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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56화 (56/202)

56화. 옛날 옛적에 (2)

삼박골의 저녁은 일찍 찾아왔다. 시골이라 그런지 해가 무척이나 빨리 졌다. 각자 씻고 나오니 이미 어둠이 완전히 깔린 상태였다. 노인은 장롱에서 세월의 향을 그대로 담은 이불을 꺼내 주었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하는 행동처럼, 그는 별말 없이 자연스럽게 일행이 잘 곳을 정해 주었다.

부엌에선 노인의 아내가 약을 먹고 있었다. 해화가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할머니, 약은 넉넉하세요?”

“……이제 을마 없어. 어쩌것어. 참어야지.”

그녀는 뒷짐을 진 채 느린 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곧 노부부 방의 불이 꺼졌다. 거실에 깔린 이불에 누운 낙조와 지운은 천장을 올려다본 채 눈만 껌벅였다.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

“……괜찮으실 거야.”

지운이 문득 중얼거렸다. 낙조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처음 지운과 해화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평택에 두고 온 오토바이도 생각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좋을 일들이 다반사였다.

“아저씨는 뭐, 그리운 거 없어?”

“그리운 거?”

“나는 피씨방도 가고 싶고, 첫차 올 때까지 술도 마시고, 감자탕도 먹고 싶고……, 할머니 집에서 드라마도 보고 싶은데.”

지운은 낙조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기보다 그간 참아 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들은 대부분 낙조도 그 나이에 즐겨 하던 일들이었다.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르면 다르고, 비슷하면 얼마나 비슷하겠냐만 막상 남의 입으로 자신의 추억을 들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길고양이들……, 밥 줘야 하는데.”

낙조의 목소리는 연기처럼 뿌옇고 희미했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에 지운이 ‘뭐라고?’하며 되물었다. 낙조는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을 깜박이면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집 근처 길고양이들 밥 주고 다녔는데, 걔네들은 잘 있으려나.”

지운이 말을 듣고 낙조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아저씨가 은근히 보면 정이 많다니까.”

“날 어떻게 보고 다녔으면 그런 말이 나오냐?”

“나쁘게 본 거 아닌데. 솔직히 아저씨가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잖아.”

지운의 말은 어딘지 손이 닿지 않는 마음 어딘가를 쿡 찌르는 듯했다. 낙조는 대답 없이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뒤를 잇고, 지운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있지. 처음 만났을 때랑 좀 많이 바뀌었어.”

“어떤 게.”

“백 중사님이랑 헤어지고 나서부터, 더 든든해졌다고 해야 하나.”

“…….”

“내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 나? 아저씨랑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거.”

“어.”

“나 구하러 누나랑 왔을 때, 그때 아저씨 보자마자 안심이 되더라고.”

지운의 말이 과연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른다. 얼떨결에 가진 능력에 점점 익숙해진다고 해서 그게 긍정적인 결과를 계속해서 가져올 수 있을지는 낙조 자신도 알 수 없으니까. 다만 지운은 장난기 하나 묻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토해 냈다. 맘속에 꽤 오랫동안 가둬 두었을 말을 듣고 있자니 함부로 등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나 졸리다, 잘게, 아저씨.”

낙조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낙조는 결국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거실엔 밖으로 곧장 통하는 문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서 마루에 앉아 새카만 산등성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고추 마저 따야 허는디 같이 갈겨?”

노인은 아침을 먹자마자 밭에 나가겠다고 했다. 지운은 맑은 목소리로 따라 나서겠다고 했다. 노인은 지운 하나면 충분하다며, 낙조에겐 다른 일을 부탁했다. 참깨를 솎아내는 일이었다.

마당에 큰 돗자리를 펴고서 이파리와 섞인 깨를 바구니에 담아 손을 털 듯 가볍게 털어 준다. 돗자리 위로 떨어진 것들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또 한 번 걸러낸다. 마지막으로 선풍기 바람을 사용해 완벽하게 참깨만 고른다. 태양열 에너지를 쓰고 있었기에 전기 문제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근데 저 태양열, 저거는 어떻게 아시고 설치하셨어요?”

쪼그려 앉아 골라낸 참깨를 봉투에 담던 밤이가 물었다. 노인의 아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답했다.

“나라에서 해 준다고 허길래. 첫째가 신청허라고 혀서 한 거여.”

그녀는 구부정한 허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제자리에 꽤 오래 앉아 있음에도 아프다는 말 한 번 하지 않았다. 가을 땡볕에 모두가 땀을 조금씩 흘릴 때쯤이었다. 해화가 컵 세 개에 찬물을 받아왔다. 마루에 나란히 앉아 물을 들이켰다. 개는 개집에 들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 고요함이 햇빛보다 더 따갑게 살 속을 파고든다. 금방이라도 뒷산에서 변종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진 않을지 염려된다. 아니면 고추밭에 나간 노인과 지운이 피범벅이 되어 뛰어오는 것은 아닐까, 상상을 한다. 낙조는 물이 맺힌 컵 바깥쪽을 어루만졌다.

“참 마을이 조용하고 좋네요.”

“원래는 더 많이 살았는디, 다 죽고 읎어.”

“할머니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 가만 있어 봐라, 이제……, 여든 둘.”

밤이는 다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노인의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참깨도 다 털었겠다, 고추를 다 따고 돌아올 노인과 지운을 기다리며 텅 빈 마당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늬들은 언제까지 있다 갈겨?”

노인의 아내가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밤이도 이번엔 선뜻 나서서 대답하지 못했다. 낙조는 어느새 자란 손톱을 내려다보면서 대신 입을 열었다.

“곧 갈 거예요. 걱정 마세요.”

“아니……, 군인들 올 때까지 있어도 괜찮혀.”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 낙조의 손톱을 바라봤다가 안에서 손톱깎이를 들고 나왔다. 주름이 겹겹이 쌓인 작은 손이 낙조의 손을 붙잡았다.

“할머니, 제가 해도 돼요.”

“손톱은 바짝 깎아야 혀. 그래야 때가 안 끼니께…….”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낙조의 손톱을 하나씩 천천히 깎아 주었다. 또각, 또각, 손톱깎이에 짓씹히는 손톱이 마룻바닥 위로 떨어졌다.

발자국 소리가 마당 밖에서부터 가까워졌다. 노인과 지운이리라 생각했다. 곧 그림자가 먼저 대문 문턱을 넘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된 순간, 지운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마당에 발을 디뎠다.

“동식이, 동식이 아니여?”

낙조의 손톱을 깎아 주던 노인의 아내가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지운과 노인 사이에 끼어서 들어오는 이는, 어제 길가에 억지로 내리게 한 남자였다.

그도 이렇게 마주칠지 몰랐는지 일행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운은 말없이 고추가 든 봉투를 창고 옆에 내려놓았다. 노인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난 저녁에 신평과 사이비 종교에 대해 얘기한 걸 노부부는 기억하고 있을까. 낙조는 섣불리 무어라 말하지 않고 분위기를 살폈다.

“신평에 사는 놈이여. 혼자서 여까지 걸어왔다는구만.”

“…….”

동식과 일행의 시선이 사납게 맞붙었다. 동식은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고개를 돌렸다. 노부부 앞이었기에 함부로 큰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걸어온 게 맞긴 할까. 일면식이 있는 건 노부부와 같지만 그간의 행적이 다르기에 의심부터 품을 수밖에 없었다.

“홍지운, 뭐야.”

동식이 노인의 아내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고, 해화가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고추밭에서 만났어. 혼자 산길을 내려오더라.”

“저 사람이 뭐라고 안 했어?”

“아내랑 자식들은 교회에 있고, 자기는 먹을 걸 찾으러 나왔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하더라.”

“하…….”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운이 텅 빈 눈으로 줄줄이 대답하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안색이 창백해.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은 뭔가 달라.”

“……감염됐나?”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지운의 말에 밤이가 조심스럽게 마루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말은 하지 않아도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노부부의 일상을 깨뜨리는 짓을 눈앞에서 벌이지는 말자고. 낙조는 밤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동식이란 남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운의 말대로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입술도 파랗게 질려 있었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동식아, 그럼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 거여?”

“어, 네. 꽤, 꽤 큰 교회라서요.”

“그려……. 근디 왜 이리 떨어싸.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여?”

“벼, 변종들, 피해서, 피하다 보니까, 좀, 놀랐나 봐요.”

낙조는 소파 옆 바닥에 앉아 가만히 동식을 관찰했다. 자켓까지 입어서 겉으로 보기엔 물린 곳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동식은 노인의 아내와 대화하면서도 낙조가 신경 쓰였는지 종종 곁을 힐끔거렸다.

“갈 땐 어떻게 갈라고잉.”

“아, 그, 그……, 할머니, 센터에서 한, 방송은, 들으셨어요?”

“변종 잡는다고야? 아이, 들었지.”

순간 동식이 낙조를 홱 돌아보았다. 어쩐지 흔들리는 눈빛은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보였다. 동식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척하던 밤이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정적이 돌았다. 노인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올 때까진 말이다. 그는 동식에게 플라스틱 컵을 쥐어주었다.

“좀 마셔. 오는데 고생했을 거인디.”

“감, 감사합니다.”

컵을 든 손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떨렸다. 노인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는지 막걸리를 반만 따라주고서 물었다.

“근디 어디 아픈 거여?”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커헉!”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식이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재빠르게 손으로 입을 막아 분비물이 튀지는 않았지만 보통 감기에 걸린 사람이 하는 기침 소리 같지는 않았다. 반밖에 따르지 않았던 막걸리가 몸의 움직임에 흘러 넘쳤다. 잠시 정적이 돌았다.

“당신―”

“―니……, 어디 물린겨?”

밤이가 입을 떼자마자 노인이 조용하게 물었다. 노인의 머리 위로 비치는 백열등 불빛이 얼굴을 까맣게 태웠다. 노인은 허공에 들고 있던 막걸리 병으로 동식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며 다시 한번 물었다.

“대답혀. 물렸냐고.”

동식은 고개만 숙인 채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낙조는 모두의 시선이 동식에게로 쏠린 상태에서 험악해지는 듯한 분위기에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때 동식과 낙조의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이었다.

“저, 저 놈이 물었어요! 저 자식이 방송에 나오던 놈이에요. 고낙조, 고낙조라고요!”

동식이 낙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순간 노인의 고개가 낙조 쪽으로 돌아왔다.

“변종, 변종인데 사람인 척하는 놈 맞아요. 저희 교회에 들렀을 때 제가 다 봤어요. 저도 데리고 가달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버리고 간 놈들이에요. 이 자식들!”

동식이 말을 우다다 뱉어 내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노인의 아내는 조용히 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저, 전 근데, 근데, 안 변했어요. 물린 지 한참, 한참 됐는데…….”

“어딜 물린겨?”

노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동식은 그 물음에 허겁지겁 자켓의 지퍼를 내리고 셔츠의 목 소매를 늘려 쇄골을 보여 주었다. 움푹 파인 잇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아닌, 노란 진액이 고여 있는 것도. 보였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상처를 내려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소리, 그를 반가워하는 개가 짖는 소리, 창고 문을 여는 소리……. 모두가 숨죽인 채 동식과 낙조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거실과 마루를 연결하고 있는 중문이 벌컥 옆으로 열렸다.

노인은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의 손엔 큰 낫 하나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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