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옛날 옛적에 (4)
새벽이 되자마자 눈이 절로 떠졌다. 낙조는 지운이 깨지 않게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곤 노인의 헤진 자켓을 찾아 입었다. 창고에서 낫이나 삽을 하나 찾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니, 이미 누군가 마루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일찍 일어났네.”
“……뭐야, 머리.”
길었던 해화의 머리가 싹둑 잘려 있었다. 아직 파마기가 조금 남은 단발은 어깨를 닿을 듯 말 듯한 길이였다. 해화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긴 거 하등 도움이 안 돼서, 어제 언니한테 잘라 달라고 했어.”
“…….”
“반응이라도 좀 해라.”
“어, 잘했네.”
“니 친구 없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쓱하게 창고로 걸어가는데, 불쑥 해화가 물었다. 낙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창고 문을 열고 지난밤 노인이 썼던 낫을 찾기 위해 불을 켰다.
“내가 친구 해 줄 테니까 앞으로 말 예쁘게 하는 법 좀 배워.”
해화가 등 뒤로 다가와 말했다. 낙조는 대답하지 않고 핏자국이 다 닦여 있는 낫을 집어 들었다.
“야, 대답.”
“그럼 너도 좀 예쁘게 해, 말.”
“여기서 더 어떻게 예쁘게 하냐. 니 하는 짓이 안 예쁜데.”
해화는 낙조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뒤따라서 삽을 찾아 쥐었다.
“어딜 가려는진 알아?”
“밤이 언니가 어제 하는 말 들었어. 근처까지 변종이 왔을 확률이 높을 거라고.”
“넌 진짜……, 겁도 없다.”
“겁쟁이가 세상이랑 싸워서 어떻게 이기냐?”
해화는 인기척에 깨어난 개를 쓰다듬어 주고서 먼저 대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낙조는 그녀가 한 행동과 똑같이 개를 쓰다듬어 준 후, 그녀를 뒤따랐다.
동식이 걸어왔을 길이라 추측되는 길은 한 곳뿐이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차를 몰고 온 길도 그곳이었으니. 조금씩 좁아지는 길을 올라가면서도 주위를 깊게 살펴야 했다. 낙조는 자신을 앞질러 먼저 올라가는 해화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발목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답답하진 않을까,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두루 있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낙조는 그 기회가 어쩌면 지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안 답답해?”
“뭐가. 탁 트여서 공기도 좋구만. 머리도 자르니까 좋아. 가볍고―”
“발목.”
그제야 해화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일부러 그 대답을 회피하려고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려 했던 건지, 잠깐의 침묵이 꽤 길게 느껴졌다.
“한 번 볼래?”
새벽 공기가 해화의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그녀는 낙조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쪼그려 앉아 꽉 묶었던 붕대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말릴 틈도 주지 않았다.
마침내 드러난 해화의 발목엔,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많은 이파리가 자라 있었다. 피부 위로 돋은 혈관은 더 두꺼워졌고, 그 위에 자라난 잎사귀는 붕대 안이 갑갑했다는 듯 꼭 숨을 쉬듯 몸을 펴내는 것 같았다.
“자라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아.”
해화는 얇은 줄기들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낙조가 힘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한 시간과 같이, 해화의 시간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낙조는 그녀가 얘기하지 않고 침묵한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생각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까.
‘밤이 누나에겐 얘기하지 않았을까.’
낙조 자신에겐 밤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맡길 수 있고, 연우보다 긍정적인 사고로 자신을 일깨워주는 사람. 그러나 해화에게도 그녀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줄 수 있을까? 반대로, 해화가 밤이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맡길 만큼 밤이를 믿는 사람일까. 직접 당사자에게 묻기 전엔 알 수 없는 대답을 가만히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더 자라면, 할머니랑 할아버지께 드릴 거야.”
해화는 붕대를 다시 천천히 돌려 묶으며 말했다.
“우리가 계속 여기 있을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기면…….”
그녀는 붕대를 매듭짓고서 차마 말을 끝마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낙조는 해화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당장 떠오르는 말이 이것뿐이었지만, 이거라도 말해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낙조의 말에 해화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점점 차오르는 아침 햇살이 살갗을 감쌌다.
산 중턱쯤 올랐을까, 숨이 제법 차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둘은 혹시라도 변종이 흘렸을지도 모를 진액의 흔적을 찾아 여러 나무와 풀을 샅샅이 뒤졌다. 인간의 인기척이 없으면 정말 식물처럼 꼿꼿하게 서 있기만 하는 특성도 고려해야 했기에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고낙조.”
조금 멀리 떨어져 주변을 살피던 중, 해화가 낙조를 불렀다. 허리를 굽혀 나무 기둥을 훑어보던 낙조가 해화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쩐지 불길한 얼굴을 하고서 어떤 풀 하나를 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해화가 쥐고 있는 건 풀이 아니라 버섯이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냥 독버섯일까?”
해화는 곰팡이처럼 퍼진 녹색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가 쥔 곳은 유일하게 흰 뿌리 부분이었는데, 녹색으로 퍼진 곳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딱 조그마한 애벌레들이 기어 다닐 정도의 크기였다.
“바닥에 둬 봐.”
낙조의 말에 해화가 평지에 버섯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낙조는 양말에 바짓가랑이를 쑤셔 넣고선 신발로 버섯의 윗부분을 으깼다. 일반 버섯이라면 조금이나마 이물감이 들어야 할 텐데, 이 버섯은 꼭 개똥을 밟은 것처럼 죽, 하고 미끄러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고낙조, 발 떼! 발!”
동시에 해화가 곁에서 소리를 질렀다. 신발을 들어 보니 으깨진 버섯 안에 있던 녹색의 애벌레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있었다. 으깨진 부분엔 함께 짓눌린 애벌레도 몇몇 보였다. 낙조는 황급히 바닥에 신발 밑창을 문질러 닦았다. 곧이어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신호다.’
낙조는 직감적으로 그 냄새가 주변에 있을 변종에게 보내는 경고인 것을 눈치챘다. 냄새로 소통하는 변종이니 이만큼 직접적으로 닿는 냄새라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주변에 퍼지고 있을 터였다.
‘변종이 알을 깔 수도 있나?’
동시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보통 변이된 변종은 사람의 체내에 진액을 퍼부어 감염시킨다. 여태껏 봐 왔던 변종이 알을 까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알에서 나온 건 애벌레고, 애벌레가 변태한 이후의 모습은 식물이 아닌 곤충이 아닌가. 혼란스러움에 잠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큭, 키에에엑, 칵!”
무언가 수풀을 헤치며 낙조와 해화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해화는 두 손으로 삽을 꽉 쥐고서 뒤돌았다. 낙조 또한 숨을 고르며 낫을 움켜쥐었다.
곧 익숙한 모습의 변종 하나가 얼굴을 드러냈다. 변종의 얼굴은 버섯과 마찬가지로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구멍과 콧구멍, 입가엔 애벌레들이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이전에도 구더기가 변종의 몸에 들끓는 것은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이런 변종은 처음이었다. 구더기가 변종의 몸을 숙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아예 변종의 몸에서 새로운 개체가 등장한 것이다.
‘저것도 변이된 거라고 봐야 하나.’
애벌레 또한 보통 애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라나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밤이에게 남은 버섯 조각이라도 가져가 보는 게 좋을 듯했다.
“키에에엑, 키익.”
변종의 숨소리는 날이 잔뜩 선 칼날이 유리를 긁는 듯 듣기 거북했다. 변종은 비틀거리며 낙조 쪽으로 다가왔다. 공격할 모양새는 아니었다. 낙조가 낫을 앞에 두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변종은 으깨진 버섯 근처까지 다가오고서 코를 킁킁거렸다. 으깨진 냄새를 맡는 모양이었다.
“카아아악!”
곧 자신의 버섯이 뭉개졌다는 걸 알아챈 변종이 고개를 쳐들며 고함을 내질렀다. 가만히 변종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해화가 낙조에게 말했다.
“저거, 눈이 없어. 애벌레가 다 파먹은 거야.”
“뇌는 남아 있는 건가?”
“냄새를 맡는 걸 보면…….”
조용히 서로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속삭인 둘은 곧 변종이 코를 벌름거리며 두 손을 뻗기 시작한 걸 알아차렸다. 낯선 냄새를 따라 발을 뗀 변종은 가장 가까이 있던 낙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냥 죽여야 하나?”
“뭘 고민해?”
“버섯처럼 그냥 뭉갰다가, 주변에 다른 변종들이 또 몰려올지 모르잖아.”
냄새를 퍼뜨리지 않는 게 중요했다. 정말 자신의 추측대로 주변에 변종이 숱하게 깔려 있다면, 그것들을 몰고 마을에 돌아가는 꼴이 된다. 모두 해치우거나, 인기척이 그쪽까지 닿지 않게끔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낙조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비트는 변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런 대결 구도쯤이야 지겨울 정도로 몇 번이고 겪었다. 놈의 목을 잡아 꺾는 것,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녀석이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구조 신호라도 보낸다면.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낙조는 팔을 사용하는 대신 낫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변이된 몸에다가 아직 식별할 수 없는 생물에게 진압당한 몸이다. 피부와 뼈가 얼마나 물렁해졌을지 장담할 순 없지만 적어도 동식의 목을 벨 때보단 깔끔하게 잘라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낫을 고쳐 쥐고 천천히 자신에게로 손을 뻗어오며 범위를 좁히는 변종의 목을 노렸다. 그 시간에도 애벌레는 쉬지 않고 변종의 피부를 갉아 새 구멍을 만들고 지나다녔다. 토기가 울컥 치솟는 것을 참고서 숨을 멈췄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카악―”
변종의 손끝이 낙조의 옷자락에 닿자마자 낫을 휘둘렀다.
서걱.
툭.
“하아아악…….”
발밑에 떨어진 변종의 눈에서 애벌레가 쏟아져 나왔다. 벌어진 입에선 차마 다 끝나지 않은 비명이 연기처럼 흘렀다. 몇 번 움찔거리던 아래턱도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꼿꼿하게 서 있던 변종의 몸이 천천히 낙조 쪽으로 기울었다. 낙조는 숨을 겨우 풀어낸 후 몸을 옆으로 비켜 세웠다. 곧 낙조가 서 있던 곳으로 변종의 몸이 떨어졌다.
파사삭, 낙엽을 짓누르고 쓰러진 변종의 잘린 목에선 노란 진액이 흘러 나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얼굴 아래로 애벌레가 내려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는 땅에 떨어진 낙엽들 중에서 큰 것을 하나 골라 버섯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쓸어 담았다.
“가져가게?”
경악을 금치 못한 해화의 목소리에도 낙조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누나가 봐야 할 것 같아.”
“냄새를 따라오면?”
“…….”
“네 말대로, 주변에 더 있다고 하면, 이 냄새를 따라올 수 있잖아.”
가만히 해화의 말을 듣던 낙조는 변종의 한쪽 발을 잡고 길 쪽으로 끌고 나왔다. 돌과 모래뿐인 길에 변종의 몸을 내려두곤 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낙엽 좀, 조금만 구해 줘.”
낙조가 불을 붙이기 전 해화에게 부탁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선 또 다른 냄새가 필요했다. 해화는 한동안 말없이 변종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겨 불이 잘 옮겨 붙을 만한 낙엽들을 모아 왔다. 그녀가 변종의 몸 위로 낙엽을 뿌리자, 낙조는 주저하지 않고 불을 붙였다. 작았던 불씨는 곧 변종의 몸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까만 연기가 위로 치솟았다. 뼈까지 완전히 연소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걸 끝까지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가자.”
낙조는 몸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 진액과 불이 맞닿을 때 더욱 크게 불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말했다. 해화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햇빛이 가득 담겨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