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인간은 죄목 없이 살지 못한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직접 겪었던 시간의 경험에서 직감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낙조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서로 대화가 오갈 만큼만 목소리를 키웠다.
“목적이 뭡니까.”
“목적이야 단순하지. 알고 물어보는 건가? 우리가 서로를 먼저 알아본 것처럼.”
신주의 목소리엔 울림이 있었다. 그렇게 높지도, 아주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하여금 안정감을 주었다. 말투 또한 차분했다. ‘먼저’ 알고 있다는 것만이 께름칙했다. 낙조는 차를 한 번 돌아봤다. 어떤 대화가 오갈지는 몰라도 일행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대화를 하고 싶은 건 아니죠?”
“대화는 너무 오래 걸려. 널 말로 설득할 기회는 이미 잃었고.”
낙조의 생각이 맞았다. 신주는 소매를 걷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움직일 생각은 아직 없는지, 핏줄이 불거선 팔뚝을 보이기만 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죽기 직전엔 당신한테 살려 달라고 할 것 같습니까.”
“순식간에 죽음을 눈앞에 두는 방법은 별로 좋지 않아. 죽을 듯 말 듯 오락가락한 고통을 느껴야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나를 잡을 계획치고는 거창하지 않네요.”
“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부분이 있군. 너는 그렇게 특별한 놈이 아니야.”
신주는 말을 마치고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겨우 손바닥 크기만 한 정도였지만 칼날은 아주 예리해 보였다. 그는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어 자세를 갖춘 채 낙조가 먼저 뛰어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변종에게 물린 돌연변이가 맞는 건가? 변종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거면…….’
낙조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살을 뚫고 나온 이파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변종이 퍼뜨리는 바이러스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모양으로 변이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낙조도 이파리를 꽉 웅크린 채 눈을 부릅떴다.
“그건 볼 만 하구나. 소문보다 꽤 괜찮은걸.”
신주가 낙조의 변한 오른손을 보고 중얼거렸다. 낙조는 애써 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 손가락을 움직여 이파리를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신주는 묘한 웃음을 짓더니 낙조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너무 어려운 결정은 내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는 어떻게 될지 다 알고 있어.”
그의 말은 무거운 쇠사슬이 발목을 얽맨 것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변종의 움직임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는 말을 토대로 한다면, 자신이 고안해내는 공격도 얼추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낙조는 신주가 뿜어내는 위압감을 고스란히 견뎌 내면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떠냈다.
“이 동네 온 후부터 계속 생각한 건데.”
헤드라이트에 기댄 그림자가 저 멀리 늘어졌다. 낙조는 걸음을 멈춘 신주를 향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당신들은 말이 너무 많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낙조가 팔을 휘둘렀다. 붉은 잎맥이 혈관처럼 펄떡거렸다. 먹잇감을 찾은 맹수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림에 지치는 건 백기를 드는 일이다. 낙조의 단단한 오른팔이 허공을 휘젓고 신주의 어깻죽지 위로 날아갔다.
“빠르군.”
신주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피했다. 낙조의 몸과 가까워졌을 때 공격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지만, 속도와 힘이 빠르고 세서 몸을 피하는 데에만 신경을 써야 했다. 그는 엷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신주 같은 작자의 칭찬은 필요 없었다. 낙조는 대답 없이 바닥에 꽂힌 주먹을 다시 들었다.
왼쪽, 왼쪽, 오른쪽……. 신주가 몸을 피할 때마다 양쪽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에 조금씩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시멘트 부스러기가 잎사귀에 묻어 나왔다. 낙조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신주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불빛이 불안하게 깜박거리는 가로등 아래로 천천히 신주가 몰렸다.
퍽, 쾅!
신주는 나이에 맞지 않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또 한 번 낙조의 주먹을 피했다. 무리에게서 빼앗은 권총이 있긴 했지만 이 총알마저 간파할 수 있었기에 일단 최대한 몸으로 밀어붙여 봐야 했다. 가로등의 중앙에 꽂힌 낙조의 잎사귀는 이미 많은 상흔을 달고 있었다. 너덜거리는 잎맥 사이로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생각을 읽는 건 아니야.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도 아니야.’
낙조는 잠시 가만히 서서 신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주는 아직까지 낙조에게 한 번도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는지도 낙조에겐 꽤 중요했다.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와 싸워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냄새인가?’
그때 낙조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변종의 바이러스를 가진 이에게 포함되는 공통적인 감각. 후각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낸다면, 자신에게도 전략이 생길 수 있었다.
‘내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거라면…….’
잎사귀가 내뿜는 냄새를 제거하거나 다른 냄새로 덮어씌워야 했다. 잎사귀를 숨긴다고 해도 자신의 정체가 숨겨지는 것은 아니니 손을 원래대로 되돌릴 필요는 없다. 낙조는 체향을 덮을 만한 냄새를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순간이었다. 낙조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옮겨가자마자 신주가 단도를 들고 높이 뛰어 올랐다. 낙조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급하게 오른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흐압!”
“윽……!”
날카롭고 얇은 것이 잎맥을 반토막 낼 것처럼 무섭게 낙조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뼈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칼날은 상당히 깊게 박혔다. 신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으면서 단도가 빠지지 않도록 위에서 아래로 무게를 주어 내리눌렀다.
“흑, 윽…….”
숨을 참으면서 낙조가 왼손으로 신주의 한쪽 손목을 붙잡았다. 그나마 이 자와 대립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는 건 힘 차이 때문이었다. 신주는 남들과 다른 능력은 가졌어도 힘은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쓰는 힘보다 몇 배는 끌어올릴 수 있는 낙조와는 비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온힘을 주어 신주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위로 꺾으니, 그는 곧 고통스러운 신음을 잇새로 흘렸다. 단단히 단도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던 한쪽 손목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 이, 놈……!”
핏발까지 선 두 눈을 뜬 신주가 괘씸하다는 듯 낙조를 노려보았다. 낙조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신주의 손등이 팔에 닿을 정도로 완전히 꺾어 버렸다. 그제야 그는 단도에서 손을 떼어 냈다. 일그러진 관절에 신주의 오른손은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낙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단도를 자신의 손목에서 빼냈다. 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온몸이 서늘해졌다.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이러면 동점이죠.”
낙조가 말을 마치고 자신의 피가 잔뜩 묻은 단도를 저 멀리 내던졌다. 댕강, 칼날이 바닥에 뒹구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말귀를 못 들어먹는 건지, 태생이 그릇된 건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조금은 알 법 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외우고 있는 신 이름 같은 게 지금 상황에선 하나도 도움 안 된다는 거.”
낙조도 봐주지 않았다. 깊게 파인 상처의 틈에서 투명한 진액과 뒤섞인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신주는 그 모습을 보고 비릿하게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낙조는 애써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금니를 악문 채 입술까지 안으로 깨물었다. 신음 하나 새어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신네들한테도 주기도문 같은 거 있을 거 아냐, 맘껏 읽어 봐요. 어디 한 번 보게, 나도. 은혜나 구원이라는 게 어떤 건지 좀 구경합시다.”
“나는, 나는……! 선택 받은 자다. 세상이 무서워하는 괴물들의 주인이라고.”
“그럼 뭐 해. 나는 당신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오른팔에선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일찍 싸움을 끝내지 않는다면 불리할 수도 있었다. 저쪽에도 비슷한 상처를 내거나 상대를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낙조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감춰두었던 권총을 왼손으로 꺼내 쥐었다. 웬만해선 총알을 아끼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참고 참았지만, 이 이상으로 시간을 끄는 게 오히려 불합리하다는 결론이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총구를 정확히 신주의 머리에 두니,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의 그 징그러운 힘도 다 받아 낸 나한테 총을 쏴서 뭐하겠다고! 나는 변종에게 물리고도 살았어!”
“그게 바로 당신이 선택받은 자도 아니고, 신 같은 것도 아니란 증거야. 정말 나를 이길 수 있었다면, 화 같은 건 내지 않겠지. 내가 당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았을 테고.”
“닥쳐라, 닥쳐라, 닥쳐, 이 벌레만도 못한……!”
오래 살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겪는 사회생활에서 배운 게 몇 가지 있다. 열등감에 찌들어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이가 의도치 않게 힘을 얻었을 땐 반드시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내뱉는다는 것. 자신의 어떤 점이 부족한지 알기 때문에 투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주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하고 맨몸으로 낙조에게 달려들었다. 낙조는 당장 방아쇠를 당길까, 하다가 몸을 옆으로 피했다. 저런 유형의 인간은 어떻게 밟아 줘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변종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불사가 되는 게 아니야. 이 세상에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당신 생각보다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싸우기 직전 신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부분이 있군. 너는 그렇게 특별한 놈이 아니야.」
낙조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특별하지 않다는 건 때때로 주목을 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해 준다. 지금까지도 이색적인 면 없이 잘 살아왔다. 나 자신을 깎으면서까지 돌보고 싶었던, 지킬 사람이 없었을 뿐.
다만 지금은 지켜 내야 할 사람이 있다. 지켜 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하고.
피 냄새가 진득하게 자신의 온몸을 덮었다고 생각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온몸을 타고 퍼졌다. 낙조는 남자의 머리에 겨누었던 총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올바른 방법이 아닌 듯했다.
“살려면, 머리를 쓰셔야죠.”
단도를 멀리 던진 게 조금은 아쉬웠다. 낙조는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피범벅이 된 오른손을 휘둘렀다.
“억!”
예상대로 신주는 낙조가 일부러 흘려 덮은 피 냄새에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대로 턱을 맞고 넘어진 신주가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가 너 하나를 못 죽일까 봐…….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은 지났어.”
그는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곤 작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거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죽인 목소리에 가까이 있던 낙조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쪽으로 몰려오는 수십 개의 발소리에 낙조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당신 정체가 탄로 나도 상관없다 이거지.”
“그 전에 고낙조 네 놈이 죽을 거야.”
신주는 당당하게 말했다. 가까운 곳에서 ‘신주님! 신주님!’ 하고 그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권총을 꺼내는 대신 피에 흠뻑 젖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 뜯기고 긁힌 잎사귀였지만, 여전히 붉은 잎맥은 형형하게 색을 내뿜고 있었다.
“고낙조!”
해화의 목소리였다. 낙조는 고개를 들어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해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 묻은 얼굴을 하고서 낙조를 응시했다.
“누나는?”
“정신 차렸어. 조금만 더 있으면……, 홍지운이랑 내가 뒤 볼 테니까―”
“―내가 할 수 있어. 딱 한 명만 잡으면 돼.”
“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해화를, 낙조는 가만히 바라보다 엷게 웃었다. 그리곤 눈을 살짝 감고 호흡했다. 발끝에 몰린 힘까지 위로 끌어 모았다. 혈관을 타고 피와 함께 온몸의 힘이 한곳으로 모여 들었다.
투둑, 툭. 툭…….
이미 두꺼웠던 잎사귀 사이사이로 줄기가 하나씩 피어났다. 피를 맘껏 흡수한 식물은 붉은 잎맥을 사납게 비추면서 단단한 줄기를 자랑했다. 곧 마지막으로 피어난 잎사귀가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꼭 눈이 달린 것마냥, 맨 꼭대기에 달린 이파리는 낙조의 앞에 선 신주를 내려다보았다.
낙조와 신주, 그리고 차를 둘러싼 신도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놓고 제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풍기는 진한 피 냄새에 구역질을 하거나 코를 막았다. 몇몇은 공포에 질려 토를 했고, 또 몇몇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갔다. 신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 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당신들이 직접 보세요. 신주가 어떤 사람인지.”
낙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굵은 줄기로 신주의 목을 감싸 허공에 들어올렸다. 손으로는 감히 잡지도, 뗄 수도 없는 굵기에 신주는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켁켁거렸다.
“살, 살려, 컥, 살려 줘, 어억…….”
“변종에게 물렸지만 감염되지 않았을 뿐, 변종이 가진 감각은 그대로 받은 놈이에요. 그걸 이용해서 당신들을 갈취한 거고.”
“껙, 억, 끅…….”
“청주에 있는 센터에 신고하세요. 항체 보균자라고.”
말을 끝마치고서 낙조는 신주를 신도들 앞에 내던졌다. 핏자국을 잔뜩 묻힌 신주는 콜록거리며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십 개의 눈빛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가자.”
낙조는 원래대로 돌아온 팔의 상처를 감싸 쥐며 차에 올라탔다. 곧 시동이 다시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