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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51화 (51/202)

51화. 친구는 어디에 (3)

단 몇 시간 만에 몇 명의 사람을 죽였나. 살아 있는 사람들과 더럽게 앞다투며 싸우려고 지금까지 살아왔나. 사방이 조용해지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피냄새가 낙조를 자극했다. 해화는 지운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그를 깨우려 했다. 낙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방에서 비틀거리며 나왔다.

‘이곳 전력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유일하게 불이 켜진 집. 낙조는 좁은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틀어 놓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에 핏자국이 말라붙어 손에 물을 묻힌 다음 손톱으로 긁어 내듯 자국을 지워 내야 했다. 피가 섞인 물이 하수도를 타고 내려갔다. 낙조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떠냈다. 여전히 핏자국이 얼룩덜룩 남아 있었다.

‘밤이 누나는 어디 있는 거지?’

이들의 인력이 이게 끝일 리가 없었다. ‘신주’라 불리는 이도 만나 보지 못했다. 해화가 끌려갔던 곳엔 여자들이 갇혀 있었다고 했으니 구역마다 관리하고 보초를 서는 이들이 있을 테다. 다만 그들을 통솔하는 이가 죽었으니 방어막을 뚫는 것이 어느 정도는 쉬워졌을지도 모른다.

해화를 만난 건 운이 좋은 덕분이었다. 파란 지붕까지 오는 길이 대장의 계획 중 하나였다고 하더라도, 지운을 찾고 지켜 냈으니 나쁘지 않은 행보였다. 남은 건 밤이였다. 여태껏 그녀의 흔적과 맞닿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이쪽 구역이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지 알지도 못하니 무작정 찾아 헤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호랑이 소굴에 제 발로 들어온 거야.’

낙조는 이마를 짚고 시름에 잠겼다. 진동휘의 쪽지만 믿고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더 이상 안전하게 일행들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은 없는 걸까.

다른 무리들이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이 집으로 몰려들지도 몰랐다. 낙조는 마저 핏자국을 물로 대충 지워 낸 후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마침 지운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아저씨…….”

“미안해, 너무 늦게 왔다.”

“난 아저씨가 다 이길 줄 알았어.”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지운의 말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는지 지운은 쉽게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낙조는 자신이 부축하겠다고 말하곤 지운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밤이 누나도 잡힌 것 같아.”

“어떻게 알아?”

“여자 두 명이라고 그랬거든.”

해화는 자신이 끌려갔던 곳에서 밤이를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길이 어긋났던 걸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끌려간 걸까. 이곳이 어떤 목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밤이의 자취를 찾으려 하니 막막했다.

“처음부터 신관, 믿음 어쩌고 했는데……, 사이비 종교가 마을 사람들을 다 휘어잡았는지도 몰라.”

지운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만히 계단을 내려가던 해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사이비종교랑 변종. 뭐가 더 믿음직스럽겠어. 사이비라도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믿겠지.”

“……거기에 변종들을 다 처리해 주고 먹을 것, 재워줄 곳까지 내어주니 선택지 같은 건 없었을걸.”

지운의 대답에 낙조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늘에 가려진 곳. 세상과의 교류가 단절된 상황에서 살기 위한 방법이 같은 인간에게 복종하는 거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처지에 때 맞추어 나타난 그릇된 믿음이 사람들을 무릎 꿇게 만든 것과 다름없었다.

“차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낙조가 현관문에 도달했을 때 말했다. 해화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운을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차가 그대로 있을까? 차랑 거리가 얼마 안 되는 곳에서부터 마주쳤잖아.”

“없으면 찾아야지. 다른 차라도.”

“밤이 언니는?”

“……찾아야지.”

자신이 내놓은 대답이긴 했지만 썩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낙조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지운을 부축해 마당을 나아갔다. 열린 대문 밖 길가는 조용했다. 아직 무전으로 이곳 상황에 대해 보고가 되지 않았음이 확실했다. 낙조는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도 주위를 심히 경계했다.

반쯤 돌아왔다고 생각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곧 한손엔 손전등을, 한손엔 무전기를 쥔 젊은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낙조는 해화에게 지운을 잠시 맡기곤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관님, 신관―, 억, 깜짝이야!”

“실례 좀.”

낙조는 조용히 말하고서 남자의 입을 막고 팔로 어깨를 끌어안은 채 가로등 아래로 질질 끌었다. 남자는 당황한 탓에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하고서 해화와 지운이 있는 곳까지 줄줄 끌려왔다.

“흡, 흑, 흡.”

손바닥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더 뒤따라오는 인기척이 없나 잠시 기다렸다가 무전기와 손전등을 남자의 손에서 빼앗은 후 여전히 입은 막은 채 물었다.

“몇 시간 전에 도망치던 여자 잡은 얘기 들은 적 있습니까?”

남자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가며 낙조와 해화, 지운을 번갈아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낙조의 몸에 덕지덕지 묻은 핏자국을 볼 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낙조는 아주 살짝 입을 벌릴 수 있을 만큼만 손을 풀고서 다시 한번 물었다.

“어디로 데려갔는지 압니까?”

“그건, 그게, 그러니까, 거긴…….”

“대답만 하세요.”

낙조는 남자의 턱을 강하게 쥐고서 뇌까렸다. 엄청난 악력에 겁에 질린 남자가 몸까지 덜덜 떨며 낙조를 올려다보았다. 손전등 불빛에 그을린 듯한 그림자가 낙조의 얼굴 위로 졌다.

“제단, 제단으로 데려간다고 했, 했습니다.”

“제단?”

“오늘 해가 뜨기 전에, 제물, 제물로 바친다고…….”

“거기까지 길 안내해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동이 트기 전이라면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낙조는 남자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운 후 한쪽 팔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남자는 몇 걸음 걷다가 풀썩 주저앉는 것을 반복하면서 또 다른 갈래길로 셋을 안내했다. 이미 겁에 잔뜩 질린 상태라 특별하게 압박을 가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파란 지붕의 집을 지날 때, 남자는 소리를 지르려는 듯 몸을 잠깐 비틀었으나 낙조가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주자 곧장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단, 제단은 아무나 못 들어가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집 앞에서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두 블록 정도 앞에 불이 켜진 집이 보였다. 문앞엔 그림자처럼 보이는 인영 몇 개가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문지기들인 듯했다.

“당신도 못 들어갑니까?”

“저는, 저는 지극히 일반적인, 평범한, 신도라서…….”

“무전 치세요. 신관 지시로 제물들 추가로 데리고 간다고.”

“예, 예?”

“우리들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고 무전 치시라고요.”

피가 튄 안경알 너머로 낙조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남자는 한동안 고민하며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무전기를 받아들었다. 낙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채널을 맞추고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아. 오소리, 드, 들립니까.”

-오소리, 들린다.

“신관님 지시로, 아까 잡은, 사람들, 모두, 인질로……, 아니, 제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지금, 지금 거의 다 왔습니다. 문, 열어 주십시오.”

-갑자기요? 고낙조는 신관님께서 직접 보겠다 하셨는데.

“그게, 그러니까…….”

남자는 머리가 하얗게 질린 듯 말을 버벅거렸다. 낙조는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다가 무전기를 빼앗아 대신 말했다. 어차피 무전기로 연결되는 목소리는 잡음에 섞여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테다.

“고낙조가 반항했고,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가까스로 진압 완료했고, 지금 바로 제단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이, 재수없는 새끼. 그러니까 그 군인 새끼 말 들어주는 게 아니라니까. 알았다, 오소리.

무전은 그렇게 끊겼다. 낙조는 싸늘하게 남자를 바라보면서 무전기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남자는 딸꾹질까지 하면서 낙조의 눈치를 보았다.

“문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말 더듬지 마시고요.”

“…….”

“살려 달라는 말 같은 거 나오는 순간 다시 저 문밖으로 못 나온다는 사실도 알아 두시고.”

낙조는 남자에게 경고하며 피딱지가 앉은 안경알을 옷소매로 닦아 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낙조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남자가 혹시라도 말을 제대로 못한다면, 신도인 척하기 위해서였다. 안경 하나 벗는다고 인상착의가 완전히 뒤바뀌는 건 아니더라도 날도 어둡고 가진 빛이라곤 손전등뿐이니 어느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몰랐다.

가진 무기라곤 권총이 다였다. 이마저도 총알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도 벅찬 상황. 낙조는 파란 지붕 집에서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발휘시켰던 이파리를 다시금 꺼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숨통을 조이는 상황이 다시금 펼쳐질까. 밤이는 아직 안전할까. 수많은 생각이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를 짓씹고 있을 때쯤 문앞에 다다랐다. 경비를 서고 있는 이들이 손전등으로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근데 신관님 무전이 안 된다. 너는 연락 받은 거 있냐?”

이미 제물로 쓰겠다는 생각에 한층 물러진 건지 무전기를 든 남자가 건들거리며 물었다. 낙조 쪽에 선 남자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특별하게 전해들은 얘기는 없다고 덧붙였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다 들여도 될까요?”

“어어, 아직 해 뜨려면 좀 멀어서.”

경비들은 생각보다 경계심이 낮았다. 그들은 무리를 지은 채 담배를 피우며 시답잖은 얘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한 명이 재를 털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없었다. 남자는 낙조의 눈치를 보며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근데 변종을 제물로 바쳐도 돼?”

“누가 변종인데?”

“저 년. 발에 풀 같은 게 있었다고.”

“야, 너 신관님한테 여자애는 보여 줬어?”

해화가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려는 순간, 무리 중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 남자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어어, 하고 말을 끌었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남자가 해화의 손목을 잡아채려는 순간, 낙조가 남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뭐야, 씹.”

“신, 신관님께서 늦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어요.”

낙조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팔을 비틀어 빼려고 할 때, 방에 먼저 들어간 이가 뒤늦게 소리쳤다. 남자는 낙조를 고요하게 노려보다가 팔을 빼내고선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마냥 툭툭 털어 냈다.

“재수 없게, 씨바. 빨리 끝내라 그래.”

“네, 네.”

낙조는 해화를 먼저 방으로 들이고 문이 닫히는 것까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문이 완전히 잠기고 나서야 해화는 낙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밤이 언니…….”

한곳에 멍하니 시선을 둔 해화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방안을 밝히는 것이라곤 초뿐이었다. 각자 크기와 두께가 다른 초들이 방의 테두리를 따라 일직선으로 놓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철제 침대가 영 어울리지 않게 박혀 있었다. 밤이는 그 위에 일자로 누워서, 간간이 숨만 내뱉었다.

“네 명을 한 번에 처리하는 건 좀 오래 걸릴 텐데.”

그 곁은 꽤 덩치가 크고, 머리숱이 별로 없는 남자가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낙조를 비롯한 해화와 지운을 슥 훑어 보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떤 방식으로 이들이 저 철제의자를 제단으로 부르고, 제물을 바치는 건지 알 수 없어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이 여자부터 끝낼게.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끌었어.”

남자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떠맡은 것처럼 말했다. 그는 식칼을 옆에 있던 협탁에 놓아 두고 작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낡고 헤진 책 표지엔 ‘계시록’이라고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페이지를 몇 장 넘기더니 그렇게 좋지 않은 발음으로 기도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주님이 악인의 영혼을 용서하시고 흡수하여 다시 영생의 기회를 주시니, 지금까지 지었던 죄를 너는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앞으로의 삶을 온전히 신주님께 바치리라…….”

“우리는 영생까지는 안 바라. 그리고 당신들한테서 기회 같은 것도 안 바라지.”

낙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기도문을 읽다 말을 멈춘 남자가 험상궂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네놈이 문제구나.”

남자가 오른손으로 식칼을 집어 들었다. 낙조는 해화에게서 등 뒤로 권총을 받아든 다음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대가리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스산한 바람이 목소리를 감싼 듯 차가웠다. 낙조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휘청거리는 초의 불빛들이 얼룩진 그림자를 낳았다. 침묵도 잠시뿐이었다. 남자가 철제 침대를 돌아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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