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늪지대 (1)
“차라리 외계인이 지구 침공한 게 나았을지도 몰라.”
“너는 전부터 그런 소리를 자꾸 하더라.”
주유소에 차를 주차시키고 기름을 넣는 도중, 멀뚱히 서 있던 지운이 말했다. 낙조는 하염없이 올라가는 숫자를 보면서 맞받아쳤다.
“그렇지 않아? 지금 우리끼리 편 갈라서 술래잡기 할 때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뒤바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야.”
낙조는 주유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아직까지도 손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나마 니트에서 풍기는 향긋한 향을 들이키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주유소 옆에 딸린 편의점에서 남은 물과 유통기한이 남은 먹을거리들을 조금 챙겼다. 이미 많은 이들이 다녀갔는지 사실 그다지 많은 양을 챙기진 않았다. 어질러진 계산대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물건들, 이따금씩 흩뿌려진 핏자국으로 봐선 먹을 것을 두고 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피소는 얼마나 걸려?”
“한 시간 정도…….”
낙조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해화는 미지근한 물을 들이켜면서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주위를 살피는 습관은 완전히 몸에 길들여졌다. 이상한 낌새라도 보인다면 곧장 숨을 죽여야 했다. 웬만하면 그들과 대치하지 않는 게 체력이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됐다. 아무리 그들의 모습에 익숙해진다고 해도 바이러스에 무릎 꿇린 인간의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좋은 풍경이 아니었다.
주유소에서 전주로 빠지는 길목은 신평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정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을까. 낙조는 꺼진 신호등을 바라보며 악셀을 밟았다. 종종 아무렇게나 멈춰져 있는 차들을 지켜갈 때마다 긴장이 서렸다. 총을 든 민간인들이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을까, 살고 싶다는 광기를 지휘하는 악마가 자신들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텅 빈 도로엔 무수한 환영이 가득했다.
대피소에 도착한 이후엔 어디로 가야 하지. 낙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다음 목적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낙조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었다. 본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 변종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는 곳.
“빈 집을 찾자.”
‘전주’라는 표지판을 지나쳤을 때, 밤이가 입을 열었다. 낙조는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낏 바라보았다. 밤이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주택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은 쓸쓸한 눈빛이라, 함부로 그 말에 이유를 캐물을 수 없었다.
대피소의 위치는 전주역 바로 앞이었다. 처음엔 주택단지를 돌아보려 했으나 골목마다 죽은 변종들이 널브러져 있어 차가 오가는 게 힘들었다. 결국 선택한 건 아파트였다. 주차장도 입구부터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길가에 차를 댔다.
“5층 이상으론 절대 가지 말고, 너희가 숨은 곳 문고리에 이거 걸어 놔.”
밤이는 가방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내 해화에게 건넸다. 붉은색 머리끈을 받아든 해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운전대를 잡는 건 밤이였다. 그녀는 삼박골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온 변이 선충을 한 번 더 확인하곤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완전히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낙조와 해화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은 부서져 있었다. 강제로 열린 문 여기저기엔 생채기가 남아 있었고, 마른 피와 진액 자국이 수두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흔적들이었다. 낙조는 뒤꿈치를 든 채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해화가 뒤를 따랐다. 1층은 혹여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변종의 시야에 너무 잘 잡히겠다는 생각에 2층의 빈 집부터 탐색하기로 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막 2층에 발을 올렸을 때, 해화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낙조가 뒤를 돌아보니 해화는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언니랑 홍지운, 올 때까지 우리 여기 계속 있는 거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낙조는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입을 열었다.
“빠르면 밤이 되기 전에 찾아올 거야.”
“그 다음엔?”
낙조가 가장 두려워했던 질문이 튀어 나왔다. 해화가 고개를 들어 낙조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마른 얼굴이 수많은 걱정을 띠고 있었다. 낙조는 손을 들어 해화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위로 끌어당겼다. 두어 계단을 남겨 둔 해화가 2층으로 마저 올라왔다.
“붕어섬 같은 곳을 찾자.”
“붕어섬으로 가진 않고?”
“거기는 햇빛이 안 들잖아.”
낙조는 그렇게 말하며 왼쪽 복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사람이 있을 수도, 변종이 있을 수도, 그도 아니면 동물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순식간에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을 염려해야 했다. 고개를 먼저 내밀고 복도를 훑었다.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양쪽에 뻗어 있는 복도는 고요했다. 여기저기 부서진 화분이나 넘어진 자전거들이 눈에 보였지만 인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범죄 현장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한 걸음을 내딜 때마다 숨을 옅게 내쉬었다. 해화는 조용히 낙조의 손에 잡힌 채 그의 뒤를 쫓았다.
“…….”
반쯤 열린 문 하나가 눈에 보였다. 낙조는 해화의 손목을 놓아주고서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에 해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은 낮임에도 어두컴컴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집인 듯했다. 신발장은 텅 비어 있었고, 집을 감싸고 있는 공기 자체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현관에서 섰을 때 보이는 방은 총 두 개, 거실, 그리고 좁은 부엌 하나. 낙조는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섰다.
‘학생 방인가.’
구석에 침대 하나, 맞은편에 책상 하나가 놓인 방은 난장판이 된 밖과는 달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낙조는 책상 책꽂이에 꽂힌 문제집들을 보며 생각했다. 책상 위엔 채 정리하지 못한 필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뾰족한 연필을 집어든 낙조는 다시 뒤를 돌아 거실로 나왔다. 바깥을 흘낏 보니 해화의 그림자가 신발장 근처까지 와 닿아 있었다.
“…….”
안방 옆엔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변종의 공격을 받았을까. 화장실 문 위론 밖에서 손톱으로 문을 긁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낙조는 화장실 안도 슥 훑어보고서 안방으로 들어섰다.
“깜짝이야.”
가슴에 식칼이 꽂힌 시체 하나가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문을 조금 더 여니 쾌쾌한 냄새가 들이닥쳤다. 낙조는 한쪽 팔로 인중을 막고서 시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변종이네…….”
식칼은 정확히 왼쪽 가슴에 꽂혀 있었다. 변종은 숨을 거둔 지 오래인지 부패가 꽤 진행된 상태였다. 그가 누운 곳을 중심으로 곰팡이 같은 것들이 이불과 베개 이곳저곳에 뿌리를 퍼뜨리는 중이었다.
변종이 죽고 난 후 부패하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불에 퍼진 것들은 뭘까. 맨손으로 만지기엔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컸다.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밖에 혼자 서 있을 해화를 떠올리고 밖으로 나가려 몸을 돌렸다.
“…….”
침대 커버에서부터 퍼진 곰팡이 같은 것이 바닥에도 이어져 있었다.
‘왜 이걸 못 봤지?’
낙조는 미간을 좁히며 그것이 낸 길을 따라 발을 옮겼다. 거실에 발을 디뎠을 때, 안으로 들어올 땐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막혀 있던 시야가 트이니 그제야 천장에서 뿌리를 내린 채 거미줄처럼 잎사귀로 사람들을 돌돌 묶은 식물이 보였다. 낙조는 걸음을 멈추고서 그것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여럿이고 변종은 하나다. 잎사귀에 감싸져 있는 이들은 아마도 이 집에 살던 가족인 듯했다. 낙조는 오른쪽 소매를 걷고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긴 겨울잠에서 깬 듯 몸을 부르르 떠는 잎사귀는 천천히 낙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뿌리는 두껍고 무수하게 천장에 박혀 있었다. 잎사귀에 말린 사람들의 얼굴에선 혈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잎사귀와 진액으로 뒤덮여 이미 질식한 듯했다.
‘이 녀석도 냄새로만 움직임을 감지하나?’
낙조는 한 걸음 물러나 변종을 마주했다. 거꾸로 매달려 자신을 응시하는 잎사귀는 섣불리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는 것처럼 작은 잎사귀를 위아래로 까딱거리기도 했다. 낙조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안방에 식칼이 있다. 변종 또한 사람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 숨이 끊어진다. 이 두 개의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었다.
낙조는 현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무언가 쫓아오는 기척이 났다.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곧 복도에 가만히 서 있는 해화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해 줘야 했다.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있는 힘껏 문을 안으로 잡아당겼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닫히려는 찰나였다. 좁디 좁은 틈을 뚫고, 줄기가 벽을 짚으며 문을 밀어냈다. 오른쪽 팔이 욱신거렸다. 그리 반갑지 않은 감촉이었다. 낙조는 오른손까지 문고리에 두고서 힘껏 잡아당겼다. 조금 밀리는가 싶던 식물의 잎사귀가 코를 벌름대듯 살랑거렸다. 잎사귀의 끝이 향하고 있는 곳엔 해화가 서 있었다.
“피해!”
“고낙조, 뒤에!”
둘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외쳤다. 해화의 시선은 낙조의 등 뒤에, 낙조의 시선은 해화에게 향하는 잎사귀에 붙들려 있었다.
“커흑.”
흉부를 세게 압박하는 고통에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몸이 허공으로 들리더니 거실 쪽으로 이끌렸다. 힘은 뼈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단단했다. 낙조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땐, 맞은편에 똑같이 붙들린 해화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변종의 진액이 닿은 오른손은 꾸역꾸역 힘을 뽑아내는 중이었다. 낙조는 조금씩 자신을 죄이는 줄기를 밀어내며 해화를 살폈다. 그녀 또한 숨을 힘겹게 내뱉으면서도 몸부림치고 있었다. 해화의 키보다 더 커다란 잎사귀가 그녀의 정수리를 감쌌다. 동시에 낙조가 날이 선 자신의 잎사귀로 몸을 죄이고 있는 줄기를 잘라 냈다.
툭, 투두둑. 툭.
노란 진액이 터지면서 줄기는 낙조를 놓쳤다. 바닥에 구른 낙조는 고개를 들어 해화를 쥐고 있는 줄기도 마저 썰어냈다. 두껍긴 했으나 딱딱한 편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해화는 막힌 숨을 풀어내며 콜록거렸다.
“안방에 본체가 있어. 이미 죽은 것 같긴 한데, 이거, 이 검은 씨앗 같은 게 퍼지기 시작한 곳을 잘라내. 어떻게 만들든 상관없으니까, 그쪽 신경을 아예 죽여.”
낙조는 해화를 붙들고 말을 빨리 내뱉었다. 거꾸로 매달린 식물은 아마 죽은 변종의 몸에서 밖으로 나와 천장에 뿌리를 내린 듯싶었다. 기생의 삶을 끝내고 제 목적지를 찾은 것이다. 낙조는 안방에서 보았던 시체와 식칼을 떠올리며 해화를 안방 쪽으로 떠밀었다. 해화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줄기가 날아들기 전, 발을 굴렸다.
우당탕!
줄기를 피해 움직이다 보니 제대로 중심을 잡는 게 어려웠다. 해화는 안방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차마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는지, 잎사귀는 해화의 발목 근처에서 퍼덕거리다가 거실로 돌아갔다.
“하아, 하…….”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킨 후 침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낙조의 말대로 시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정확하게 수직으로 꽂힌 식칼은 보고 있기만 해도 사람의 온기가 떠난 지 오래인 듯했다. 거실에선 그 변종식물과 낙조가 대립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퍼지기 시작한 곳……, 시작한 곳…….’
해화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시점에서 고민 따위를 늘어놓는 건 사치였다. 손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단단하게 꽂혀 있던 식칼을 뽑아낸 해화는 숨을 고르며 눈을 굴렸다. 바닥으로 이어진 이 검은색 길이…….
“아악!”
거실에서부터 해화를 따라 들어온 것처럼 길게 늘어진 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해화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분명 감겨 있었던 시체의 왼쪽 눈이 시퍼렇게 뜨여 있었다. 동공은 보이지 않았지만, 묽은 흰 자가 분명히 해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해화는 두 손으로 식칼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후, 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해화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했다. 시체는 눈만 껌벅일 뿐 다른 부위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신경계에 씨앗을 내린 건가? 그런데 왜 한쪽 눈만…….’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해화가 쥔 식칼의 칼날은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 와중에도 거실에선 무언가 부딪치고, 깨지고, 망가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다른 부분은 못 움직이는 거야. 숙주가 된 몸이 죽어 버려서……!’
그때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해화는 겁 없이 침대 위로 뛰어 들었다. 침대가 순간 울렁거리고, 시체의 눈알이 사정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화의 움직임을 쫓는 것처럼.
그따위 움직임에 동조해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해화는 시체의 배 위에 올라타고서 희멀건 눈알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쿠슈슉, 찌걱-
질기디 질긴 것을 찢는 듯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해화는 눈을 꼭 감은 채 자신의 무게를 실어 더욱 더 깊게 눈을 찔렀다. 그럼에도 거실에서 일어나는 소동은 끝나지 않았다. 해화는 반이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올렸다. 칼날에 파인 상처를 가진 눈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열이 올랐다. 자신을 대놓고 비웃는 것 같았다.
감히, 이미 죽은 게, 이제 곧 죽어 버릴 게, 나한테. 감히, 우리를.
해화는 눈을 크게 뜬 채 계속해서 눈구멍을 향해 칼을 쑤셨다. 이미 응고된 피가 묻어 나오든, 진액이 튀든 상관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라지고 나서야 칼날에 검은 포자가 딸려 나왔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해화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구멍을 아예 파버릴 것처럼 칼을 휘둘렀다. 침대 주위로 검은 피와, 포자와, 진액이 뒤섞여 나왔다.
“…….”
일순간 금방이라도 낙조를 삼켜 버릴 것처럼 난폭하게 굴던 줄기가 바닥으로 푹 꺼졌다. 투두둑, 툭. 거미줄에 싸인 것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던 시체들도 떨어졌다. 낙조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화는 고장난 로봇처럼 칼을 계속해서 쑤셔 넣고 있었는데, 크게 뜬 두 눈에선 조용히 눈물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홍해화!”
뒤에서 누군가 해화를 붙잡았다. 해화는 생각보다 쉽게 시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함께 바닥으로 구른 건 낙조였다. 낙조는 해화의 손에서 식칼을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서 그녀의 머리를 품에 넣고 토닥였다.
“잘했어. 이제 됐어. 다 됐어…….”
낙조의 품에선 비릿한 피 냄새와 노부부의 집에서 나던 따뜻한 향이 났다. 해화는 낙조의 니트를 부여잡고 소리 죽여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