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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53화 (53/202)

53화. 악마가 나를 선택하였으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서리처럼 떨어졌다. 한기에 떠는 것처럼 낙조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남자의 몸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진동이 다리로 고스란히 전해져 올 정도였다.

“저, 저 시키는 거 다 했잖아요!”

남자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낙조는 일말의 동정도 하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매섭게 내려다보았다.

“아직 다 안 끝났어.”

“살려, 살려만 줘요. 진짜 할 수 있는 건 다 할 테니까……!”

“우리가 타고 왔던 차는 어디에 뒀어.”

낙조는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질문했다. 주도권의 흐름을 잡은 이상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알아내야 했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급하게 입을 떼어 냈다.

“주차장이 있어요. 기름이 남거나 쓸 수 있는 배터리 있는 차들 모아 놓는 곳에, 아마 거기에 뒀을 거예요.”

“차 키는?”

“그건 신관들이 관리해요. 저희는 명령 받아서 어디 나갈 때만 탈 수가 있어서…….”

거짓말은 아닌지 대답이 술술 나왔다. 이들이 마을의 어느 정도를 점령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역으로 당하기 전에 빠져나가는 게 중요했다. 낙조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친 채 고민에 빠졌다. 주차장의 위치를 아는 남자와 해화를 붙여 보내기엔 리스크가 컸다. 남자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키는 여기 있어.”

지운이 한숨을 내쉬면서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엔 익숙한 키가 들려 있었다.

“아까 집에 있을 때 챙겼어. 고맙지?”

그런 정신이 언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낙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이 한참 필요한 나이이니까.

‘……그럼 다 같이 움직이면 되잖아.’

꽉 가로막혔던 생각이 단번에 트였다. 밤이는 자신이 업고, 해화가 지운을 부축한다고 해도 공격할 손이 모자라는 건 아니었다. 주차장이 이곳에서 거리가 꽤 되지만 않는다면 성공할 확률은 충분히 있었다. 낙조는 남자에게 말했다.

“주차장으로 안내해.”

그리곤 총구를 내려놓지 않은 채로 밤이에게 다가가 그녀를 업었다. 해화는 숨을 고르게 쉬면서 지운을 부축했다. 지운의 안색은 전보다 많이 나아져 있었다. 조금만 더 휴식을 취한다면 컨디션을 회복할 듯 보였다.

“…….”

키가 있다고 말했을 때부터 남자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리라곤 예측하지 못한 걸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낙조는 남자의 뒷목에 총구를 댔다. 바늘로 그의 살을 꿰뚫을 것처럼, 힘을 주어 꾸욱 누르니 남자가 숨을 허겁지겁 삼켰다.

“무슨 꿍꿍이가 있었나 본데, 당장 움직여.”

“신주님을 배신하면 지옥도 못 가! 팔척귀의 영원한 앞잡이가 될 것이다!”

“얘는 아까부터 진짜 뭐래.”

못 해먹겠다는 듯 해화가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른 신자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참고 들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말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저들만의 세계를 받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쓰러진 신도가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며 신음했다.

“자, 가.”

낙조가 남자의 뒷목에 총구를 둔 채 그를 앞으로 주욱 밀었다. 남자는 쓰러진 동료를 내려다보다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잔뜩 긴장한 뒷목 위론 식은땀이 솟았다. 모두 도망친 듯, 주위는 고요했다. 해화가 손전등을 켜 주위를 비추니, 어둠에 묻혔던 길목이 드러났다.

“이쪽, 이에요.”

남자가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낙조는 밤이의 호흡을 잊지 않고 신경 쓰면서 천천히 걸었다. 긴장한 건 낙조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되는 적이 쏟아질지 몰랐다. 아무리 청정구역이라 한들 변종을 완벽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발견된 적이 없었다. 정신은 똑바로 차린 채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빠져나갈 방법만 생각해내야 했다.

남자는 종종 걸음을 멈추거나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낙조가 물으면, 그는 경비가 순찰을 도는 구역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도록 총을 단단히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표정은 살필 수 없었다.

“그런데……, 차를 발견하신 후엔 어떻게 하실 거죠?”

“그런 걸 왜 물어봐?”

낙조 대신 해화가 반문했다. 남자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전등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제단에 있을 때보다 더욱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들을 안내한 뒤에, 나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애초에 살려 주는 게 약속이었으니까.”

낙조가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낙조의 대답에 남자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타, 타산이 안 맞잖아요. 나는 목숨 걸고 당신들 꺼내 주는 건데…….”

“당신 목숨에 우리 네 명 목숨을 걸 만한 이유도 없는데.”

낙조는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대답에 남자는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입을 얼버무렸다. 시간을 더 지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조는 총구로 남자의 뒷목을 툭툭, 두 번 두드렸다.

“길, 쉽게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줄 테니까 나도 데려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낙조를 돌아보았다. 총구에서 전해져 오는 서늘한 냉기도 다 떨쳐 내고서. 낙조는 물끄러미 손전등 빛에 힐끗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어떻게 믿고?”

“내, 내가 그럼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것 같아요?!”

“소리 죽여.”

낙조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남자는 다시 주눅이 든 얼굴로 입을 꾹 닫았다.

이 자를 데려가서 얻는 게 있을까. 물론 이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쓸모는 있을 테다. 거짓말만 하지 않는다면. 이 남자의 말대로 여기까지 와서 목숨을 버리는 짓 같은 걸 하지는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사이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뿐이다. 도착해서, 밤이를 어떻게든 살리고, 다시 멀리 도망치고…….

도착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괜찮다.

“대신 마을을 벗어나면 차에서 바로 내려. 그때부턴 알아서 살아.”

낙조가 싸늘하게 말했다. 남자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경비가 순찰을 도는 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전등 불빛 하나만으로도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곧 바닥이 자갈로 덮인 주차장이 보였다. 경비는 두 명이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뜰 해를 기다리는지, 돌담에 기대어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낙조는 조심스럽게 밤이를 가로등 뒤에 기대어 앉혔다. 호흡이 조금씩 돌아오는 중인 듯했다.

“따라와.”

가만히 서 있던 남자를 향해 낙조가 불렀다. 낙조는 오른쪽 소매를 걷고서 주먹을 쥐고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멀리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가자.’

속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걸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순식간에 두꺼운 이파리가 솟아나 탐욕스럽게 입을 벌렸다. 손바닥 중앙에서 또 불에 타는 듯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바로 곁에서 낙조의 손이 변하는 걸 본 남자는 헉,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경비들이 고개를 일제히 낙조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낙조는 발을 힘차게 굴렀다. 경비들이 쥐고 있던 총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조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낙조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달리며 거리를 좁혔다.

탕! 탕!

“너, 너……!”

경비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낙조는 가볍게 뛰어 잔뜩 열에 오른 주먹을 내리쳤다.

“아아악!”

뜨거운 쇳덩이에 닿은 고통에 남자가 몸부림쳤다. 총도 떨어뜨리고 도망가려는 남은 경비도 붙잡은 낙조는 왼쪽 갈비뼈에 정확히 주먹을 꽂아 넣었다. 소리도 없이. 약간의 그을린 자국이 남은 옷을 부여잡고, 붙들린 이도 스르륵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남자는 몸을 덜덜 떨었다.

“허튼 생각하지 마. 당신한테도 이럴 수 있으니까.”

낙조가 남자에게 따라오라고 한 이유였다. 만약의 상황도 생각해 두어야만 했다. 데려간다는 조건이 붙는 하엔. 일단 남자에겐 무기가 없고, 자신이 가진 능력 같은 것도 없다. 시시각각 감시하는 건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마을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스타렉스는 구석에 주차돼 있었다. 낙조는 주위를 확인하고 전봇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에게 손짓했다. 지운과 해화가 밤이를 부축하여 주차장에 발을 디뎠다. 잘그락,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밤거리를 울렸다.

“내가 운전할게. 아저씨가 저 남자 봐.”

“괜찮은 거 맞아?”

“음주운전도 아닌데.”

“약은 했잖아.”

“아, 아저씨 진짜 좀.”

지운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낙조를 가볍게 밀쳤다. 밤이를 맨 뒷좌석에 편하게 눕히고, 해화가 그 곁에 올랐다. 낙조는 남자를 먼저 밀어 넣은 다음 차에 올랐다. 지운은 몇 번 시동을 걸다가 삐끗거리더니, 왠지 불안하게 차를 몰았다.

“짐은……, 거의 다 있는 것 같아.”

뒤에 탄 해화가 말했다.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목소리가 밝았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남자를 예의주시했다. 그는 운전석 너머로 보이는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다 신주님 집이나 사제님들 집에 몰려 있을 거예요.”

“근데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뭘 신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운전석에 앉아있던 지운이 백미러를 통해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신을 모시는 게 아니에요. 신주님은……, 신의 주인을 줄여서 부르는 거고.”

“신의 주인? 그건 또 뭐래.”

“살아 있지 않는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래요. 그리고 그것들의 주인이라고……, 자기를 그렇게 소개했어요. 나도 처음엔 개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변종들을 그 종교 집단이 다 처리해 주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죠. 그 신주라는 사람, 어디서 변종이 오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요.”

낙조의 눈이 반짝였다. 남자가 설명하는 것만 들어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변종을 처리하는 것까진 싸움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어디서 변종이 오는지 아는 것처럼…….’

낙조는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불안하게 반짝거렸다.

“차가 나갈 수 있는 길은 여, 여기밖에 없는데, 신주님 집 근처라서, 조용히 가야 해요.”

남자가 잔뜩 목소리를 죽인 채 속삭였다. 아무리 소리를 줄여 본다 해도 엔진 소리는 아예 막지 못할 테다. 지운은 속력을 낮출까 고민하다가 악셀을 밟았다. 차라리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떨어뜨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뭐, 뭐합니까!”

“안 잡히면 되죠!”

지운의 옆얼굴은 왠지 신이 나 보였다. 낙조는 차가 멈추면 귀를 한 번 꼬집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바퀴가 작은 돌부리를 밟을 때마다 덜컹거렸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의 끝이 보였다. 더 속력을 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운은 악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갈 때, 헤드라이트에 갑작스럽게 인영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비춰졌다.

끼이이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지운이 냅다 비명을 질렀다. 바로 인영의 앞에서 멈춰 선 차 안엔 정적만이 흘렀다. 차 앞엔 중후해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신, 신주님…….”

낙조의 곁에 있던 남자가 그를 보자마자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 때문에 밖에서 차 안이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낙조는 꼭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신주의 시선에 문을 열었다. 해화가 낙조를 불렀지만 이미 그는 발을 디딘 후였다.

문을 닫고서 낙조는 천천히 신주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얌전했던 오른손이 제멋대로 비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 중앙에선 불꽃이 튀듯 따가운 감촉이 소용돌이쳤다.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나 봅니다.”

“네가 오는 걸 알고 있었지.”

신주는 낙조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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