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늪지대 (5)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의식은 있었지만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사방을 감싼 공기는 곧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하아.”
입김이 입술 새로 새어나왔다.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몇 번 눈을 더 깜박이니 이내 빛 한 줄기가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하게 보였다.
‘이 새끼들 어디에 쳐넣은 거야…….’
목을 좌우로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돌아오자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의 창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공간엔 5층짜리 선반이 좌우로 깔려 있었다. 불투명한 봉투에는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었는데, 몸을 겨우 일으켜 확인해 보니 레토르트 음식들이었다.
‘이 미친 새끼들 사람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냉동 창고에…….’
낙조는 끙, 하고 신음을 내면서 바닥에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완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아 당장 뛰쳐 나간다 해도 다시 붙들릴 게 빤했다.
의식의 마지막에 들렸던 건 밤이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낙조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있다가 문득 붕대가 둘러져 있는 오른쪽 쇄골을 발견했다.
의식을 잃었던 와중에 회복한 건지 별다른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낙조는 오른팔을 한 바퀴 돌려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해화와 지운은 무사히 도망쳤을까. 긴박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어떤 상황이 먼저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게 나아.’
낙조는 그렇게 생각했다. 둘이 살고 보는 게 우선이다. 자신은 밤이를 이곳에서 구해내는 게 우선이고. 차디찬 공간에 앉아 있다 보니 이성도 쉽게 돌아오는 듯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낙조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예상은 했지만 안에선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낙조는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지금쯤 일어났을 텐데, 조용하네.’
‘한 번 열어 볼까?’
‘그러다 좆되면, 나는 모른다.’
‘야, 열두 시간이나 넣어 놨어. 진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만 해보는 거지. 근데 설마 죽었겠어. 변종이래잖아.’
창고를 지키는 걸로 보이는 병사 두 명이 꽤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밤이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낙조는 벽에 기대어 앉아 얼굴을 감쌌다. 밤이가 붕어섬에서부터 챙겨온 모든 샘플들을 빼앗겼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난관의 키 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샘플들을……, 전부 다.
생각을 고쳐 먹으려고 해도 자신과 함께 구렁텅이에 박힌 이를 생각하면 자책밖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총에 맞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밤이는 곁에 있었다. 낙조는 차가운 공기도 느끼지 못하고 차오르는 울분에 이를 악물었다.
신평에서 사이비 집단에게 붙잡혀 무력하게 쓰러져 있었던 밤이가 생각났다. 아무리 자신 앞에선 강한 사람이어도, 그런 그녀에게도 감당하지 못할 힘이 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지켰어야 했는데.
그때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창고 앞에서 멈추었다. 병사 둘이 경례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익숙한 군인의 목소리가 낙조의 귀를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앞에 주차해 둔 차에 실어. 청주로 간다.’
‘예, 대령님.’
낙조는 두 눈을 멍하니 깜박이다가 자신이 누워 있던 곳으로 돌아가 두 눈을 감았다. 순순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밤이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곧 문이 열렸다. 병사 둘이 기웃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지렁이를 찔러 보듯 자신의 몸을 군화로 툭툭 건드려 보더니, 이내 한 명이 낙조를 들쳐 업었다. 낙조는 실눈을 떠 밖을 바라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뿐이었다. 밤이로 보이는 인영은 없었다.
‘설마 이곳에 남겨 두는 건가.’
병사는 낙조를 트럭 짐칸에 내리고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눈을 뜨니 그 틈새로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여자랑 그 징그러운 식물들은 어디에 실으라고 하시냐?’
‘저기 승용차.’
밤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밤이가 챙긴 샘플들까지 확보했다면, 지운과 해화는 차를 타고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된다. 여태껏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고. 낙조는 꽉 다물린 문의 고리를 붙잡고 고개를 잠시 숙이고 있었다.
‘누나를 먼저 구해야 해.’
지운과 해화가 선택한 결정을 원망하지 말자.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게 낫다고. 누가 돌아오겠어. 죽을 게 빤할 이곳을, 나 하나 구하자고……, 누가 오겠어.
낙조는 문고리를 매만지다가 시동 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트럭 안이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엔 빠져 나가야 했다. 낙조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지 않길 바라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떠냈다.
이내 낙조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무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정답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렇게 변종이 된 모습을 보고 싶으면 보여 주면 될 게 아닌가. 낙조는 오른쪽 소매를 걷고서 주먹을 움켰다. 새파랗게 질린 살갗 위로 핏줄이 싹을 틔우듯 투득, 투득, 불거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가든 병사들의 이목을 단숨에 끌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총에 맞을 때와는 다른 상태였다. 엄연히 몸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전에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겐 있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낙조는 왼손으로 문을 짚은 다음 호흡을 다스렸다. 곧 크게 형태를 갖춘 이파리가 한곳으로 모여 힘을 압축시켰다. 순간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힘이었다. 덜컹거리는 트럭에도 낙조는 꼿꼿하게 서서 문고리만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만에 끝내야 했다.
탕!
잔뜩 긴장한 채로 문고리를 향해 주먹을 내려치려고 할 때였다. 느닷없이 총소리가 트럭 가까운 곳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낙조의 주먹도 허공에서 멈추었다. 트럭이 급히 핸들을 꺾었는지 중심이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
맨몸으로 바닥에 구른 낙조는 터져 나오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당최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탕, 탕!
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그 틈 사이로 병사들의 외침이 섞이긴 했지만 문이 닫혀 있어 잘 들리지 않았다. 트럭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총구가 어디를 겨누고 있든 바깥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낙조는 손잡이를 왼손으로 꽉 붙들어 맨 상태로 다시 한번 힘을 모았다.
콰앙, 쾅!
굳게 다물린 문고리가 산산조각 났다. 이파리에 흠집이 났지만 지금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낙조는 이리저리 휘둘리는 트럭 안에서도 중심을 곧게 잡았다. 당장 눈앞에서 총알들이 날아다닌다고 해도 이곳에선 나가야 했다.
쾅!
발로 세게 문을 걷어찼다. 문고리를 잃은 문은 쉽게 나가 떨어졌다. 한쪽 문이 뒤로 날아가며 트럭의 바로 뒤에 따라 붙었던 차의 앞유리를 박살 냈다. 차는 비틀거리더니 이내 곧 가드레일을 박고서야 멈췄다. 낙조는 덜렁거리는 남은 문 하나를 붙잡고 서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했다.
남은 5개의 차들은 일제히 한 줄로 엮인 것처럼 줄줄이 서로를 따라오고 있었다. 낙조는 시선을 황급히 총소리가 났던 곳을 향해 돌렸다.
운전석에서 몸을 빼내 뒤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낙조가 문을 부순 걸 본 뒤 차량의 운전수가 급히 무전기를 꺼내는 것도 보았다. 낙조는 잠시 한 발자국 물러났다가 힘껏 그 차량의 본넷 위로 뛰어내렸다. 쿵, 소리와 함께 운전수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이파리로 변한 손을 발견한 운전수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급히 꺾었다. 낙조는 급히 사이드 미러를 잡아 반동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조수석에서 뒤쪽을 향해 조준하고 있던 저격수가 머리를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결국 운전수는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고, 낙조는 그 틈을 이용하여 차를 밟고 뛰어 그 다음 차 위로 올라탔다.
“고낙조!”
차가 달리는 속력만큼 온몸을 할퀴는 찬바람에 미간을 잠시 좁히고 있을 때였다. 이곳에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낙조의 귀를 울렸다.
고개를 천천히 드니 익숙한 체형의 여자가 오토바이를 탄 채 낙조가 올라탄 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이크 고글모를 쓴 채 목이 터져라 낙조의 이름을 불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바이크를 차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붙인 채 손을 내밀었다.
“잡아!”
처음 홍해화를 봤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지. 낙조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흰 손을 왼손으로 붙잡고서 차에서 뛰어내렸다. 아슬아슬하게 해화의 오토바이 뒤쪽에 발이 걸쳐졌다. 곧 그녀의 뒤에 자리를 잡자, 그녀가 조금 더 속력을 내며 문짝이 다 뜯어진 트럭을 앞질렀다.
“너 어떻게―”
“―언니부터 구하고 얘기하자.”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의 뒤를 따라 여러 바이크들이 해화와 낙조를 에워싼 채 달려오고 있었다. 바이크의 뒤쪽엔 총을 든 이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저격수와 총격전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저기 두 번째 차야.”
해화가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가장 선두에 있는 차는 이제 뒤쪽의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뒤에 앉아 있던 병사들이 총을 꺼내 드는 모습이 보였다. 해화는 조금 더 속력을 높였고, 낙조는 두 번째 차에 조금 더 가까이 붙을 무렵 차 위로 다시 뛰어들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앞쪽의 차에서 자신을 조준한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낙조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병사의 총을 겨누었다. 쓸 데 없는 살육은 하지 말자. 낙조의 목표는 트럭 안에서부터 지금까지, 밤이를 무사히 구해내는 것이었다. 이파리가 단번에 총구를 만들어 내고, 낙조는 방아쇠를 당겼다. 뜨거운 피로 응집된 총알은 병사의 총을 엄청난 속력으로 튕겨 냈다. 총을 떨어뜨린 병사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해화는 조심스럽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두 번째 차의 트렁크를 붙잡았다. 방향을 살짝 오른쪽으로 틀어 틈을 만들어 주자, 뒤쪽을 정리한 다른 바이크 무리들이 해화의 뒤를 따랐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그중엔 지운도 있었다. 지운은 낙조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헬멧을 쓰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웃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낙조는 왼손으로 왼쪽 문 손잡이를 콱 잡아 당겼다. 생각했던 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밤이가 다치지 않도록 구해야 한다. 낙조는 아직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이파리를 주먹으로 뭉친 다음 창문을 내리쳤다.
파악!
힘없이 부서진 유리 파편이 차의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낙조는 그제야 왼손으로 창문 턱을 붙잡고 아예 문을 뜯어냈다. 그리고선 오른손으로 차의 위쪽을 붙잡고 굴리듯이 뒷좌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꼼, 꼼짝 마!”
우습게도 차에 들어오자마자 이마에 총구가 박혔다. 병사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고 있었다. 낙조는 차디찬 시선으로 그것을 단숨에 캐치하곤 이파리로 총구를 감싸 위쪽으로 부러뜨렸다. 운전병은 거의 우는 목소리로 무전을 치고 있었다.
총을 밖으로 버린 후 낙조는 병사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기절시켰다.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누나.”
낙조가 작은 목소리로 밤이를 불렀다. 그녀는 손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낙조는 잎사귀를 펴내 날카로운 부분으로 줄을 잘랐다.
“여기, 여기에 고낙조가 있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나는 이만 갑니다. 알아서 잘들 가셔요.”
무전기를 빼앗은 낙조가 말을 내던졌다. 분노에 가득 찬 중령의 비명이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왔지만 이젠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누나가 홍해화 뒤에 타요.”
“해화?”
“홍해화랑 홍지운이 왔어요.”
낙조의 말에 밤이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도 그 둘을 보낸 후 기대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낙조는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밤이의 몸을 부축해 해화의 오토바이 뒤에 앉혔다. 그리고 나서야 운전병의 목에 잎사귀를 들이대고 속삭였다.
“앞 똑바로 보고 잘 가.”
그리곤 조수석에 놓여 있던 밤이의 짐을 챙겼다. 가장 큰 백팩을 먼저 밤이에게 넘긴 후 상자를 들었다. 운전병은 겁에 잔뜩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저씨, 여기!”
지운이 타이밍 좋게 낙조가 탄 차 옆으로 따라 붙었다. 낙조는 상자를 들고서 호기롭게 지운의 오토바이로 뛰었다. 이내 해화가 선두로 방향을 역방향으로 돌렸다. 해화와 지운을 호위하던 바이크 무리도 다함께 방향을 틀었다. 대열이 완전히 망가진 부대 차량들은 낙조를 쫓지 못했다. 낙조는 고개만 돌려 멀어지는 군사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