왔다. 낙조가 방에 돌아왔을 때 지운은 잘 준비를 마치고 낙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갔다 와?”

지운이 도연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던 낙조는 문을 닫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친해졌다고 해도 그 얘기까지는 안 했겠지.’

막시안과 도연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한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 지운은 생각보다 쉽게 동의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밤이였다. 목숨을 빚졌다고는 생각해도 일행 모두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과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까. 낙조는 지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왜 내 얼굴만 보면 한숨을 쉬어!”

“자라.”

낙조는 등 돌려 누운 후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밤이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지켜보며 그녀의 따뜻함을 몇 번이나 느꼈는지 모른다. 낙조는 그녀의 다정함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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