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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57화 (57/202)

57화. 옛날 옛적에 (3)

“동식아.”

노인의 목소리는 쇠했지만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의 부름에 동식이 뻣뻣하게 허리를 폈다.

“나는 말이여, 니가 생전에도 안 다니던 교회에 있다고 혀서 수상혔다.”

“할아버지, 왜, 그러,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 저희도 살려고 간 건데…….”

“신평에 가짜 예수쟁이들이 깔렸담서. 나는 다 알고 있응께, 내 눈엔 니가 처자식 베리고 온 쌍놈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 말이여.”

주름이 겹겹이 쌓인 눈가는 평온했다. 노인은 동식을 애처롭게 응시하다가, 반대쪽 손을 들어 손짓했다. 자신 쪽으로 오라고. 완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동식이 도리질쳤다.

“할, 할아버지. 이 자식들이 뭐라고 했, 했길래 그래요! 왜, 왜 내 말, 은 안 믿어 줘요!”

“동식아, 내가 산 햇수만 팔십이 넘는다. 니가 거짓부렁을 얘기하는 것쯤은 안다는 말이여.”

노인이 쥔 낫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동식은 고개만 뒤흔들다가 주변을 살피더니 쏜살같이 현관 쪽으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낙조가 그의 뒤를 쫓아 뒷덜미를 붙잡았다. 동식은 덫에 걸린 짐승마냥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낙조의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살갗을 꿰뚫을 것처럼 단단하게 쥔 목덜미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애처롭게 떨렸다.

“놔, 놔! 이 개새끼야!”

“제 발로 죗값 치르러 온 거 아니었어?”

낙조는 동식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곤 그를 질질 끌고 노인의 앞으로 갔다. 마루에 내동댕이쳐진 동식은 바닥을 더듬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려고, 살려고 한 게, 왜 죄가 되냐고요. 나도, 살고 싶어서, 어흐흑, 그런 건데…….”

“그런다고 지은 죄가 사라지냐, 동식아.”

노인은 그의 이름을 친절하게도 불러 주었다. 그러나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서 더 넓은 아량을 구할 순 없었다. 노인이 동식의 손목을 억세게 붙잡고서 잠시 고개를 들어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동식과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눈빛을 모두 쓰다듬는 것처럼, ‘괜찮다’라고 말해 주는 시선 같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피를 보이고 싶진 않았는지 노인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동식을 끌고 마당 밖으로 나갔다. 낙조는 혹여 그 짧은 사이에 동식이 변이되어 노인을 공격하진 않을까 싶어 서둘러 그들을 뒤따랐다.

“콜록, 할아버지, 할아버지! 윽, 놔, 놔줘요!”

“…….”

“할아버지, 내, 내가 아니라, 저 고낙조, 고낙조 저 자식을, 신고해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그래야 할아버지랑 할머니 두 분 다, 좋은 곳에서, 안전하게―”

“―동식아. 아직도 모르겠는겨? 니가 오기 전까지는 조용혔다. 그리고 안사람이랑 나는 여를 떠날 생각이 없어야. 그렁께, 지발 좀 조용히 혀라.”

텅 빈 닭장들이 왼쪽 길목에 버려져 있었다. 노인은 그 앞에서 동식을 무릎 꿇렸다. 동식의 호흡은 집에 있을 때보다 더욱 거칠어져 있었다. 낙조가 뒤따라온 것을 본 노인은 낫을 동식의 뒷목에 걸치고서 말했다.

“눈깔 돌아가는 거 뵈면 바로 썰 텡께, 걱정 말그라. 고통도 없을 거여.”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저한테, 저, 저……, 우웩, 우으엑.”

거친 호흡 사이로 말을 뒤죽박죽 끼워 넣던 동식이 순간 구역질을 했다.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건 탁하고 노란 진액이었다. 끊어지지 않고 길게 늘어지는 진액을 내려다본 동식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르신, 저한테 맡기세요.”

아무리 다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낙조 자신은 모르는 둘 사이의 감정이 있을 테다. 낙조는 노인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동식은 변이가 진행되고 있는 중인 게 확실했다. 더 시간을 줘 봤자 노인의 고민만 길어질 뿐이었다. 노인은 가라앉은 흙탕물 같은 눈으로 낙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농기구 다룰 줄 알어?”

“……그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잡초 뽑아 봤어?”

“……어르신.”

왜인지 노인의 손에는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 다가서며 노인을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낫에 목에 걸린 채 동식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식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노인뿐이었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서 왼손으론 동식의 머리채를 잡고, 낫을 크게 휘둘렀다.

“키아아아악!”

동식의 두 손이 노인을 향해 달려들기도 전이었다. 반쯤 잘리다 만 동식의 목이 낫에 걸렸다. 뼈를 완전히 으스러뜨리기엔 힘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잘린 부위에선 피와 진액이 뒤섞여 허공으로 치솟았다. 노인은 몸을 뒤로 한 발자국 물러 세운 채 피부에 박힌 낫을 겨우 빼냈다.

“칵, 캬악, 카아아악…….”

동식은 더 이상 인간의 말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노인의 옷을 붙잡고 늘어졌다. 노인이 든 낫이 잠시 주춤거렸다. 낙조는 차마 끝까지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결국 노인에게 다가가 낫을 빼앗았다. 낫을 어떻게 쥐는지도 몰랐고 노인이 잡초를 뽑아 본 적이 있느냐 물은 이유도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란 것만 알았다.

동식의 뒤통수를 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낙조는 힘이 단단히 실린 오른손으로 낫을 쥐고 덜렁거리는 동식의 목을 내리쳤다. 노인이 기구를 다룰 줄 아느냐고 물었던 이유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아무리 잘 갈려 있다고 해도 신체를 분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와 진액이 바닥을 뒤덮었다. 낙조는 노인에게 진액이 튀지 않도록 길가 밖으로 동식의 몸을 끌고 나와 목을 베었다. 마침내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을 때, 동식의 비명은 아주 천천히 멎어갔다. 완전히 신경이 죽지 않은 두 눈이 깜박이고, 곧 그대로 멈췄다. 흰자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욕봤네.”

노인이 낙조에게 조용히 걸어와 말했다. 낙조는 그제야 쥐고 있던 동식의 머리를 떨어뜨렸다. 머리는 길의 경사를 따라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진액과 피가 그 흔적으로써 남았다.

“어여 들어가.”

“……어르신은요.”

“동식이 묻어 주고 갈 거여.”

“저도 돕겠습니다.”

“…….”

한참 말없이 낙조를 바라보던 노인은 창고에서 삽을 꺼내왔다. 바깥소식이 궁금했는지 해화가 대문 문턱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낙조는 해화에게 들어가라 손짓하고서 멀리 굴러간 머리를 줍기 위해 발을 옮겼다.

「살려고, 살려고 한 게, 왜 죄가 되냐고요. 나도, 살고 싶어서, 어흐흑, 그런 건데…….」

‘내가 이곳까지 그냥 데리고 왔다면 안 죽지 않았을까.’

낙조는 동식의 머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생각했다. 뒤로 노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감기지 못한 동식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어르신은 왜 저를 믿으셨어요?”

“니도 나처럼 살아 보면 알 거여. 그짓말을 허는지, 참인지.”

“틀릴 수도 있잖아요.”

“내가 틀렸냐?”

“……아뇨.”

노인은 낙조에게 동식의 몸을 끌고 오라 말했다. 그는 동식의 머리와 삽을 들고 산길을 올랐다. 길 곳곳에 무덤이 한두 개씩 덮여 있었다.

“동식이가 괴물이 안 되었어도, 나는 니 신고할 생각 읎었다. 그딴 식으로 살 생각 허지도 않았어.”

낙조는 묵묵히 노인이 가리킨 곳의 흙을 팠다. 어쩐지 눈가가 시큰거리는 게, 밤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 이처럼 무한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세상에 아직 속해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 깊은 곳을 찔러 댔다.

*

흙투성이가 되어 노인과 집에 돌아왔을 땐 정각이 다 된 시간이었다. 모두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낙조와 노인을 맞이했다. 노인은 말없이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간 이는 셋이었으나 돌아온 이는 둘이었다. 어렴풋이 짐작만 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상황이 흘러갔는지 다들 아는 눈치였다.

“니가 참말로 고낙조여?”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씻을 차례를 기다리는데, 가만히 거실에 앉아있던 노인의 아내가 물었다. 낙조는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는 눈을 천천히 굴렸다. 그녀는 똑같이 벽에 시선을 둔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예.”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갈라진 입술을 열고 대답했다. 노인의 아내는 ‘그렇구만.’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곤 뒷짐을 진 채 절뚝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곧 노인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어여 씻으라.”

“……어르신. 만약에 신고하시게 되면, 같이 온 친구들은 살려 주세요.”

“…….”

“애초에 아는 사람들 아니었으니까요.”

노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어 놓고 몸에 묻은 먼지를 씻어 냈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먼지덩이들을 내려다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꽤 오랫동안 잘 참았다고 생각한 감정이 봇물 터지듯 올라왔다. 낙조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고서 입을 막았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뜨거운 물과 함께 눈물이 섞여 내려갔다.

무흠과 병사들이 함께 있었을 때, 몰아치는 감정에 못 이겨 당신들은 무섭지 않으냐고 몰아친 밤이 떠올랐다. 그때는 모두가 웃으면서 그랬더랬다.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진동휘도 약속했지. 그런 사람도 이제는 곁에 없다.

남은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낙조는 고개를 숙인 채 허겁지겁 숨을 삼켜가며 생각했다. 자신의 팔에 깃든 힘은 축복이 맞을까? 과연 선택받은 현실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청주에 스스로 가는 것이…….

“고낙조, 고낙조, 안에서 잠들었어?”

밤이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낙조는 뒤늦게 고개를 들고서 목을 얕게 가다듬었다.

“거의 다 씻었어요.”

“빨리 나와. 나도 쓰게.”

“네.”

울었던 흔적을 보이고 싶진 않은데. 낙조는 수건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젖은 머리로 얼굴을 조금 가린 후 문을 열고 나가자, 밤이가 그 앞에 그대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낙조는 그녀를 옆으로 피해 거실에 깔린 이부자리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가서 얘기 좀 하자.”

화장실을 쓰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는지, 밤이가 낙조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이미 거실에 누워 있던 지운과 눈이 마주쳤다. 지운은 고요했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낙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낙조는 하릴없이 밤이의 손길에 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 사람, 완전히 변했어?”

“……네.”

“그럼 여기로 오는 도중에 물린 게 맞는 거고, 감염 속도가 늦다고 하더라도 이 근처에서 물렸다고 봐야겠네.”

“무슨 생각이에요?”

“내일 동 트는 대로 주변을 좀 봐야지. 어르신들 계시는데 이쪽까지 내려오면 안 되잖아.”

“제가 혼자 다녀올게요.”

낙조의 목소리는 곧 바스라질 낙엽처럼 희미했다. 밤이는 낙조의 대답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 힘겨워 고개를 떨어뜨렸다.

“왜 너는 자꾸 혼자 다 하려고 들어?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어? 너가 뭐라도 된 거 같냐고.”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너한테 목숨이라도 맡겨 놨냐? 때 되면 죽는 거지, 말이 많아. 진짜 짜증나게.”

“누나.”

“너는 안 죽는다는 법 있어? 너도 죽을 수 있는 거야. 너는 어떻게 살아남을지 생각이나 해. 누구 죽을 때마다 지금처럼 죽상하고 이상한 생각이나 하지 말고.”

밤이는 날카롭게 말하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시골의 밤바람은 아릴 정도로 찼다. 막 씻고 나온 살갗을 할퀴는 바람에 낙조는 잠시 후 불 꺼진 거실로 들어섰다. 아직 잠들지 않은 지운이 낙조를 불렀다.

“아저씨, 배 안 고파?”

지운이 베개 밑에 손을 집어 넣더니 약과가 든 봉지 두 개를 낙조에게 건넸다.

“저녁 안 먹었잖아.”

“너 먹어.”

“나는 아까 엄청 많이 먹었어. 할머니가 주셔서.”

속삭거리는 지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낙조는 자리에 눕기 전 머뭇거리다가 하나를 받아 봉지를 뜯었다. 고소한 약과 냄새가 풍겼다.

“아저씨는 갈수록 용감해지는 것 같아.”

“……나?”

“처음엔 좀 우유부단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야무지달까.”

“어디 아퍼? 무슨…….”

낙조는 약과를 조금씩 우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지운은 그럼에도 꿋꿋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같이 강해지는 느낌이 들어. 진짜 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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